

자유 연재 | 글링
"빚을 갚는다고 생각해요." 7년 전, 바닥으로 떨어졌던 나를 구원해 준 남자가 찾아왔다. 빚을 진 건 나인데, 빚을 갚겠단다. 내 비서가 되는 조건으로. "신모현 사장님이 시키면 뭐든 다 할 겁니다." "1년, 딱 거기까지만이야." 선을 그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건방지게 굴지 마. 내 비서로서 남도준 씨는 그게 가장 큰 결점이야." "내가 사장님 비서가 아니라면요?"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동시에 심장이 멈춘 것처럼 공기가 조용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너를 보는 내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게.
제1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의 사진.
싸구려 AV에서 아무렇게나 골라 캡쳐한 것처럼 두 사람은 나신으로 한데 얽혀 있었다.
가지가지 하네.
모현은 약혼자의 은밀한 행위를 담은 사진을 무감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우리 사이 아시죠?”
여자의 말투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키스를 나누는 사진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자랑하듯 말했다.
“잘 나온 사진으로만 골라서 왔어요.”
모현은 손에 들고 있던 비서 채용 이력서를 옆에 내려놨다.
여자가 내미는 사진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잠잠했다.
“이게 그쪽이에요?”
모현은 검지를 내밀어 사진 속 여자를 가리켰다.
“네. 보시다시피요.”
여자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왜 묻냐는 투로 말했다. 다소 짜증이 묻어나는 여자의 목소리에 모현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렸다.
모현은 제 공간에 침범한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설다미.
이제 막 떠오르는 신예라는 타이틀이 붙기 시작한 배우.
연기력은 그저 그랬고, 그렇다고 예능감이 탁월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몇 개 찍은 광고의 이미지가 좋아서 여자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 역할, 또는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 정도로 꾸준하게 나왔다.
물론, 대중이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설다미가 광고를 많이 찍은 데는 문재영의 탁월한 서포트가 있었다.
신일 그룹 상무인 문재영은 모현의 약혼자였다.
재벌가가 그렇듯 사랑이 아닌 서로의 조건에 맞춰 맺어진 짝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황당한 상황에도 모현은 침착할 수 있었다.
문재영은 연인이 아니라 파트너니까.
마음에도 없는 문재영과 약혼한 이유는 하나였다.
[J 호텔 사장 신모현]
투명한 명패에 새겨진, 호텔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였다.
여기까지 오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감히…….
모현은 보이지 않게 입술 안쪽을 세게 물었다.
문재영이 누구를 만나서 무슨 짓을 하든지 모현은 상관없었다. 그가 지금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이 남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였다.
그런데.
그의 외도 상대인 설다미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 버렸다.
직원들이 빤히 보는 벌건 대낮에, 내연녀 주제에 J 호텔 사장실까지 밀고 들어왔다.
모현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공간에 설다미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모현은 능란하게 표정을 감추며 테이블 위에 뿌려진 사진을 흘긋 봤다.
“이게 다인가요?”
“더 있어요.”
“아니. 난 그걸 물은 게 아니야.”
모현은 조소를 담은 웃음을 한 번 내뱉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는지 설다미의 목이 시뻘게졌다.
모현은 테이블에 흐트러진 사진을 설다미 쪽으로 밀었다.
“이게 원본이냐는 뜻이에요.”
“네?”
“내가 말을 어렵게 했어요? 난 그냥 이게 원본인지, 아니면 사본인지 물은 건데.”
“……원, 원본 맞아요.”
“그럴 리가.”
모현은 혀를 찼다. 그 모습에 설다미의 작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보통의 여자라면 자신의 남자가 외도하는 사진을 보고 당황해야 했다. 하지만 신모현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 침착한 모현의 모습에 설다미는 뜨끔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설다미는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진을 내미는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왜 자신이 궁지에 몰린 듯한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까.
“보니까 영상으로 찍은 걸 떼 내서 뽑은 사진 같은데?”
“…….”
“영상이 담긴 원본 파일을 나한테 주고, 복사해 둔 파일이 있으면 지워.”
모현은 손으로 눈썹 근처를 매만졌다. 고개를 든 그녀는 설다미의 얼굴을 직시하며 물었다.
“얼마면 되겠어요?”
“네?”
설다미의 두 눈이 멍청하게 커졌다.
저런, 안타깝다는 듯 모현은 한마디 읊조리고는 다시 물었다.
“돈 바라고 온 거 아니에요?”
“사장님?”
설다미의 목소리 끝이 올라갔다. 그녀는 귀까지 벌게진 채 모현을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저, 돈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니에요!”
“그러면?”
모현은 팔짱을 끼며 한쪽 다리를 꼬았다. 설다미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상무님을 사랑해요.”
“사랑?”
들어서는 안 될 단어를 들은 듯 모현의 깨끗한 이마에 실금이 갔다. 충격보다는 감히 네까짓 게 사랑이라고 말했냐며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설다미는 그 모습에 모현이 당황했다고 순간 착각했다.
그래,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멀쩡하면 그건 사람도 아니지.
설다미는 오만하게 턱 끝을 쳐들었다.
“재영 씨와 저,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이라…….”
모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늘진 그녀의 잇새로 조소가 터졌다.
“내 약혼남이 그래요?”
“……네.”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는 설다미를 향해 모현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스물하나의 패기라고 해야 할까.
2024.08.1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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