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표지
너라는 운명
profile image
그린엘
100화무료 5화

자유 연재 | 글링

조회수 168좋아요 0댓글 0

“무늬만 결혼? 계약 결혼 같은 건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수록 그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올해 안에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은재는 순간 더한 비극이 왔음을 깨달았다. “서약이면 모를까 계약할 생각 없고, 딴 남자만 안 만나면 자유는 보장하지만 이혼? 내 사전에 없으니까 꿈 깨.”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한집 살던 오빠 녀석이, 내 운명을 타개하는 데 필요한 정혼자로 변모한 것. “넌 그것부터 해.” “뭐, 뭘?” 저승사자 같은 눈빛으로 나를 살리겠다는 그는 꽤 진심이었다. “내가 남자라는 인식.” 날 때부터 타고난 시한부 운명. 이마저도 저당 잡힐 위기에 처한 가련한 인생. 여기에, 한집도 모자라 한 침대를 쓰겠다며 달려드는 이 원수 같은 1인자. ‘찐’남매를 능가하는 그가 내게 하려는 것이 생사 로맨스라니. 모든 발단은, 어느 날 시작된 그 불길한 편지 때문이었다. *해당 작품에서 등장하는 일부 장소 및 배경, 설정 등은 모두 허구로 창작된 것임을 밝힙니다.


01. 꽃이 꺾일 사주

사람이 죽기 전, 간절한 염원이 깃든 물건을 나눠 가지면

죽어서도 정인을 만나게 되지.

이건, 운명에 맞섰던 한 남자의 이야기야.

* * *

“죽어.”

신당 안 공기가 스산해졌다.

신명을 받든 무당 신디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해선의 동공을 빤히 주시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신디의 빨간 입술에선 오싹한 쇳소리가 흘렀다.

“그쪽 딸내미, 올해까지라고.”

“올해라뇨, 왜 갑자기…….”

“꽃은 한번 피면 지는 게 운명이야. 때가 온 게지.”

쉬이 마주할 수 없는 위압감에도 해선은 신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꽃이 꺾일 사주.

딸 은재가 타고난 저주 같은 사주가 기어이 끝을 고한 까닭이었다.

꽃이 꺾일 사주란 그런 것이었다.

숱하게 신당을 드나들며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에도 벗어날 수 없는, 어떠한 발악도 용납지 않는…… 인간에게 오는 최고의 악재(惡災).

“방도가 있을 거잖아요. 결혼, 결혼만 하면…….”

“딸년 사주는 결혼으로 안 돼. 말했잖아.”

해선은 매섭게 눈을 치뜨는 신디를 보며 무너져 내렸다.

올해가 다하면,

딸 은재의 꽃다운 목숨도 진정 다할 모양이었다.

* * *

더위가 찾아드는 여름밤.

한적한 정취가 스민 골목에 매미가 듬성듬성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주택들 끝에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볼 만한 무채색의 2층 벽돌집이 보인다.

가로등이 비추는 작은 마당, 아래층 툇마루에서 뻗어 나온 바닥 길, 위층으로 연결된 철제 계단까지.

겉으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고풍의 멋과 내부의 간결한 현대미가 한데 어우러지는 독특한 집이다.

“어, 방금 수정안 보냈으니까 확인해.”

-내일 줄 줄 알았더니. 이사는 잘했어?

“내가 이사했나 뭐. 끊자, 늦었다.”

-오케이. 쉬어.

전화 너머 여자의 목소리가 끊기자 수호는 서재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그를 설명하는 구절은 다양하되 간단했다.

잡지에 실릴 법한 자택을 한 땀 한 땀 직접 설계한 집주인, 독보적인 감각으로 국내외 러브 콜을 한 몸에 받는 K-건축가, 현강 그룹이 뒷받침하는 차현 사무소의 건축소장.

고로, 사기캐의 실사판.

“하아.”

그 정점을 찍듯, 한숨과 함께 살짝 젖혀지는 고개 위로 조명이 부서진다.

선이 뚜렷한 턱선과 오뚝하게 솟은 콧대 하며, 짙은 눈썹이 완벽히 차가운 인상을 자아냈다.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누르자 유일하게 부드러운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2층 세입자가 들어온 날.

계약이 달갑지도 않은 마당에, 감히 세입자가 집주인인 자신을 이삿짐센터처럼 부려 먹었다. 능수능란하게. 아침부터 밤까지.

‘젠장.’

책상 서랍 마지막 칸이 잠긴 걸 확인한 그는 그나마 짧은 계약 기간을 상기하며 서재를 나섰다.

‘6개월. 6개월만 참자.’

그대로 침실로 직행해 문을 닫고 셔츠를 벗어젖히며 침대로 풀썩 엎어졌다.

느른한 숨을 내쉬자 컴컴한 어둠 속 피곤에 지친 상체가 날 것 그대로 오르내린다.

성난 근육들이 숨을 고르고 날렵한 허리와 떡 벌어진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를 따라 한쪽 팔이 옆으로 척 뻗어질 때였다.

말랑.

‘뭐지?’

얇은 이불 밑으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그의 손끝이 멈칫했다. 슬며시 다시 움켜쥐자, 한층 선명해지는 말캉함.

‘이게…… 뭐야?’

당황과 달리, 본능처럼 붙은 손이 더듬거리며 정체를 감지해 갔다.

말랑말랑하고 몰캉몰캉한,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

설마.

“차수호.”

“으어어어어!”

단언컨대 찰나였다.

손을 얹고, 회로가 돌고, 머리털이 쭈뼛 서고, 눈이 마주치기까지 아주 짧은 찰나.

“손 떼! 이 변태 새끼야!”

“억!”

퍽 소리 나는 발길질에 침대에서 떨어진 수호는 아연하며 스위치부터 찾았다.

사위가 밝아지자 제 몸을 감싸며 노려보는 여자의 눈빛이 그를 아찔하게 했다.

“너, 너, 네가 왜, 왜…….”

“욕구 불만 새끼! 신고할 거야! 나가! 당장 나가아악!”

침대를 날려 버릴 기세로 베개를 날리는 여자를 보며 수호가 황급히 돌아섰다.

그때 툭, 침구와 함께 날아온 웬 인형 하나가 그의 발 앞에 떨어진다.

‘……토끼?’

바닥에 코를 박은 토끼 뒤통수가 뽀얗게 빛나자 두 사람이 일순 정지됐다.

“뭐, 뭐해? 빨리 안 나가?”

“…….”

“나가라니까?!”

다급해진 그녀와 달리 그는 몸을 굽혀 느리게 뒤통수를 집었다. 역시나 손에 착 감기는 감촉. 이 말랑말랑함.

‘하. 어쩐지.’

크더라.

“……야, 민은재.”

안도는 순간일 뿐, 수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토끼 머리를 꽉 구겨 쥐었다.

그를 본 은재는 침대 헤드를 동아줄인 양 붙잡았다.

지구 유일, 완전무결로 무장한 차수호를 동네 변태로 무너뜨리는 괴생명체.

엄친아인 그가 사기캐로 칭송받을 때마다, 그냥 사기꾼이라며 평판을 떨어뜨리던 엄친딸.

한때는 그가 얹혀살았던 집의 딸이자, 오늘은 그를 실컷 부려 먹은 그 세입자가 침실까지 쳐들어와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오, 오늘 이사 왔기 때문에?”

수호는 잔혹하게 일그러진 토끼를 본보기처럼 툭 던졌다.

몸속의 피마저 차가울 듯한 그가 이 생명체 앞에서만은 매사 들끓는다.

“세 번은 안 묻는다. 왜 여기에 있어.”

“너, 옷 입을 생각은 없지?”

“민은재!”

“비밀번호가 세 번 만에 풀렸어. 어떡해? 들어와야지? 다섯 번도 아니고 세 번인데?”

은재는 잽싸게 대꾸하며 가련한 토끼를 끌어안았다.

치한 취급은 미안하다만, 수십 번도 더 시도해 입성한 이 방에선 절대 나갈 수 없었다.

토끼 뒤통수가 은재의 가슴팍에 착 붙을수록 수호는 인내를 불렀다.

대화는 사람과 해야지. 민은재랑 하는 게 아니다.

“나가.”

“나, 침대가 없어.”

대화는 사람과…… 민은재는 사람이 아니고…….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고객센터이용 약관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유료 콘텐츠 제공 약관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

Copyright © viewcommz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