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왜 나만 남자인데!” 빙의 후 갑자기 성별이 바뀐 것도 억울한데, 내가 소설의 남자주인공이란다. 그것도 여자주인공 아이린의 인생을 홀라당 말아먹는! 엄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으니 최대한 열심히 살아보려 했다. 그렇게 아이린과는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가 되었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어야 할 서브 남주 유진과는…… 썸을 타고 있는 것 같다. “이 꽃 예쁘다. 유진 너랑 닮았어.” “나랑 닮은 게 어떤 건데? 막 사랑스러운가?” *** 유진이 굳이 내 옆으로 따라와 바싹 붙어 앉았다. 그의 입술이 내 귓가로 다가왔다. “조심해. 세상엔 나쁜 사람들이 많잖아.” “그, 그렇지.” 근데 지금은 네가 제일 나빠 보이는데. 다시 여자가 된 나를 유진이 알아볼 리가 없는데, 또 내가 좋다는 걸 보면 유진도 취향이 참 한결같았다.
1화
“흠, 아주 숭해.”
나는 슬쩍 벌렸던 바지춤을 곱게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해 보려 했지만, 어디서도 개연성은 찾을 수 없었다.
불이 났고, 그래서 정신을 잃었고, 일어나니까 남자가 됐다. 심지어 내가 살던 세계도 아니야.
“왜지?”
아니, 불이 났는데 대체 왜 남자가 돼서 깨어나는 결과가 나오냐고.
보통 불이 난 집에서 정신을 잃은 경우엔 크게 다치거나, 죽어야 정상 아니야?
짧은 머리칼을 헤집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꿈이어야 한다.
벌써 한 시간째 꿈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지만 일단 계속 고민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일평생 여자로 살아온 내가 왜 남자가 되느냔 말이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가장 가능성 있는 답안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미쳤나 보다.”
좋을 대로 결론을 낸 나는 아까 방문했던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도련님.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도련님은 지금 마차 사고를 당하시고 석 달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기억에 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의사 말대로 기억에 혼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여자가 된 긴 꿈 같은 걸 꾸고 현실과 꿈을 혼동하고 있는 것일 테다.
내게 남자로서 살았던 기억이 전혀 없다는 문제지만, 사고를 당했다고 했으니 기억이 없을 수도 있지.
분명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찬찬히 떠오르겠지.
사실 여자였던 게 꿈이었다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지금은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하고 싶지 않았다. 석 달 만에 깨어났다고 하더니 몸에 힘도 없고 정신도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하고 침대 헤드에 몸을 편히 기댔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낯설었다.
아무리 사고를 당해서 오래 누워있었어도 몸이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 있는 건가.
길쭉한 팔을 앞으로 쭉 뻗은 나는 내 팔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 팔인데도 낯설어 짐짓 무섭기까지 했다.
순간 머릿속에 인지 부조화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애써 눌러 두었던 위화감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급작스럽게 두통과 이명이 찾아왔다.
‘시은아! 박시은!’
‘여보! 당장 시은이 업어요!’
“뜨거워……!”
집 안이 온통 불바다였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렬하고 거대한 불꽃이 몸을 감쌌다.
강아지를 구하려고 내가 뻗었던 팔은 방금 내가 봤던 팔보다 더 짧았고 손은 더 작았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을 빠져나가던 몸 위로 낡은 주택의 대들보가 떨어졌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과 뼈가 타며 나는 역한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데 귓가에서 이명만 맴돌았다. 불꽃이 일렁이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어머니의 꿈이었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맞은 마지막이었다.
……님.
……련님!
“도련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낯선 이의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신을 감싸던 뜨거운 화마도, 자신을 끌어안고 무너지는 집에 함께 남겨진 부모님도 없었다.
나를 둘러싼 건 낯선 방과 낯선 사람이 존재하는 낯선 상황이었다.
“도련님. 제발…… 제발…….”
낯설다고 생각했던 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상대방의 걱정 어린 표정이 뒤늦게 눈에 들었다.
순간 눈앞의 사람과 어머니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 냈다.
시종, 폴이 그런 내 손을 붙들더니 황급히 뒤를 돌았다. 의사가 달려와 내 손목에 솜을 가져다 댔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토록 간절히 붙잡았던 게 아버지의 손목이 아닌 내 손목이었다는걸 깨달았다.
어찌나 세게 붙잡았는지 손톱이 피부를 엉망으로 파고들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뒤늦게 고통이 몰려왔다.
혹여 내가 또 나를 학대할까, 폴은 내 팔을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나는 낯설다고 생각했던 폴의 얼굴이 일순간 익숙해짐을 느꼈다.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작금의 상황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폴에 대해 떠올리려 해 봤지만 떠오르는 건 그가 직접 말해 준 설명 몇 가지밖에는 없었다.
폴은 내 수행 시종으로, 내가 태어난 해에 저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년 동안 내 곁에서 나를 보필했고 내가 전쟁에 동원되었을 때도 함께했다.
나의 시종인 동시에 전우이고 친우인 셈이었다.
폴은 전쟁터에서 다쳐 검을 잡지 못하게 된 이후로는 살이 좀 찌긴 했지만, 지금이 인상은 더 좋아져서 만족스럽다며 허허실실 웃었다.
그런데 나는 폴의 이야기를 다 들을 후에도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조금도 없었다.
분명 소중한 사람이었을 텐데.
내 머릿속엔 박시은이란 사람으로 살았던 기억이 더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마차 사고를 당한 후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꿈이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한 기억이지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초자연적인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게다가 손목.
나는 손목의 상처를 쳐다봤다. 살이 다 패여 있었다.
기억을 빨리 찾아야 할 이유가 더 확실해졌다. 이렇게 불안해해서야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의사가 그런 내 속마음을 다 알지는 못해도 불안감은 알아챈 듯 말했다.
“곧 기억을 되찾을 수 있으실 겁니다.”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2024.08.15 13:20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