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한 여자가 있다. 사생아로 태어나, 왕비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자란 덕에 그녀의 세상은 우물만큼이나 작다. 한 남자가 있다. 형의 정략 결혼 상대였던 여자와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한없이 넓었던 그의 세상은 작아졌다. 여자의 원죄, 남자의 원망. “차라리 죽을 걸 그랬어……”
#1
시어드릭 캠브리지와 알리사 에이버리의 결혼은 카스토르 왕국 최고의 비극이자 이슈 거리였다. 카스토르 왕국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전부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란히 손을 잡고 입장하는 두 사람을 쫓았다.
“켄드릭 캠브리지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죠? 일주일?”
“중요한 건 알리사 왕녀가 켄드릭 캠브리지의 약혼녀였다는 거겠죠.”
“쉿. 그래 봤자 알리사 왕녀나 켄드릭 공이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렇지만…… 시어드릭 공이 지금 제정신이겠어요?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에이버리 왕실과 연을 맺는 거잖아요. 그것도 강제로, 형수가 될 뻔했던 여자와.”
“쉿.”
입을 꾹 다무는 귀부인들의 곁을 시어드릭과 알리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알리사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전부 들은 뒤였다.
알리사가 제 손을 잡고 있는 시어드릭의 손을 꾹 움켜쥐었다. 이게 그에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어드릭의 붉게 부풀어 오른 눈가가 도드라져 보였다. 알리사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알리사의 탓이 아니다. 켄드릭 캠브리지가 죽은 건 그녀의 탓이 아닌데…….
‘내 탓 같아.’
알리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어드릭은 결혼식 내내 단 한 번도 알리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때문에 알리사가 본 시어드릭의 모습은 오로지 옆모습뿐, 그마저도 쓰고 있는 두꺼운 면사포 덕분에 그의 머리카락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입매도.
알리사는 단단한 시어드릭의 어깨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식을 올리면서 붉은 눈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결혼식이라고 설레네. 철없게.
알리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
에이버리 왕실의 명으로 전쟁에 출전했던 켄드릭이 혁혁한 공을 세워 돌아왔다. 사람들은 켄드릭을 영웅이라고 칭송했고 그는 ‘30년 알프 전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왕은 켄드릭에게 어떤 상을 내려야 할지 고심에 빠졌다.
켄드릭의 캠브리지 가문에는 왕실보다 많은 재산이 있었고 광활한 영토가 있었다. 캠브리지의 직할령에서는 매년 사과 농사로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였고, 비옥한 토지에는 곡식이 모자를 날이 없었다.
캠브리지의 부는 마를 날이 없었고 그것은 권력으로 귀결되었다. 오래된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는 캠브리지 가에 귀족들은 스스로 고개를 조아렸다. 캠브리지가 오랜 세월 의회장을 맡아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캠브리지의 의지가 곧 왕국을 움직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캠브리지는 민심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영지민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고 존경받는 영주로 추켜세워졌다. 민심을 잃어 가던 왕이 내도록 캠브리지를 시기해 온 건 그런 이유였다.
캠브리지 공작가에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결핍이었다. 에이버리 왕실은 결핍 없는 캠브리지 공작가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왕은 캠브리지의 명성이 더 드높아지기 전에 캠브리지 가문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에이버리 왕실은 켄드릭 공작과 알리사 왕녀의 결혼을 명했다.
친모를 닮은 백금발과 신비로운 제비꽃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알리사는 왕실의 골칫덩이였다. 그녀의 친모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집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알리사를 왕실의 치부라고 여겼다.
하지만, 왕실의 제물이 되어 줄 알맞은 이이기도 했다. 알리사는 켄드릭에게 공주의 남편이라는 허울 좋은 굴레를 선물할 당사자가 되었다.
그런데 왕의 명령으로 결혼식 세 달 전에 출정 길에 올랐던 켄드릭이 시체로 돌아왔다.
켄드릭과 기사들은 도망치는 적군을 굳이 쫓을 필요 없다고, 승리한 전쟁에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하지만, 왕은 그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명에 못 이긴 이들은 출정했고, 결국 시체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왕이 캠브리지의 명성과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렸으나 함부로 입 밖으로 내는 실수를 하진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알리사는 결혼식 일주일 전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켄드릭은 전쟁 영웅이라는 이유로, 왕의 독단으로 왕립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왕립 묘지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왕족의 신분을 가진 자들뿐이었다. 왕은 그것을 족쇄 삼아 켄드릭의 동생, 시어드릭을 새로운 신랑감으로 삼았다.
왕의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서 모르는 귀족이 없었다. 에이버리 왕실의 독단에,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고 왕을 두고 ‘영웅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했다. 게다가 영웅의 유해를 강탈한 ‘도둑’이라고들 이야기했다.
에이버리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괜찮을 거야.’
아무도 시어드릭이 알리사를 좋게 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알리사조차도. 그냥, 살다 보면 모든 게 무뎌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기대할 뿐이다.
알리사의 의지는 한 번도 수용된 적이 없었다. 반항한다고 해도 왕과 왕비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반항했다고 더한 고통을 안겨 줄 테지.
‘천한 핏줄 태생이니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24.08.1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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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판타지 색이 짙은 로판인건가...
24.12.13

역시 시어드릭이었네
24.12.01

설마 시어드릭인가?
24.12.01

시어머니가 주인공을 괴롭힐 줄 알았는데 안 괴롭히네
24.12.01

정통 로판을 비꼰 느낌이네
24.12.01

몰입감 장난 아니네요... 재미있게 보고 가요!
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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