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주인공을 구하고 죽는 역할에 빙의되었다.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 주인공 대신 일곱 번을 죽어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문제는 네 번째 빙의했을 때 벌어졌다. "이번에도 혹시 모르니 얘기할게요." 착하고 예쁜 우리의 주인공, 페라드가 말했다. "날 구한답시고 죽지 마요. 그거 정말 기분 나쁘니까요. 만약 이번에 또 그런다면……, 셀린을 되살린 다음에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예요." 페라드가 웃었다. 평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미소였다. "알았죠? ‘부탁’해요. 셀린." 협박이었다.
1.
계절 학기 첫날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나는 급발진해 도로로 달려든 대형 트럭에 치였다.
죽음의 순간은 짧았다. 즉사였다.
놀람과 당황, 날카로운 고통이 한 차례 지나갔다. 눈을 떠 보니 나는 낯선 장소에 와 있었다. 하얗게 칠해진 벽과 높은 천장, 아치형 기둥이 유럽의 오래된 박물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1층 로비를 한 바퀴 휘둘러본 뒤 나는 생각했다.
‘다행이네.’
괜찮은 죽음이었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고, 질질 끌어 주변 사람들을 희망 고문 하지도 않았으며, 지옥에 떨어지지도 않았다.
시기가 이른 감은 있었지만 원래 내 목표는 서른 살에 죽는 거였다. 7년 정도 당겨졌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박물관인지 도서관인지 모를 고풍스러운 건물을 둘러보았다. 건물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정확히는 사람의 형태를 한 난쟁이들이었다. 난쟁이들은 건물의 이쪽 복도에서 저쪽 복도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언어로 떠들어 댔다.
그때 누군가 유리로 된 회전문을 통해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너구리였다.
“에구구!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안내 들어가겠습니다!”
얼굴은 너구리, 목 아래는 사람인 생명체였다. 너구리는 놀이공원의 도우미라도 된 양, 과하게 발랄하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안내를 시작했다.
“김제희 님.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놀라셔쬬? 걱정 마세요! 이곳은 책 속의 세상! 책 속에 빙의되어 저희가 드리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시면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드립니다! 김제희 님께서 들어가실 세계는 ‘페라드 황제 만들기’!”
너구리가 책의 소개 글을 읽었다. ‘궁에서 쫓겨난 제3황자 페라드가 황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키워드는 #판타지 #먼치킨주인공 #10년전작품 #해피엔딩.
나 역시 잘 아는 이야기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죽기 직전,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이 글의 최신 화에 또 댓글을 달고 있었으니까.
[ ㄱㅇㄱㅇ ]
기웃기웃. 다음 편이 올라오지 않나 두리번거리며 다는 댓글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페라드 황제 만들기’의 최신 화가 업로드된 건,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이었다. 삼 년이나 다음 편을 올리지 않으니 실질적인 연재 중단으로도 봐도 좋으련만 나는 분기별로 한 번씩 이곳에 댓글을 달곤 했다.
[ 작가님 기다립니다. 다음 편 쓰고는 계신 거죠...? 하... 제발 돌아오기만. 기웃기웃. 작가님 내일이면 202X년이에요... 여기서 끊으시면 아니되옵니다.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와만 주세요 ㅠㅠ ]
가끔은 간결하게, 때로는 구구절절하게 다음 편을 외쳐 댔다.
내가 이토록 ‘페라드 황제 만들기’에 집착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 글이 내가 처음으로 읽은 판타지 웹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십 년 전.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친구를 통해 웹소설의 세계에 눈을 떴다. 판타지의 피읖도 모르던 머글이 판타지 덕후가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의 이혼이 있던 해인 만큼 나는 도피할 어딘가가 필요했고, 판타지 소설은 합법적이며 적절한 도피처였다.
이제는 나도 안다. ‘페라드 황제 만들기’는 그렇게까지 뛰어난 작품은 아니었다. 클리셰로 범벅된 양산형 판타지 중 하나일 뿐이고, 첫 연재일로부터 십 년이나 흘러 버려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도 크게 뒤떨어졌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었다. 내겐 ‘페라드 황제 만들기’가 그랬다.
드래곤의 피를 물려받아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의 재능을 가진 주인공 페라드. 프라이어츠 제국은 드래곤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자가 황위를 물려받는 승계법을 따르기 때문에, 알에서 태어난 그는 누구보다도 촉망받는 황태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황궁 내 권력을 쥐고 있는 황후와 1황자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페라드는 태어난 지 백일이 채 되기 전에 제3황궁이 불타는 사고 속에서 간신히 유모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그 뒤로도 황후와 1황자의 암살 시도에 여러 차례 휘말렸던 페라드는 대마법사 셀린 르카이만을 만나, 그의 보호 아래 대륙을 모험하며 성장한다.
이토록 계속해서 생명을 위협받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며 강해진다는 이야기는 새로울 게 없는 스토리지만, 판타지를 처음 접한 내게는 신문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추억 팔이라는 이유만으로 ‘페라드 황제 만들기’의 다음 편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내가 이 글의 다음 편을 목 빠지게 기다린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 글의 다음 편은, 무조건 완결편이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고, 마침내 페라드는 황태자가 된 1황자와 검을 겨눈다. 페라드는 눈부신 검술 실력으로 황태자를 제압하고, 페라드의 날카로운 검날이 바닥에 쓰러진 황태자의 가슴을 겨냥한다.
이제 페라드가 황태자를 죽일 일만 남았다. 오랜 적을 해치우고 제목 그대로 페라드가 황제가 될 일만 남은 것이었다.
7년간 함께 연재를 달린 독자로서 이 이야기의 완결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 간절하다 못해 당연했다. 하지만 작가는 3년째 연중 상태였고, 댓글 창에는 내가 남긴 하소연 글만 늘어나는 중이었다.
하여튼, 내가 아는 ‘페라드 황제 만들기’란 이런 글이었다. 잘 아는 소설인 만큼 빙의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모든 계약은 신중해야 하는 법이었다. 나는 너구리의 말을 하나씩 따져 물었다.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준다는 건 어떤 뜻이에요?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무난하게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너구리는 첫 질문부터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굴렀다.
“아, 아닙니다! 김제희 님은 사망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돌아간다는 거죠?”
2024.08.3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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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을이어도 이건 해야지... 부럽다 저도 하고싶어요 너구리님
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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