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사랑을 약속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게 너 말고 다른 여자는 없을 거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 사랑으로 우리의 결혼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진했던 소망은 오래가지 않아 깨져 버리고 말았다 레이몬드의 첫사랑인 리제나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기 때문에. “리제나의 아이를 1황자로 입적시키려고 해.” 그는 내게 그리 말했고, “우리 이혼하자.” 난 그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 “……뭐?” 순간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처음 보는 그의 동요에 난 왜인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난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그에게 다시 한번 입술을 열었다. “이제 그만 널 떠나고 싶어. 그러니 레이몬드, 우리 그만하자. 나와 이혼해 줘.” 오랜 짝사랑의 끝이었다.
1화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화려한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황궁을 찾았던 날, 미로 같은 황궁에서 길을 잃어버린 난 레이몬드를 처음 만났다.
겨우 열 살이었던 내가 아버지를 찾아 헤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였다.
엉엉 울다 지쳐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내게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길을 잃은 거니? 울지 말고 내 손 잡고 일어나.”
고개를 들자 볼에 푸른 멍이 든 흑발 머리 남자애가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 남자애가 바로 레이몬드였다.
참 신기하게도 레이몬드의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난 거짓말처럼 울음이 뚝 멈췄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 넓은 황궁이 더는 무섭지 않게 느껴졌었다.
아마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레이몬드를 마음속 깊이 품은 것은.
마치 운명처럼 난 레이몬드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의 삐쩍 마른 몸과 볼에 든 멍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반짝반짝 빛나기만 했다.
그렇게 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날부터 난 시간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 황궁으로 가 같은 장소에서 레이몬드를 만났다.
당시 내 아버지는 행정궁에서 일하시던 백작으로 황궁에 갈 일이 잦으셨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던 난 혼자 있으면 외롭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지극히 아꼈으니까.
그렇게 미로 같던 황궁의 지리가 익숙해질 만큼 황궁을 드나들며 레이몬드를 만났던 난 유난히 하늘이 화창했던 날 그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날따라 그는 우리가 항상 보았던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결국 그를 찾아 나섰다.
한참을 황궁을 돌아다니던 난 아주 많이 낡은 궁에 도착했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건물은 작았고 외벽엔 스산한 이끼와 넝쿨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난 그곳에 서 있는 레이몬드를 보았다.
“천한 하녀의 피가 섞인 황자라니, 정말 수치스러워. 버러지 같은 너희 모자에게 이 작은 궁조차 사치라는 것을 아버지는 왜 모르시는 건지, 퉷.”
레이몬드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키를 가진 남자는 더러운 침을 뱉더니 레이몬드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찰싹-!
날카로운 타격음이 크게 울렸지만 레이몬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러운 버러지 같은 놈, 너 같은 놈이 이 제국의 황자라는 게 수치다. 지금처럼 죽은 듯이 살아라. 황가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말고.”
비수 같은 말을 내뱉은 남자를 향해 레이몬드는 얌전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순간 난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레이몬드를 괴롭히고 있는 흑발의 소년은 다름 아닌 에그리타 제국의 황태자 아스터 에그리타였으니까.
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황태자의 초상화를 보며 배웠기에 그의 얼굴을 모를 수 없었다.
잠시 후 황태자가 궁을 떠났음에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이몬드를 보며 난 숨을 죽였다.
그 모습이 어린 내 가슴을 너무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미처 막지 못한 나의 울음이 새어나갔고 레이몬드는 나를 발견했다.
“울지 마. 난 괜찮으니까.”
나를 처음 보았던 그 날처럼 볼에 푸른 멍이 새겨진 레이몬드는 담담히 웃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난 와락 그의 품에 안겼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 품 안에서 펑펑 울었다.
어린 마음에 그게 무슨 마음인 줄도 모르고.
* * *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16살의 겨울이었다.
잡초들조차 얼어붙은 그 날, 레이몬드는 내게 처음 보는 설렘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야, 나 무척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어. 매일 매일 그녀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그녀가 너무…… 좋아.”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팠으나 난 레이몬드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는 그날 이후 내게 그녀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도 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그녀의 웃는 모습에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오랜 시간 그를 봐 왔지만,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행복해할수록 난 너무도 슬퍼졌다.
그 이유가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2025.03.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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