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조부와의 거래를 위해, 그는 혜주를 선택했다. “이혜주 씨의 시간을 사고 싶습니다.” 1년 뒤, 완벽했던 연극은 끝을 맺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우리 만나요" 예고도 계획도 없던 혜주의 시작에 휩쓸리기 전까지. “내가 왜 좋습니까?” “잘 생기고, 돈 많고, 따뜻해서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속물적인 두 가지 이유 뒤에 아이러니한 마지막 이유가 그의 머리에 기어코 물음표를 새겨 넣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뭐지? 태정은 그 날 이후부터 혜주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자신에게 딱 맞는 이용도구가 아니라, 몇 발자국의 거리를 두고 앞에 선 여자, 이혜주를.
#1
시간을 사고 싶어요
단조로운 피아노 선율만이 천장을 맴도는 고요한 레스토랑 안,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가장 은밀하고 조용한 자리의 동그란 테이블. 테이블 위에는 서로 키가 다른 초들이 불꽃에 조금씩 녹아가고 있었다.
“디저트는 어떻게 준비해드릴까요?”
“혜주 씨도 커피로 하죠?”
촛불에 일렁이던 눈동자가 움직였다. 검은 눈동자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단정한 차림새의, 자상하게 웃고 있는 남자.
“네.”
미약한 소리에 남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커피 두 잔으로 부탁해요. 아……저희가 여기 올 때마다 꼭 부탁하는 게 있었는데.”
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사근대듯 대꾸했다.
“아이스크림 말씀하는 거 맞으시죠? 같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직원은 그 뒤로 두 번 더, 고요한 테이블을 방문했다. 먼저는 오늘 하필이면 바닐라 아이스크림 재고가 소진되어 준비해드릴 수 없다는 사과의 방문이었고, 그다음은 쓰디 쓴 커피 두 잔을 가져다주기 위한 방문이었다. 노련한 손짓으로 쟁반을 들고 오는 직원 뒤로 점장이 따라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매번 서비스로 받는 아이스크림을 준비하지 못한 게 이렇게 죄송할 일인가. 점장까지 와서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힐 만큼. 잠시 의문을 가졌던 해 주는 이내 스스로 답을 내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 남자는 그럴 만한 남자였다. 부탁한 아이스크림을 받지 못하면 이런 정중한 사과를 받을 만한 남자.
“다음번에 다시 방문해주실 때, 그때는 꼭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자상한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참, 오늘 음식도 맛있었어요. 잘 먹었다고 전해주세요.”
점장은 꽤 황송한 얼굴을 했다.
“감사합니다. 다음번에…….”
다음번을 거듭 말하는 점장의 목소리가 촛불 연기처럼 흩어졌다. 혜주는 까만 커피가 울렁거리는 잔 안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다음이 있을까.
“이혜주 씨.”
이 남자와, ‘다음번’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해 주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한 번 삼키곤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는 어느새 자상한 미소가 사라진 상태였다. 딱딱한 얼굴, 일자로 굳어진 눈썹, 미동도 없는 입꼬리. 혜주가 1년간 봐왔던 남자의 이면이었다.
남자는 단내조차 나지 않는 쓴 커피를 마시면서도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금이 가지 않은, 온전히 얼어붙은 얼음 조각을 보는 것 같았다.
남자는 혜주에게 서류봉투와 그보다 한참 작은 봉투 하나를 각각 내밀었다.
혜주는 먼저 서류봉투를 열었다.
“2개월 뒤 나갈 기사의 내용입니다. 혹시나 불쾌한 부분이 있을까 봐.”
혜주는 종이 한 장에 빼곡하게 쓰여 있는 글을 재빠르게 읽었다. 반듯한 글자들이 그녀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없어요.”
“계약서는 오늘 오전에 파쇄했습니다.”
혜주는 서류 봉투를 다시 닫으며 옆에 있던 작은 봉투에 시선을 옮겼다.
“나머지 사례금입니다. 예정보다 이르게 계약이 끝났지만, 사례금은 원래 계약했던 대로. 나머지 금액을 넣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천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있을 것이었다. 처음 이 봉투를 받았던 날, 가지고 갈 엄두도 못 내는 자신을 못 미덥게 바라보며 지갑에 넣고 품에 끌어안고 가라던 그의 빈정 어린 목소리가 떠올랐다. 웃음이 나올 때는 아닌데, 괜한 기억에 웃음이 났다.
“마지막이네요.”
혜주는 봉투에 손가락을 대었다. 마치 피아노 건반 위에 처음 손을 올리는 것처럼, 날계란을 쥔 듯이 부드럽게 손을 오므린 채.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을 고했다. 혜주는 그런 그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도 이렇게 직접 주실 줄은 몰랐어요. 만나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이 정도 예의는 지키는 게 도리이니까요.”
마지막.
혜주는 그 말을 몇 번이나 입안에서 뇌까렸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예의를 지키는 건가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혜주는 그의 묵묵부답이 긍정의 의미임을 알았다. 오늘 이렇게 만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을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원하는 바를 다 가지고 이루어낸 그에게 자신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도구일 뿐이니까. 헤어짐은 아주 간단할 거로 생각했다.
혜주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맛있었어요.”
“이곳을 좋아했잖아요.”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는 그 말에, 혜주는 쓰게 웃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입안이 썼다.
그는 알까. 자신을 향한 예의와 도리에, 무심히 스치는 말 한마디에 어느 순간부터…….
“먼저 일어나요.”
어느 순간부터, 그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을.
“아니요.”
마음을 묻으려고 했다. 꼭꼭 걸어 잠그려고 했다. 억지로 묶어 다시는 풀지 않으려 했다.
“윤태정 씨.”
무던히 애쓰던 자신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은 맞은편의 남자, 태정이었다. 예의와 도리를 다하는 행동이,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너무나 따뜻한.
“……윤태정 씨.”
연극의 끝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담담했다. 커튼콜이 시작된 무대에 선 배우는 단둘이었고, 박수를 치는 관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직 둘이었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윤태정. 혜주는 다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윤태정 씨.”
‘이혜주 씨.’
그가 처음,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날이 떠올랐다. 그다음 그가 건넸던 말도.
‘이혜주 씨의 시간을 사고 싶습니다.’
혜주는 그를 직시했다.
“윤태정 씨의 시간을 사고 싶어요.”
그리곤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앞까지 봉투를 밀어냈다.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이 돈으로, 윤태정 씨 시간을.”
“……이혜주 씨.”
“바쁘고 비싼 사람이니까, 하루에 백만 원쯤으로 계산하면 될까요?”
“지금 무슨 말을…….”
혜주는 봉투 안에 들었을 금액을 가늠하며 재차 물었다.
“그럼 윤태정 씨 시간, 100일 정도는 이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이혜주 씨.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물론 1년 중 그를 만난 날을 전부 다 합치면 두, 세 달이 될까 말까 한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그 얼마간의 날들로 태정이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태정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을 통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금 태정은 이해를 바라는 얼굴이었다.
“우리 만나요. 내가 살 수 있는 만큼의 시간 동안이라도……나는 윤태정 씨를 계속 만나고 싶어요.”
혜주는 그의 빠른 이해를 위해, 이런저런 설명을 잘라냈다.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그래도 이유 하나쯤은 붙여줘야 할 것 같아, 혜주는 이유를 짧게 덧붙였다.
“좋아해요.”
얼이 빠진 태정의 얼굴을 보자니 다시 웃음이 났다. 담담하게 용건을 말하는 자신과 얼이 빠진 채 대답 한마디 못 하는 태정의 대비가 꼭 1년 전 그 날과 뒤바뀐 것 같아 혜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옅게 소리를 냈다.
“제가 좋아하고 있어요. 윤태정 씨를.”
입을 벙긋거리는 태정의 얼굴 위로, 1년 전 그의 얼굴이 겹쳤다. 낡은 다세대 주택 꼭대기, 색이 바랜 문 앞에 기대 서 있던 윤태정의 얼굴이.
***
1년 전 그 날은 혜주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눈에 보였던, 귀에 들렸던 모든 것들이 기억 날 정도로 아주 특별한 날.
1년 전 1월, 혜주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지난해 하반기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던 레스토랑이 갑자기 폐점하면서 당장 백수가 될 처지에 놓여있던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이혜주 씨? 일연 재단입니다.’
그 전화로 인해 혜주는 자신과 영 어울리지 않는 호텔 로비를 가로질렀다.
로비를 한참 걸어 어느 홀 앞에 선 혜주가 처음 본 것은 길고 두꺼운 현수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단정한 유니폼 차림새의 직원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혜주는 현수막 안 글씨를 눈으로 읽었다. ‘일연재단 16주년 기념행사’라는 글씨가 눈에 두껍게 박혔다.
혜주는 자신이 이곳에 오기 위해 어쭙잖게 화장을 했다는 것도 잊고서 무심코 눈을 비볐다. 큰일 났다고 생각한 것은 손가락에 번진 아이라이너를 본 뒤였다.
“도와 드릴까요?”
“네? 아…….”
혜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현수막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 초대로 왔는데요.”
직원이 짧은 순간 자신을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지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혜주는 가방끈을 잡은 채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아, 그러니까……장학생이요. 장학생이어서 재단 초대로.”
직원은 그제야 의아함이 풀린 듯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장학생.”
“네. 장학생.”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실 거예요.”
2025.04.3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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