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본 작품의 배경은 가상의 신라시대로 신라의 인통(絪統), 색공(色供) 등에 기반한 창작물이나, 인물 및 사건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더불어, 본 작품은 동일한 작품명으로 15세이용가와 19세이용가로 동시 서비스됩니다. 연령가에 따른 일부 장면 및 스토리 전개가 상이할 수 있으니, 연령가를 선택 후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뱀처럼 사악하고 돼지처럼 음탕하며 원숭이처럼 약은 여자, 천명. 그 천명의 핏줄 도홍. 아직 얼굴도 못 본 사이지만 험담은 지겹도록 들었다. 인상이 좋을 수가 없었다. 잇기도 전에 가로막힌 연 따위,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든 말든. “관심 없습니다.” 저완 상관없는 여자였다. 그가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대처럼 뛰어난 인재가 초야에 묻혀 지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미득공. 내가 너를 놓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나는 그리 못하겠다. 포악한 탐심이 솟구쳤다. 언제까지 점잖은 척 인내할 수 있을까. 지금도 제가 사람 탈을 쓴 금수가 아닌지 헷갈리는데. 한데, 그가 너였다고. “예, 제가 거짓을 일삼아 폐하를 속였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폐하께서 아시는 미득공이 아닙니다. 다시 그 미득공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천명의 핏줄이자 유원신통의 후계자, 도홍입니다.”
# 01
序章
네 처지를 알라는 뜻인가. 그가 절을 떠나는 당일, 하필 상에 오른 국수에 도홍은 씁쓸히 웃었다.
‘이런 날에.’
경사스러운 날에 먹는 음식이 국수였다. 생일엔 장수를 기원하고, 혼인에는 신랑 신부의 연이 길게 이어지길 기원하는 음식이 국수였다. 한데 저는 헤어짐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이런 모순이 또 없었다.
비단 이별을 앞두고 있어서만은 아니라, 도홍은 평소에도 국수가 싫었다. 색공을 연마하기 위한 재료로 국수가 종종 활용되기 때문이었다. 국수를 제멋대로 다루는 지경에 이르자 면은 도홍에게 더 이상 음식이 아니게 되었다.
국수뿐이랴. 동그랗고 매끄러운 팥을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떨어지지 않도록 힘주어 버티는 연습도 있었다. 팥이 익숙해지면 좁쌀이 팥을 갈음했다. 혀 놀림을 조절하기론 잔뜩 무른 홍시만 한 게 없었다. 터지지 않도록 머금어야 하며 자칫 걸쭉한 속살이라도 흘러나올라치면 호되게 혼이 났다.
언짢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도홍은 이만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색공의 업을 내려놓고 도망친 순간부터 제게는 무용한 경험들이었다. 굳이 떠올려 무엇할까. 그를 그리기에도 모자란 시간이건만.
자연스레 태자와의 첫 만남으로 생각이 흘렀다. 예상했던 바와 달라 조금 놀랐던가. 태자는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건장한 몸을 지녔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 두둑한 허벅지는 그가 무예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인상도 서글서글했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와 곧고 높은 콧대, 모양 좋은 입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태후의 사람이기에 막연히 모지락스러운 인상일 거라 여겼는데, 제 예상과는 조금도 들어맞는 구석이 없어 당황했었다.
문득 태자에겐 제 첫인상이 어찌 남았을까 알고 싶어졌으나 또한 부질없는 궁금증이라 이내 접었다. 짙게 칠한 눈두덩, 음영을 강조한 콧대, 화려한 꿩 깃. 화랑의 낭도처럼 꾸민 지금 모습은 태자를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저조차 낯선 제 모습이 진짜가 아닐진대 대체 무얼 궁금해한단 말인가.
‘영영 모르겠지.’
제가 태후께서 이를 갈아 마지않는 천명의 핏줄이자 유원신통의 후계, 바로 그 도홍이라는 것을. 출신과 정체는 둘째치고 제가 사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 제 첫인상은 더욱 무의미해졌다.
“미득공.”
태자는 별호 짓기의 달인이었다. 존재하되 천지간에 찾을 수는 없을 제 별칭을 나직이 불러 보았다. 아름답다는 뜻의 미득공, 그가 부를 땐 한없이 정다웠는데, 제 입술을 빌어 나간 세 마디는 소슬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쓸쓸해져서, 이번엔 태자의 별칭을 내어 보았다.
“절륜공.”
그리고 제가 지어 준 그의 별호, 절륜공. 절로 미소가 피었다. 언제 또 이리 부를 일이 있을까. 기약이 없다. 홀로 맥없이 불러 보다 추스를지언정.
그때를 견딜 수 있을까.
이젠 정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마음이 갈무리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주먹을 움켜 욱신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던 도홍은 걸음 소리에 얼른 손을 떼고 귀를 기울였다. 잠시 설레었으나 기다리던 태자는 아니었다.
“얘기가 길어질 모양입니다.”
사람 좋게 웃으며 상을 치우러 온 보중이 차려 놓았던 국수가 그대로 식어 있는 걸 보고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미득공께서 국수를 즐기지 않는 걸 깜박했습니다.”
“무슨, 아닙니다.”
도홍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냥, 입맛이 없었습니다.”
귀한 음식을 버리게 생겼으니 도리어 제가 미안할 일인데 보중은 한사코 제 불찰을 탓했다. 저조한 그녀의 기분을 살피더니 더운물이 꽤 많이 있는데 씻겠느냐고 물어 왔다.
“태자 전하께서 쓰시고도 남을 양입니다, 미득공.”
귀족들이 돌아가고 태자를 부르는 보중의 호칭도 바로 바뀌었다. 절륜공이라는 별칭은 냉큼 갖다 버리고 전하, 전하, 꼬박꼬박 붙여 불렀다. 그러면서도 저는 여전히 미득공인 게 재미있어 도홍은 살포시 웃었다.
“예.”
어차피 떠날 참이었는데 잘되었지. 개운하게 씻고 나면 발걸음이라도 가벼울 테다. 씻자, 씻어 내자. 몸도 마음도 기억도 모조리 씻어 흘려보내자.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다짐을 하며 보중의 권유를 따랐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서도 시종 멍했다. 사흘 밤낮을 꼬박 번민에 시달린 여파였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도홍의 시야로 천장에 맺혀 있던 물방울 중 하나가 들어왔다. 모가지가 좁아진 것이 곧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 떨어질 듯했다. 습관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 또한 조임근을 단련하기 위해 수없이 행해 온 짓이었다. 마치 끌려온 것처럼, 우묵해진 배꼽 언저리에 묵직한 낙수가 툭 떨어졌다.
“하!”
물끄러미 고인 물을 바라보던 도홍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치곤 불현듯 허둥거렸다. 이리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돌아왔을까 봐, 그 잠깐의 공백도 아쉬워서.
씻는 둥 마는 둥 물기를 턴 후, 눈 주변을 도로 검게 칠할 때에는 머뭇거리기도 하였다. 한 번, 딱 한 번쯤은 제 진짜 모습을 보여도 좋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던 도홍은 이내 손에 힘을 주었다. 콧대를 지나치다 싶게 강조하고 눈매를 너구리처럼 검게 칠했다. 끝까지 자흥이자 미득공으로 남아 있는 게, 그의 진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리라.
2025.04.0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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