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의 여자만 노리는 살인마가 존재하는 소설에 빙의했다. 바로 그 갈색 머리 녹색 눈의 영애가 되어서. 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작업실에 틀어박혀 물약 제조 기계처럼 살았다. 앞으로 6개월, 6개월만 버티면 원작의 주인공과 남주가 그 살인마를 처단할 터였다. 분명 그랬는데……. “마탑주, 에온 드 그랑누와 입니다.” 은사를 길게 늘어뜨린 듯한 귀걸이. 어둠의 끝자락처럼 다정하게 웃다가도 일순간 잔혹한 빛을 뿜어내는 눈. 그 누구보다 도도하고 섬세한 조각상 같은 남자가 느릿하게 입매를 올렸다. “저는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 온 겁니다.” 밤을 머금은 듯한 보라색 눈동자에서 순간 붉은빛이 반짝였다. 공포에 질린 내 모습이 마치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된다는 듯이.
1.
“착한 아이는 다섯 시까지 집으로 돌아오기.”
음산한 노래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아니, 노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고저의 변화가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같은 가사를 반복할 뿐이었다.
“착한 아이는 다섯 시까지…….”
“……다섯 시까지 집으로…….”
그것은 메아리를 만들어 내며 탑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마치 내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저것이 숨소리에 반응하는지 빛에 반응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가능한 내 존재를 감추기 위해 애써야 했다.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작은 촛불뿐이었다. 고작해야 한 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희미하고 작은 빛. 그것에 의지해 난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차가워.’
손끝에 닿는 벽은 마치 얼음 같았다.
‘그래도 짚을 수 있는 게 있으니.’
난간도 없는 반대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모든 것을 잡아 삼킬 듯한 어둠이 너무나 태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난 계단을 꾹 누르듯 힘을 주어 걸었다. 그렇지 않으면 발을 헛디딜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응?’
손가락 사이에 무언가가 얽혀 들었다. 뭉클한 감촉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덕분에 손이 시린 건 덜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공포로 다가왔다. 살인마의 탑에서 도망치는 지금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냥 가자.’
확인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그래, 아무것도 만지지 않은 것처럼 그냥 지나가야지.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생물의 뿌리처럼 자라난 그것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날 붙잡았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것에게서 벗어나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선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촛불을 든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달이 하루하루 차오르는 것처럼 조그마한 불빛으로 어둠을 한 줌, 한 줌씩 지워 나갔다. 이렇게 한다고 정체불명의 존재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두 번째 손가락이 드러나고 이어 세 번째 손가락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손가락에 얽혀 있는 그것은…….
‘머리카락!’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족히 수십 명분은 될 것 같은 머리카락이 담쟁이덩굴처럼 벽을 타고, 그리고는 내 손을 휘감고 있었다.
‘소리를 내면 안 돼!’
그 와중에도 이성의 끈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들이마시면서 난 반사적으로 머리카락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익.”
날 붙들고 있던 머리카락이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요란스러운 소리였다.
“뜨거워! 불이 붙었다고!!”
어디서 시작된 소리인지, 누가 지르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 불꽃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보고 싶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불빛이 비치는 것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착한 아이는 사라진 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착한 아이는 사라진 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어느새 바뀐 노랫말이 내 등 뒤를 쫓아왔다. 난 계속해서 달려 내려갔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혹사당한 다리는 급한 마음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것이 한계라는 듯 점점 느려지고만 있었다.
‘대체 이 계단은 어디까지 있는 거야?’
아무리 달려도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막막했다. 이러다 죽는 건가 싶어 왈칵 두려움이 치밀었다.
순간 저 앞에서 단풍잎 같은 손바닥이 보였다. 쥐었다 폈다 하는 손짓이 날 부르고 있었다.
“여기야! 여기!”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나서서 그 작은 손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 했다.
“금단의 방엔 들어가지 않기!”
날카롭게 변한 노랫소리가 내 등 뒤를 떠밀었다.
“들어가지 않기!”
“들어가지 않기!”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한번 중심을 잃자 지친 다리는 더는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했다. 발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난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떨어지면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겠지?’
‘아플까? 충격이 엄청나겠지?’
온갖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러니까 애당초 나는 왜! 이 살인마의 탑에 들어와서…….’
탑이 어찌나 높은지, 내내 자책을 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푹-.
드디어 땅에 몸이 닿았다. 하지만 온몸이 바스러지는 통증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포근한 무언가 덕에 난 추락이 아닌 착지를 할 수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지는 않았다. 탑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타는 냄새가 아직도 코끝을 맴돌았다. 아무리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 해도 결국은 녀석의 본거지였다.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2025.04.24 14:03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