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학창 시절 장현은 전학 온 설아에게 처음으로 이성의 감정이라는 걸 느낀다. 단지 너무 생소한 그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지 못해 결국 배 다른 형 장강의 비열한 계획에 말려 설아와 아픈 이별을 맛보게 된다. 성인이 돼서도 장현은 설아를 잊지 못하고 예전 그녀가 살던 집을 매일 찾아가며 고통의 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다시 뜻깊은 재회를 하게 되는데. 설아 역시 장현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지라 결국 두 사람은 멀리 돌아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설아의 친 아빠가 떠나고 새 아빠인 기철이 엄마인 민혜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 기철은 아이들의 앞날을 빌미로 민혜와 함께 사망보험을 들어둠과 동시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서서히 민혜를 중독시켜간다. 결국 민혜가 죽고 설아와 남동생 기우는 변한 기철의 괴롭힘 앞에 도망을 선택한다. 남매간의 형편 때문에 결국 기우는 입양을 가게 되고 성인이 돼서 다시 설아와 재회 하게 된다. 기철 역시 해외로 도피해있었다가 다시 설아가 어른이 된 시점에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 주위를 맴돌며 피를 말린다. 한편 친 아빠 범철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아내와 아이들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오는데, 이미 기철의 자리가 너무 크던 시절이라 행복을 빌어주고 다시 떠난다. 시간이 흘러 TV에 설아와 기우의 재회 장면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면서, 그동안 기철의 만행을 범철도 알게 되고 복수를 다짐한다. 아이들 앞에 선뜻 나설 수 없던 범철은 설아의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기철의 폭력으로 인한 시신경 손상 때문에 기증자를 찾고 있던 와중, 설아 몰래 익명으로 눈을 이식시켜주고 떠나려 하지만, 수술 후 알게 된 진실에 설아는 범철을 잡기 위해 공항으로 간다. 행복함의 절정에 설 무렵, 장현과 설아는 장강에 의해 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설아를 지키려던 장현은 그녀 대신 크게 다치게 되고 식물인간으로 일 년을 누워있게 된다. 그렇게 남자의 영혼이 설아를 잠시 떠난다. 일 년 같은 하루를 보내며 결국 설아 역시 범철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장현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데, 마지막 날. 다시 장현의 정신과 영혼이 그녀에게 돌아온다. 두 사람은 결혼식의 장소로 예식장이 아닌, 처음 만난 학교에서 식을 올린다.
[프롤로그]
가시밭 같던 설아의 길을 밝혀주던 남자.
언제나 영원히 함께 하기로 한 나만의 사람.
이제 우린 언제나 함께야. 알고 있지?
콰앙.
콰앙.
콰앙.
공중으로 장현이 떠오르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설아의 맑은 두 눈동자 안에 담긴 건 절망과도 같았다.
순혈의 하얀 웨딩드레스가 붉은 선혈로 번지고 있었다.
"안돼. 현아아아!, 으아아아악!!, 현아아악!"
바닥에 떨어졌을 때 장현의 고개는 설아를 향했다.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우직한 얼굴에선 끝없이 피가 흘렀다.
괜찮아.
그 눈이 그리 말하는 것도 같았다.
슬퍼하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걸 끝으로 한 남자의 눈은 영원히 감기고 말았다.
그리 내 남자의 영혼이 나를 떠났다.
우발된 범죄의 현장에서 검거된 장강은 별로 부인하지도 않았다.
시속 80K로 질주하던 차로 장현을 들이 받았으니, 그 쾌감은 짜릿했을거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이겼어.. 드디어, 내가 네놈을 이겼다고!"
정상이 아닌 장강은 이송된 후에도 한동안 희열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드디어 장현을 이겼다고만 중얼댔단다.
설아 역시 다시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엔 같이 따라가려고 했었다.
"니가 가면... 너마저 가면.. 이 아빠 어찌 살라고... 설아야. 염치없는 아비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되겠니?"
범철의 주름진 눈가에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아직은 그를 따라갈 때가 아니라 여겼다.
그렇게 재회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눈물이 설아를 이 땅에 잡아 묶고 있었다.
하긴. 내 신체의 일부가 그분의 것이니 그 조차 뜻대로 하지 못하겠구나.
의사는 기나긴 싸움이 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설아는 기억한다.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던 장현의 눈빛을, 그러니 그를 믿고 기다리겠노라고 다짐했다.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 자신이 없으면 많이 슬퍼할 걸 알아서였다.
그리 하루가 일 년처럼 흘렀다.
혹시라도 오늘은 깨어날지 몰라서, 설아는 서늘하게 죽어버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맑고 청렴한 두 눈은 샘이 마를 날이 없어 보였다.
"아직이니? 아직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못 찾겠어?"
창가에 놓인 푸른 빛깔의 행운목 또한 많이 자라 줄기를 뻗었다.
그런데 넌 여전히 깰 생각이 없나 보구나.
주변에 있던 이들이 짠한 설아를 보며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작은 설아의 손 또한 점점 마른 풀잎처럼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들풀 같은 이 인생에 바람막이가 되어줄 거라 약속했잖아.
다시는 정수기 물을 마시지 않게 될 거라고도 했잖아.
완연한 미래를 그 찬연한 눈빛으로 장담해놓고, 이렇게 혼자 두고 떠난 남잘 여전히 기약하는 설아의 눈빛은 세상 애처로워 보였다.
"이것 봐. 많이 자랐어, 벌써. 행운목의 꽃말은 약속 이행이래.... 그러니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한 그 약속 꼭 지킬 거지?"
이 속이 닳고 닳아 결국 너를 따라가기 전에.
그러기 전에, 너무 늦지 않게 다시 나를 보러 와줄래.
설아는 행운목의 가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분재의 흙투성이 지면에 또 한 번 수분 한 방울이 아프게 떨어졌다.
축축한 분재의 지면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일 년 동안 깨어나지 않는 남자를 위해 흘린 눈물의 양이 바다와 같음을.
병실에 누워있는 이는 남자라기보다는 빛의 한 조각 같았다.
과연 저 긴 속눈썹이 떠졌을 때 어떤 탄생석 같은 눈동자일지 궁금할 정도였다.
링거에 꽂힌 단단한 손목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데, 수문처럼 굳게 다문 입술 역시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장현. 네피림처럼 길고 거대한 몸은 더없이 든든하게만 느껴지는데. 곧 일어날 것만 같은데.
기우도, 아빠도, 모두가 돌아왔는데 왜 넌 여전히 돌아오지 않을까.
드르륵.
잠시 후 입원실로 들어온 중년의 남자.
그의 미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든든함과 남자다움이 듬뿍 배여있었다.
처연한 그 눈빛은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딸을 향했다.
"설아야."
"......."
"이리 오거라."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잘 알았다.
그래서 백 마디의 위로보다는 저 여린 가슴이 더 깨지지 않게 안아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으흐흐흑. 아빠. 저 사람, 안 깨어나면 어떡하죠? 저 지금도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으흑."
설아의 정수리를 만지작거리던 범철은 시선을 창가로 향했다.
"여기 왔을 때부터 우리가 심은 저 행운목처럼.. 저 친구도 아마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을 거다. 우리가 모르는 그 어딘가의 경계에서..... 그러니 믿어주자꾸나.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너를 위해서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돌아올 친구라는 거."
"그렇겠죠? 현이, 반드시 돌아오겠죠? 거기 제가 없는걸 알면.. 다시 꼭 돌아오겠죠?"
범철은 반드시 그럴 거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만 어렵게 찾은 자신의 딸이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붕괴될까 한없이 두려웠다.
그래서인지 굵은 주름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설아의 뒤로 아프게 떨어졌다.
자네 보고 있나.
우리 설아가 죽어가네.
그러니 너무 오래 헤매지 말고 돌아오게.
설아는 늘 그렇듯 심장의 울림이 장현에게 전해지길 바랬다.
커다란 손을 맞잡은 소녀의 작은 손이 오늘도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현아.
거기에 나 없어.
그러니까 너무 늦지 않게 다시 돌아와.
내 이 썩기 시작한 마음이 병이 돼서 너를 따라가기 전에.
기다릴게.
니가 나를 기다린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더 걸린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호흡조차 끊어질 만큼의 정적 속에서 들리는 건 창밖의 차소리뿐이었다.
장현의 무의식 속에 정신세계의 데이터뱅크처럼 무수한 파편의 조각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 영혼이 처음으로 기억한 건 다시 이 나라를 밟았을 때였다.
설아가 숨 쉬는 이곳.
*****
[1]
인간의 뇌엔 우주의 지식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정신세계의 데이터 뱅크는 광활함을 의미한다.
영혼은 정신과 교감을 하며 지금 장현의 뇌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를 재현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장현과 설아는 아픈 이별을 맛보았다.
장강의 비열한 장난질 때문이었다.
장현이 행복해지는 건 죽어도 볼 사내가 아니였음으로.
왜 그 아이를 믿어주지 않았을까.
왜 그녀에게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아픈 이별을 맛보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3년이나 흘렀으면 조금은 아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했다.
아무 영문도 없이 자신의 못난 질투를 받아내던 설아의 두 눈.
갈 곳 잃은 고양이처럼 애처로웠던 소녀의 슬픔이 지금도 가슴에 켜켜이 가시처럼 박혀있어서였다.
공항을 나온 그가 처음 향한 곳은 학교 앞 분식 집이었다.
많이 낡았지만 여전히 그때의 체향이 남아있는듯해서였다.
맞은편에서 떡볶이를 먹던 주변 여고생들은 찬탄한 그의 비주얼에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봤어? 니가 좋아하는 앤트로의 정희보다 훨씬 잘 생겼어."
"그러게. 와아, 뭐지? 혹시 새로 오시기로 한 교생 선생님은 아니겠지?"
"저 인물에 무슨 교생이야. 당장 연예인 데뷔해도 난다 긴다 하는 꽃미남들 다 씹어 먹겠구만."
여고생들은 제발 그가 교생이기만 하면 서울대도 가겠다며 다짐을 해본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지긋이 바라보는 장현.
때가 타 많이 낡았지만 그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했던 곳이었다.
재잘 거리는 저 여학생들처럼,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 아이.
정수기 물로 배를 채우던 그 가련한 인생 속에서도 늘 봄꽃처럼 해사하던 소녀.
못난 마음이 사랑임을 인정하지 못해 늘 기회를 뒤로 미뤘다.
언제나, 영원히 기회는 있을 거라 믿은 자만심이었다.
배다른 형 장강이 설아의 마음을 얻었다고 비열한 술수를 부렸을 때, 왜 본인에게 확인해 보지 않았을까.
눈 내리는 추운 겨울.
그 오해를 풀고자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 설아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내가 나오길 기다렸지.
"많이 아팠니? 이젠 좀 괜찮아진거야?"
그리고 난 세상에서 가장 못난 남자가 되던 날이였다.
"꺼지라고... 너 따위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불쾌한 기억일 뿐이니까."
그게 그 아이와의 마지막이었다.
한 순간의 질투를 이기지 못했던 못난 남자.
병신. 너는 병신이다.
여자를 좋아할 자격도, 그 아일 떠올릴 염치도 너에겐 과분하다 장현.
그런데도.
아는데도.
.....................
.............
보고 싶다.
민설아.
죽도록.
이미 나온 지가 한참 된 식은 라면을 보며 장현은 여전히 그때를 상기했다.
*****
지는 노을과 함께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설아가 살던 집 앞이었다.
무던히도 왔던 곳이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여길 오지 않겠다고 그만큼 다짐했건만.
이미 설아의 존재는 이성으로 인내할 상태가 아닌듯했다.
자신의 키 하나도 들어가기 작은 문. 오래된 세월과 함께 칠이 벗겨진 문 주위의 테두리들.
장현은 손을 들어 그 까칠한 부분을 매만졌다.
너와 나,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를.
학창 시절 장현의 별명은 일진 잡는 리워야단이였다.
신화 속 괴물로 태풍도 이겨내는 존재를 칭하는 거였다.
장현은 어린 시절 장강의 허벅지를 찌른 적이 있었다.
그때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그의 어머니 강경화는 의사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자신의 아이가 잠재적 사이코패스라는걸.
다행히 아직은 초기에 가깝다고 했다.
상대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이라는 전제도 함께였지만.
경화는 그런 아들의 앞날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르쳤다. 생명을 해하는 건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의사는 이렇게도 말했다.
"사람을 해하기 시작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게 된다면, 그때부턴 아이의 눈엔 사람이나 벌레나 같아 보이게 될 수 있습니다."
라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존재라고 했다.
자신의 본능을 억누를 수 있는 귀한 존재.
아마도 사랑을 말하는 거겠지.
장현은 이성이라는 것에 눈을 뜬 일반 아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일 보기 전까진 그랬다.
설아가 전학 오던 첫날이 아직도 선명했다.
초롱초롱한 두 눈엔 어머니와 같은 따스함이 그득했다.
특히나 봄꽃을 닮은 청순한 미소 또한 참 좋아 보였다.
장현의 심장이 말하고 있었다.
이 아일 잡으라고. 이 아이여만 한다고.
그래서 그는 설아를 콱 움켜잡을 명분을 만들었다.
"이제부터 너는 전학생 이전에 내 셔틀이다. 알았어?"
그리고 이 관계가 형성된 거다.
장현은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것도, 다른 남자들이 그 아이에게 말을 걸면 화가 난 것도.
저 이상한 소녀 때문이다.
괴롭히다 보면 원래의 나로 돌아갈 것이다.
"흠, 여기가 니 집이야?"
"하악, 하악. 이제 됐지?"
"그래. 뭐 거짓말하는 건 아니라는 건 알겠어."
"그럼 좀 가줄래. 왜 굳이 우리 집을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이럴 거면 내가 니 집까지 하교 셔틀을 한 의미가 없잖아."
니가 살던 집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넌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현실이 다시 상념을 일깨우고, 장현은 문 앞에 이마를 기댔다.
"어디 있는 거냐. 빵띨이."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추억 앞에 남은 건, 여전히 우뚝 선 그녀의 흔적이었다.
이젠 다른 이들이 세 들어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만 올 수가 없었다.
설아와의 유일한 남은 흔적이었기에.
한참을 서 있던 27살의 다큰 성인의 실루엣이 지는 노을과 함께 애처롭게 느껴졌다.
*****
창가 너머로 보이는 오붓한 가족의 풍경이 설아의 눈에 들어온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에 젖어있는 가족과 아이의 미소였다.
헤이즐향이 나는 커피를 정갈한 입술에 가져다 되며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그녀.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초점이 뚜렷해 보이지 않았다.
민설아 올해 27살인 그녀.
창가로 비치는 햇살만큼이나 청명한 두 눈을 소유한듯했다.
탄생석처럼 도 보이는 영롱한 깊은 눈매, 그 안으로는 꺼내보기만 해도 아픈 추억이 있는듯했다.
자신이 좀 더 힘이 있었더라면, 기우도 그렇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스스로에게 있어 이날, 이 밤.
이 추운 겨울은 늘 가슴속 낙인이 찍힌듯한 고통의 굴레였다.
적어도 저 행복해 보이는 아이의 미소, 저건 지켜졌으면.
설아는 오색빛 맑은 두 눈동자에 또 한 번 슬픔을 담으며 회상했다.
지옥이 시작된 그날을.
"헉, 헉, 헉, 헉."
"누나, 우리 언제까지 뛰어야 되는 거야?"
"조금만 참아. 새아빠가 우리 못 쫓아올 때까지만 도망가면 돼."
"누나, 나 너무 추워."
12월의 추위는 어린 두 남매가 버티기에는 너무 잔혹했다.
일곱 살 남자아이의 손을 꽉 움켜쥔 소녀.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입가에 맺힌 선혈의 핏자국, 멍이 든 손목.
밤 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한 눈과 달리 더없이 절박해보였다.
시린 추위에도 얼마나 다급했던지 슬리퍼 두 쪽만 신고 있는 모습이 짠하게 그지없었다.
남동생 기우의 목엔 미처 다 매지 못한 목도리가 처연하게만 보였다.
긴 밤이 끝나지 않을 만큼 잔인한 겨울로부터 도망치는 두 아이의 실루엣은 그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엄마인 강민혜는 재혼을 했다.
그녀가 다니던 회사에서 만난 상사 민기철.
사람 좋은 미소에 마음을 허락하며 그리 불운이 시작된 것이다.
40세의 177CM의 키, 마른 몸이었지만 눈은 늘 웃고 있는 호감형의 남자였다.
처음 설아와 기우를 보던 그 따뜻한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기만 했었다.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새아빠야. 내겐 자식이 없어서 너희들이 너무 귀해. 그러니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알았지?"
어린 두 아이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으로 다가오는 그를 겁내하면서도 궁금해했다.
형형한 눈빛의 자상한 그가 악마라는 걸 알리 없었을 테니까.
처음엔 늘 그렇듯 그 역시 본성을 숨기며 두 남매에게 잘해줬다.
설아와 남동생인 기우는 그런 기철을 친아빠처럼 잘 따랐다.
다른 아빠들이 그렇듯 기우와는 캐치볼 놀이도 해주었다.
"아저씨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저 진짜 캐치볼 놀이하는 애들 보고 진짜 부러웠었거든요."
"하하, 별게 다 부럽네. 앞으로 우리 기우 지겨울 정도로 해줄게. 아저씨가.."
아빠의 정을 일찍 상실한 기우였다.
그 빈자리에 기철은 점점 자신의 입지를 굳혀갈 수 있었다.
설아 역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는데 잘 받아주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먼저 살갑게 다가갈 수 없는 설아에게 지그시 말 상대 또한 돼주었다.
"학교에 아직도 친구가 없니?"
"네.. 이러다가 왕따 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럴 리가.. 우리 설아처럼 예쁜 아일 누가 왕따를 시켜? 그러기만 해봐. 이 아빠가 가만 안 둘 거니까."
"고마워요. 아저, 아니 아바아."
아빠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속으론 이미 햇살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를 조금씩 인정하고 있었다.
정수리를 쓰담쓰담해주는 그 스킨십 역시 왠지 싫지 않았다.
"설아야. 조급해하지 마. 진짜 좋은 것들은 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니까."
어린 시절 세 사람을 버리고 떠나버린 친아빠의 존재도 한몫했을 터였다.
그러니 두 아이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클 수밖에 없었다.
정을 붙여보지도 못한 간절한 대상이 남기고 간 그 아픈 잔해는 늘 아이들의 몫이었으니까.
어린 가슴에 공허함으로 물든 부모의 빈자리.
최선을 다하는 그에게 설아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기철 몰래 그를 놀래켜주려고 용돈을 모아 사 온 빨간색 머플러.
작은 두 손에 담긴 그 정성에 기철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걸 사 왔어?"
"그, 그냥 아저.. 아니 생일이라고 하셔서 하나 샀어요. 진짜 별거 아니에요."
기철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울컥했다.
눈가로 접힌 주름이 현제 그의 기쁨을 대변할 정도였으니.
기쁨으로 상기된 목소리 역시 떨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빨갛게 상기된 눈 시울을 붉혔다.
그리곤 머플러와 설아를 번갈아 보며 기쁨을 표했다.
"별거 아니라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물이구만... 설아야 고맙다 정말, 아저씨 옷은 안 입어도 이 목도리는 꼭 하고 다닐게."
"네? 그럼 너무 춥지 않겠어요?"
"그렇지? 푸하하하."
설아의 미소가 예쁘게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마치 연꽃처럼 정갈하면서도 해사했다.
그 목도리를 세상 행복한 얼굴로 두르던 기철.
민혜를 보며 자랑하듯 미소를 피웠다.
*** [2]
"여보 어때? 이 정도면 러시아 한파가 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당신도 참, 그렇게 좋아요? 그 머플러 하나가....."
"당연하지. 당신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좋은데?"
"뭐예요? 지금 내가 그 머플러와 동급이라는 거예요?"
"흠... 설아야, 네 엄마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이럴 땐 거짓말해 주는 게 좋겠지? 네 엄마가 최고라고?"
"이미 늦으신 거 같은데요?"
비록 그렇게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늘 웃음꽃이 끊이질 않았다.
몇 년 전부터 계속 악화된 병 때문에 설아의 엄마 강민혜는 늘 이불 신세였다.
회사에 들어가고부터였다.
민혜 역시 그냥 체질에 맞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땐 적어도 그런 줄 알았다.
그후 기철은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그녀를 돌봐왔다.
그런 모습들이 설아에겐 한없이 고마웠을 거였다.
기우도 느껴본 적 없던 그의 자리가 이젠 대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설아보다 간절함이 커서였는지 아빠 소리도 빨리 나왔다.
앉아서 머플러를 꼭 쥐고 있던 기철.
기우는 양반 무릎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우리 주말에 놀이공원 놀러 가요. 내 친구들은 다 다녀왔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몰라요."
"그래, 그러자. 우리 기우가 친구들한테 그런 걸로 밀리는 꼴 내가 못 보지."
"당신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무리라니, 내 아들이 소원이라는데, 그깟걸 못해줘? 당신도 참."
민혜는 최근 들어 나아지는듯하더니 다시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원래 몸이 약했던 터였다.
범철이 떠난 후엔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해서 더욱 몸을 무리하게 굴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도 기철이 정성껏 달인 보약을 마시고부터였다.
그런 끔찍한 뱀의 사악한 사고를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음으로.
떠나버린 남편 때문에 식어버린 마음이었다.
다시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건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거다.
그러니 천사로 둔갑한 이 남자가 한없이 고마웠을거다.
속이 점점 썩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누워있던 민혜의 얼굴은 꼭 구원을 받은 듯 그를 향한 애정이 그득했다.
"고마워요 정말."
"당신은 회복하는 데나 신경 써. 어서 건강해져야 우리 설아랑 기우랑 좋은데 많이 놀러 다닐 거 아냐."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이 행복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누워서 호흡하듯 숨을 쉬며 두 눈을 글썽이는 민혜였다.
기철은 그런 두 손을 꽉 쥐며 다짐했다.
"세 사람, 이제 내가 지킬 거야. 그러니 당신 건강도 당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야. 반드시 내가 회복시킬 거니까, 나만 믿어. 알았지?"
"고마워요.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네요."
그 가녀린 손을 들어 올리며 기철은 완연한 눈을 펴며 답했다.
"그거면 충분해. 지금은 애들 보다, 나보다도, 본인을 먼저 생각해 줘. 당신이 건강해야 나도 애들도 더 행복할 테니까."
누워있던 그 시들어가는 마른 손을 움켜쥐며 이마를 쓸어내리는 기철.
설아의 눈 시울도 붉어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아빠라서, 엄마의 남편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친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또 일 년이 흘렀다.
수국이 예쁘게 피던 계절.
하늘에 고이 물든 푸르름이 물씬한 청명한 날이었다.
민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기철은 관 안으로 들어가겠다며, 난동까지 부릴 정도로 절규했다.
"놔요! 저 안에, 내 전부가 있다고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중한, 내가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남은 세 사람은 많이 울고 많이 아파야 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떠난 민혜의 마지막 얼굴은 편안해 보이기만 했지만.
그리 봄의 유채꽃이 축축한 더위로 물들 때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새아빠 기철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민혜가 살아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그의 생경한 모습에 설아와 기우는 조금씩 그를 두려워해야 했다.
"학교 등록금이 원래 이렇게나 비쌌어?"
"급식비를 뺀 거라 그래도 싼 편에 속하는 거예요."
"오호라, 네 돈 아니라고 막 부른다 이거지?"
"그런 뜻 아니에요. 아저..."
그는 끝까지 아빠 소리를 하지 않던 설아가 늘 못마땅했다.
전엔 늘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미간을 찌푸린 그의 인상은 생각보다 선득했다.
한쪽 눈꼬리를 휘며 빈정 되는 모습 또한 설아에겐 익숙하지 않은 거였다.
"아빠 소리가 그렇게 안 나오는데, 나한테 필요한 건 용케도 다 타가네. 네가 생각해도 좀 뻔뻔하지 않아?"
"....."
삐딱하게 앉아있던 자세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힘없던 소녀는 살벌해지는 그의 바이브에 손끝이 떨려왔다.
본 적 없던 모습이었기에, 자상한 어른이 돌변할 때의 그 두려움은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다.
돈 이야기가 나오면 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전기세는 또 왜 이렇게 많이 나와. 설아야, 나 재벌 아니다, 알았어? 눈치껏 말 나오기 전에 절약 좀 하자?"
"네, 죄송해요."
마치 두 아이가 이제는 귀찮다는 듯, 어서 치워버리고 싶은 짐덩이처럼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어린 기우는 그런 생경한 기철의 모습에 겁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문틈으로 누나가 걱정돼서인지 큰 눈망울을 걱정스레 빛내며 엿보았다.
설아는 그의 앞에서 점점 죄인이 된 듯 고개가 낮아져야 했다.
아무리 민혜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그의 모습에 설아는 불안함이 가중되고 있었다.
어린 기우 역시 사고가 없는 건 아니었다.
"누나, 아빠가 요즘 많이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곧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시겠지?"
바로 답변해 줄 수 없었던 건 원래 그의 본성을 알고 있어서였을까.
설아는 기우의 윗도리를 목 안으로 넣어주며 안심시켜 주어야 했다.
"염려하지 마 기우야, 금방 다시 좋아지실거야."
말을 하는 스스로도 믿고 싶었다.
민혜가 생존에 있을 때 세상 자상한 그였다.
분명히 돌아올 거다. 다시 그들이 알던 자상하고 따스한 인정이 넘치던 그로.
근심이 크면 오히려 몸은 빨리 피곤해지듯 두 남매가 잠이 든 새벽 시간이었다.
콰당.
"헉! 하악, 하악."
또 그 꿈이다.
지금의 설아를 여전히 괴롭히는 그날의 트라우마.
모든 것이 변했는데, 시간이 그리 흘러도 저에게 있어서는 평생을 낙인처럼 달고 살아야 할 괴로움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날이. 설아의 밤을 더 길게도, 괴롭게도 만든 이유였다.
*****
옥상은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더없이 평온했다.
장현은 김이 서린 캔맥주를 한잔 들이켰다.
청량한 바람이 이는 이 공간은 그가 떠나기 전, 늘 휴식처럼 이용하던 곳이었다.
흑요석처럼 짙은 눈동자가 별자리를 그리듯 위를 향했다.
얄궂게도 하늘에 떠있는 달이 누군가를 닮아있는 듯 보였다.
그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그립고, 아프고, 만나고 싶은 소녀.
손을 하늘로 치켜든 장현은 아련한 듯 달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넌 내게 고통을 심어주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하는구나.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이 감정이라는 아픈 굴레의 통증도 없었을 것을.
이젠 잘 자란 숙녀가 돼있겠구나.
초롱초롱 했던 달덩이처럼 큰 눈도, 작은 체구도, 이젠 더 이상 정수기 물로 배를 채우진 않겠지.
............보고 싶다.
추운 겨울 자신을 기다리던 그 인연은 늘 그를 꿈에서조차 괴롭혔다.
때론 피눈물을 흘리며 나타났고, 때론 불면증을 선물했고, 때론 삶의 의지마저 꺾어놨다.
급식비가 없어서 마시던 정수기 물의 허상조차도 그리웠다.
또. 여길 왔구나.
학창 시절 그 아이가 살던 집.
그 앞에 앉아 올 리 없는 객체를 바라보면서 때론 술 한 잔 마시며 하소연도 했었지.
달동네 언덕을 펜스 삼아 허리를 기대어 보기도 하고, 소주를 나발불어보기도 했었다.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도 제법 진귀한 광경이였다.
"너 말이야. 민설아. 그러는 거 아니다. 날 이렇게 아프게 해놓고, 날 이렇게 못난 놈으로 만들어놓고, 그러는 거 아니다... 적어도, 적어도 한번은 나타나줘야지. 한번은 ..."
용서를 빌 수 있게.
나 역시 너를 좋아한다는 말을 그 작고 사랑스러운 가슴에 새겨줄 수 있게.
한번은 기회를 줘야지.
이 미친 가슴이 숨 쉴 수 있게.
너만이 치유가 가능한 이 병든 심장을.
잊을 수 없는 널, 언제까지 그려야 할까.
마지막으로 받은 그녀의 크리스마스카드를 살짝 움켜쥐었다.
이젠 넝마가 되어 너덜너덜해졌지만,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 잠시 그 시절 그 여린 빛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되면 이걸 보여주면서 진심이 아니었다고, 몰랐다고, 말해주고 싶어서였다.
나 역시 널 좋아다고.
과거의 후회 속에서 여전히 나오지 못하던 그 안타까운 남자는 비릿한 입꼬리를 올리며 마저 한 잔을 비워냈다.
*****
장현은 해외지사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본사로 출근했다.
기획 마케팅 본부장으로서, 새아버지이자 장현의 원수나 다름없는 장인강의 지시였다.
인강은 고인이 된 장현의 어머니 경화와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난봉질로 회사를 먹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러니 늘 밖에서 젊은 여자들과 놀아나는 그 모습이 경화의 눈에 어찌 보였겠는가.
물론 감정이 무딘 장현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 영겁처럼 느껴지는 일상 속에서도 목표 하나는 있어야 했다.
발정 난 두 부자에게서 다시 회사를 찾아야했음이였다.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역겨운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네이비 색상의 결 좋은 슈트.
오대양 같은 넓은 어깨에 잘 맞아떨어지는 어깨라인,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좋을만한 기럭지 좋은 바지길이까지, 뭐하나 트집 잡을 것 없이 완벽한 스타일의 표본과도 같은 차림이었다.
진한 갈색 눈동자엔 본 적 없는 각오가 비쳤다.
잘 욱여 맨 넥타이가 현제 그의 각오를 대변해 주듯 묵직한 색감을 띄었다.
그런 폭풍 전야의 분위기를 모르는 사무실 내의 여직원들은 감흥 없는 수다에 한창이었다.
"이번에 출근한다는 본부장님 정보는 아무것도 없더라?"
"뭐 배 나온 아저씨거나, 여자 몸매 밝히는 꼰대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어."
**[3]
둘 다 누굴 유혹하려고 치마 길이는 그리 짧은지.
책상에 앉아 시간만 축내는 그런 부류들처럼 도 보였다.
이전 본부장이 일적으로도, 외형적으로도, 얼마나 아니었는지를 알 수 있는듯했다.
원래는 취임식 까지는 아니어도, 기본 프로필 정도는 돌만한데도 장현은 이를 거부했다.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유쾌하지 못해서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소문의 본부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올백으로 올린 머리에선 공과 사를 구분하는 그의 엄격한 성향을 엿볼 수 있었고, 흑색의 톰 포드 구두 또한 이 남자의 고급스러움을 잘 살려주었다.
우뚝 선 드높은 신장 또한 고대의 네피림을 연상케했다.
한마디로 그의 존재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대단했다.
헐.
웬 연예인이 갑자기 들어온 건가.
다리를 꼬고 있던 여직원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소문의 기대 없던 새 본부장을 보곤 산에서 산삼이라도 본 듯 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수많은 수컷들의 눈을 본 그녀들이었을 거다.
특히나 외형을 많이 보는 그녀들로는 웬만한 아이돌조차도 만족하지 않았다.
허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어떤 치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눈이 부셨다.
빨려 들어갈듯한 두 눈은 몽환적인 느낌마저 자아냈다.
특히 저런 콧대는 인간에게서 쉽게 나올 수 없을 만큼 찬탄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금 그녀들이 소리를 내는 건 머리가 아닌 본능이었다.
"미친....."
자기들도 모르게 속 마음이 잇세 사이를 뚫고 흘러나왔다.
갑자기 이 무료한 회사가 좋아질 것만 같았다.
애석하게도 벌써 결혼식장까지 가고 있는 LTE 급의 착각만 빼면 말이다.
그녀들을 향해 서늘한 눈매를 든 장현은 재를 뿌리듯 입으로 내려쳤다.
"생각보다 다들 여유롭나 보군요."
인사조차 생략한 그는 느른한 직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했다.
붕어처럼 입만 꿈뻑거리는 두 여자.
서로를 쳐다보며 다시금 그를 향해 입을 모았다.
"네? 그게 무슨..."
"지금 돌아가는 회사 상황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남일 대하듯 임하는 것 같아서요."
등장과 함께 왠지 순탄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
그녀들 상상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허상이 깨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머지 직원들도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챈 듯 보였다.
"하하하. 아직 주말에 피로가 안 풀려서 그런가 봅니다."
"당신이 양 과장입니까?"
50초반 정도 돼 보이는 중년의 양 과장.
얼마 없는 앞머리 숯을 만지작거리며 굽실 되기 시작한다.
장현은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를 이었다.
차갑고, 묵직하고, 결연한 의지가 담긴듯했다.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제가 여기 본부장으로 온건 단순히 회사를 살리기 위함이 다는 아닙니다. 스스로의 가치가 이 회사에 녹을 먹을 만큼이 못된다고 판단되는 분들은, 저와 함께 할 마음이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오자마자 기강부터 잡으려는 건가.
그런 눈빛들을 서로 주고받은 직원들은 앞으로가 순탄치 않음을 예상하는듯했다.
장현이라고 앞뒤 생각도 안 하고 이러는 건 아니었다.
기획 1팀과 기획 2팀의 성적을 보니 여기가 심각하다는 걸 알아서였다.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 가면서 하는 일은 회사에 대한 애정보다는 어떻게 하면 한 시간이라도 빨리 퇴근할까를 그리고 있으니.
기획 1팀만큼은 아니어도 지금 같아서는 안 되는 거다.
그러니 그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더는 편하게 시간만 때우다 갈 생각하지 말라고.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당나라 부대를 만든 건 스스로의 의지들이 한몫했을 것이다.
편하고, 당연하고, 잡아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의 등장으로 자기들 딴엔 평온했던 분위기가 최악으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저 성품을 보니 봐줄 생각이 일 나노도 없어 보인다.
갑자기 밀어닥친 격랑에 직원들의 낯빛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
설아가 몸담고 있는 더홈은 이미진 대표를 기준으로 꽤 정평이 나 있는 업체였다.
다행히 주인을 잘 만난 설아 역시 이곳에서 꽤 인정을 받고 있는 터였다.
그러다 화진 그룹 영업팀에서 러브콜을 해온 게 벌써 삼 개월 전이었다.
미진이 전적으로 맡겼으므로 꼭 성공하고 싶었다.
이번 주가 처음 포트폴리오를 완성해 미팅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
늘 철야작업이 일상이 되었지만 이번만큼은 각오가 남달랐다.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지도 모른 채, 남은 마지막 자료들을 마무리하던 두 눈엔 각오가 그득했다.
책상 위엔 어린 기우와 엄마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나 잘할 수 있겠지? 웅, 엄마, 웅, 기우야?"
하늘에서 엄마가 봐줄 텐데, 어서 성공해서 우리 기우 데려와야 하는데.
설아가 이 밤을 일상처럼 셀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시간을 확인코자 휴대폰을 드는 순간이었다.
달랑달랑 걸려있는 고리를 보며 작은 입꼬리를 올려야 했다.
나를 빵띨이라고 부르던, 한없이 아프게 하던, 그 남자아이도 자신만큼이나 컸을거다.
태어나 두 번째로 품어 본 이성이었다.
차인 순간은 기다린 싸늘한 추위보다 더 아팠다.
그러니 지금 설아가 기억하는 장현은 재수탱이 그 자체인 거다.
"치이,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지 혼자 블라블라, 챙겨줄 땐 언제고, 너무해, 진짜."
소녀의 순정은 그런 추억을 잠시 회상했다.
장현을 떠올릴 땐 늘 그랬다.
화나고, 황당하고, 그리고 그리웠다.
한편으론 못살게 굴면서도, 사람에게 표현도 서툴지만, 피가 차지는 않다고 확신했었음으로.
이미 벌써 수년이 흐른 기억이다.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아픈 추억이었다.
얼음마저 얼려버릴 듯한 그때의 겨울, 처음으로 남자에게 해본 선물이었다.
그 선물을 향해 설아는 적의를 드러냈다.
"넌 말이야. 애가 너무 못돼 처먹었어. 너도 알지?"
설아는 애꿎은 토끼 인형을 장현이라 생각했나 보다.
실세 없이 쿡쿡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실려있었으니까.
*****
화진그룹 본사 앞 장현은 로비 앞에서 넥타이를 질끈 옥죄었다.
누가 따라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는 고저 없는 얼굴로 걸음을 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흑색 로우 번 헤어에 힘을 준 여자가 로비에 들어섰다.
민설아였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회사를 대표해서였다.
이미진 대표는 성실하고 감각이 좋은 설아를 진작부터 밀어주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역시도 팀장 직급의 설아에게 거는 기대가 컸을 거였다.
우와.
안 그래도 밖에서부터 이 회사의 웅장함에 잔뜩 기가 죽은 그녀였다.
한데 광활한 내부를 들어서니 과연 여기가 어딘지 실감이 났다.
"여긴 정말 지금까지 거래한 곳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구나."
설아는 겨드랑이에 낀 포트폴리오를 소중히 안아들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비장한 얼굴을 폈다.
그쯤 장현이 탄 엘리베이터도 서서히 문이 닫혔다.
잠시 그런 두 사람이 공명하듯 짧게 잡혔다.
인지를 못한 설아는 로우 번 헤어로 잔가지 없이 꽉 묶은 머리를 한 번 더 정돈했다.
피부가 하얀 탓에 유난히 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드러난 흰 목선 또한 숲속의 사슴처럼 고운 선율이었다.
그렇게 회사 로비 앞에 신분을 확인하고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수컷들의 눈빛이 그녀를 흘끔흘끔 쳐다보기에 이르렀다.
"야, 저기 로우 번 보이냐?"
"그래. 진짜 내 스타일인데."
"신입인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겠지. 아니면 저 정도로 튀는 비주얼을 모를 리가 없잖아."
설아의 수정처럼 말간 눈이 잠시 모델하우스에 머물렀다.
회사 내부에 설치된 파격적인 구조에 그녀 또한 적잖게 놀라는 눈치였다.
"흠, 비용도 줄이고, 사람들 이목도 끌고 괜찮은데?!.... 과연 대기업은 발상 자체가 다르구나."
익숙하지 않은 스킬레토힐 때문에 살짝 발목에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
그렇게 다시 목적지 층을 향해 한 걸음을 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여린 한쪽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설아 씨 아냐?"
"수경 언니?"
설아의 동네 이웃이었다.
한쪽 손에 낀 고무장갑과 청결을 위해 두른 흰 위생 모자를 보니 여기서 일하는 차림으로 보였다.
건치를 드러낼 정도로 반가움을 보이던 수경.
환한 미소를 드러내며 설아를 향했다.
"웬일이야, 여긴?"
"아, 저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렸어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그러게요. 여기서 언니를 다 보네요."
가뜩이나 낯설고 긴장한 상태라서 였을까.
아는 이를 보니 그녀 역시 무척 반가웠다.
수경은 설아보다 열살 정도 많았지만 늘 편안한 느낌을 주곤 했다.
물론 평소에 딱히 접전점은 없었다.
그러니 어떤 친분이나 친밀도가 높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냥 생경한 장소에서 만난 그 특별함 때문인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설아 역시 긴장이 좀 풀릴 수 있었다.
티 날 정도로 기쁨을 드러낸 수경이 한껏 꾸민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런 낯선 설아를 봐서인지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어서였다.
잘 깎여진 흑요석을 보듯 눈을 빛내며 칭찬 일색을 이었다.
"와아, 근데 우리 설아 씨, 오늘 엄청 예쁘다."
"그래요?? 저 지금 긴장돼서 죽겠어요. 오늘 잘 할 수 있을지... 저 실수하면 어떡하죠? 저 때문에 계약이 안되서 회사에 손해를 끼칠까봐 너무 떨려요."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한 설아.
왠지 푸근한 미소를 짓던 수경은 형형한 눈을 맞추며 독려했다.
보기만 해도 사람을 웃게 하는 이 아이를 안목이 높은 이들이라면 놓칠 리 없다고 확신해서였다.
"잘하고 와. 내가 알잖아, 설아 씨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한지... 대기업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한데 나도 아는 걸 모르겠어. 분명히 잘될 거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수경은 얼굴에 진심이 그득했다.
그래서인지 설아 또한 더욱 기운이 났다.
이 좋은 언니가 미혼모란다.
동네에선 말 많은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버림받고 이제 네 살 된 남자아이를 키우는 그녀였으니, 모진 풍파가 그려질만했을거다.
더욱이 근무한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잦은 실수가 많았다.
그럼에도 아이를 위해 굿은 일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설아 역시 그런 격랑 같은 모진 인생을 사는 그녀가 자신을 닮아서인지 남 같지가 않았다.
"그럼 우리 또 보자."
아쉬움 묻은 얼굴로 다시 청소 카트를 끌고 가는 수경.
그런 그녈 설아는 잠시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다시 시간을 확인하며 정리한 포트폴리오를 정돈할 때였다.
콰장창.
로비 사람들이 움찔할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렸다.
모델 하우스라고 크게 표기되어 있는 곳 안이였다.
설아가 뜀박질로 들어가자 수경이 엎어져있었다.
카트를 끌다 그만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4]
모델 하우스라고 크게 표기되어 있는 곳 안이였다.
설아가 뜀박질로 들어가자 수경이 엎어져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서툰 솜씨로 카트를 끌다, 그만 미끄러지고 만 것 같았다.
문제는 장비에서 튀어 나간 뭉특한 솔이 사고를 친 거였다.
곧 사람들에게 선보일 내부를 디자인 한 모형 집 한 부분을 깨트리고 만 것이다.
직원들도 깜짝 놀라 모형 쪽과 수경을 번갈아 봤다.
망연자실한 낯빛의 수경이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엎드렸다.
석고대죄하는 모양새였다.
"헉! 어떡해 이걸... 죄, 죄송합니다."
"아니, 이 아줌마가,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그중 남자 실장이 씩씩거리며 다가와 삿대질을 하며 눈을 부라렸다.
다시 땅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연신 쪼아리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일한 지 얼마 안 됐다 보니."
"이거 어떡할 겁니까? 곧 있으면 고객님들 들어올 텐데."
설아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수경의 한쪽 어깨를 잡으며 일으키려 했다.
"언니,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이 혹독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걱정하는 건 그녀뿐이었다.
눈 시울 이 잔뜩 붉어진 수경이 그런 설아의 따뜻한 손을 움켜쥐었다.
"설아 씨. 나 어떡하지, 이제?"
설아는 다시 일어나서 모형을 낱낱이 살폈다.
그녀의 육안으로 볼 때 모형의 내부 인테리어 중 파손이 난 부분은 욕실 쪽으로 보였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설아는 그 망가진 공간을 보며 좋은 생각이 난 듯 수경을 보며 눈으로 안심시켰다.
맞은편에서는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한 절체절명의 상황.
설아는 순발력을 발휘해 우선 메대에 대기 중인 여직원 두 명과 실장으로 보이는 세 사람을 훑었다.
그중 체형이 가장 맞아 보이는 한 명에게 초점을 맞추곤 제안을 했다.
"미안하지만 그 사원 목걸이 잠시 저 좀 빌려줄 수 있나요?"
*****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내 동생."
우측 호주머니에 부적처럼 지닌 토끼 인형을 꽉 움켜쥐고 있을 때, 자신을 향해 이죽거리는 상대가 인기척 없이 와 있었다.
그의 분노이자 떼버리고 싶은 폐부 같은 존재, 장강이었다.
그레이 색상의 슈트와 함께 나타난 사내.
빛깔 좋은 솔리드의 재질이 역광을 받아 더욱 광명했다.
번뜩이는 칼날처럼 장현을 향하는 살기를 숨긴 스마일 포커스. 185CM의 큰 신장, 수려한 외모와 함께 누군가를 닮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닌 사내였다.
물론 장현과 논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쪽 호주머니에 손을 꼽은 여유 또한 상대를 향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옥상에 서늘한 기류가 형성되며 두 남자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때, 첫 출근 소감이?"
"예상한 대로야."
"큭, 너야 늘 자신감 넘치니까. 걱정은 안 된다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워낙 꼴통들이라."
간을 보기 위한 장강의 한마디였다.
예상한 대로 장현은 크게 파동 없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허나 시비조로 시작한 그 한방은 역으로 장강을 향했다.
"글쎄, 내 앞에 서 있는 꼴통보다는 나을듯싶던데."
장현의 눈이 너라는 걸 확실히 짚어주자 잠시 꿈틀하는 장강이었다.
재수 없는 자식. 늘 그랬다.
본인은 해탈한 마냥, 늘 주변의 이들에게 둘러싸인 그런 존재였다.
사람 자체에 관심이 없는 그 시크함도 싫었다.
꼭 뭐나 된 것처럼 고고하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런 엘리트적 요소.
본인이 하이 소사이어티쯤이나 된다는 듯 거만을 떠는 것처럼 말이다.
특별할게 없는데, 왜 모두들 장현만 인정하나 싶었다.
공부도, 운동도, 쫓아가 보려고 노력했다.
노력한 만큼 그들의 관심은 서서히 자신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랬는데도 왠지 이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백 미터를 전력으로 완주하는 장강과는 다른 그였다.
처음부터 흥미조차 없는 상대였으니 순위로 이긴다고 쾌감이 들 리 없었다.
장강이 좋아하는 여자들 역시 늘 그를 먼저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장현은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 찌꺼기만 남은듯한 여심의 마음을 이 순위로 받았을 때 역시 기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아니라 항상 너인 거지.
장강의 만족하지 못한 어둠의 심연은 그렇게 칼을 갈기 시작했다.
장현이 해외지사로 날아간다고 했을 때도 드디어 이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영원히 거기 처박혀있을 것이지, 역시 너와 나 순탄한 인연은 아닌 모양이다.
서늘한 바람이 북풍처럼 불어와 두 사람의 이마를 한차례 치고 갔다.
어차피 말싸움에서야 장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도 잘 안다.
비소를 살짝 머금은 장강이 비릿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참, 만났냐?"
"뭘?"
아직인가 싶은 낯빛을 띄던 장강은 마저 말을 이으려다 웃음으로 대신했다.
"큭큭, 아냐. 이제부터 우리 일적으로도, 다른 쪽으로도, 상당히 재밌어질 것 같아서. 그럼 수고해라."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린 장강은 그의 어깨를 두 번 툭툭 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네놈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장강의 거슬리는 웃음이 잠시 하늘에 메아리쳤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현은 감정 없는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서늘한 공간이, 방금까지 팽팽했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서서히 태양이 구름 사이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재회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예고하듯이.
*****
"예? 그게 무슨."
이건 또 뭐야?라는 눈초리를 펴던 남자 실장.
설아는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몰아쳤다.
"여기 책임자시죠? 시간 없어요. 일단 이 상황은 넘기셔야 되잖아요. 이 정도면 시말서 정도로는 안 끝날 거 같은데.."
선동하듯 아슬한 줄타기에 그의 초점이 흔들렸다.
황당하긴 실장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부분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손님들은 잠시 가이드의 안내 설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이 상황을 망치면 어찌 될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될 되로 되라는 식으로 눈썹에 힘을 주던 실장은 여직원 하나를 보며 턱짓을 했다.
"거기 자네, 이 분과 옷 사이즈가 비슷해 보이니 우선 바꿔 입어, 빨리."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상황 앞에 수경도 눈만 꿈뻑 거리고 있었다.
실장은 도대체 저 여자가 무슨 꿍꿍인가 싶었다.
그리 노심초사할 때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미 회생은 불가능할 거라 여겨서인지 실장은 낙담의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소란이 이는 곳을 목격한 건 이 회사의 이사인 고평백이였다.
풍성한 백발의 올해 50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꼬리가 위를 세차게 향하고 있어서인지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떻게 보나, 자네."
"잘 안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비서의 답변은 평백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설아에게 시선을 향한 채 들숨을 쉬었다.
물론 회사를 말아먹고 있는 인강과 장강 때문에 저 행사가 망쳐지는 게 본인의 라인으로서는 좋은 일이 맞을 것이다.
그냥, 단지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저 망할 여자 밝히는 집구석이 참 싫었고, 회사를 날로 먹은 것 또한 마찬가지다.
허나 초기 회장인 장현의 친 아버지 임유광이 일구어놓은 회사를 망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묻어있었다.
처음 해외 파견 나간 장현이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나름의 기대가 있었으니까.
회사의 실세인 두 부자를 봐선 손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허나 유광의 친아들인 장현은 다르길 바랐다.
저 행사 또한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이벤트 중 하나임을 평백은 알고 있었다.
근데 시작부터 조짐이 저러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오묘한 기분이었다.
평백은 장현의 어머니 경화에게 한때 충신의 존재였다.
그러니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의 아들이 곤경에 처하는 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을거다.
평백은 여전히 설아에게 시선을 둔 채 비서에게 읊조렸다.
"그래. 그게 맞는 건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매캐하지? 자네 담배 냄새가 여기까지 퍼져서 그런 건가?"
"..... 죄송합니다."
약간 장난 식으로 눈꼬리를 올린 평백의 개그는 오늘도 수하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듯했다.
"하여튼, 자넨 일보다는 개그 공부를 좀 해야겠어. 이 수준 높은 아재 개그를 이해 못 하다니, 자네와 내가 나중에 헤어진다면 그건 능력이 아니라 개그 때문이라는 것만 알게."
짓궂은 그 장난을 그제야 한 타임 늦게 미소로 받아주는 상대였다.
엎드려 절 받기였다.
평백은 저 클라이맥스가 어떻게 종결될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비가 된 설아는 잽싸게 직원 옆으로 섞여들었다.
아직 어안이 벙벙해있던 여직원의 옆구리를 찔러대며, 자신의 일을 하길 재촉하기도 했다.
"준비하셔야죠."
"아, 네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상대는 놀란 눈을 들며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꼭 새벽닭 우는소리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오. 저희 모텔, 아니 모델 하우스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텔 소리에 실장의 눈치를 보던 여직원은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가 굿을 하는 뽄새는 막아야 했기에.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는듯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모형의 내실인 안방, 작은방, 거실 순으로 돌 때까진 무난해 보였다.
그리고 여직원의 눈초리가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이 욕실로 일제히 향하며 불신의 눈들을 들기 시작해서였다.
"어? 근데 욕실 쪽은 왜 이래?"
"그, 그게..."
직원은 벙어리처럼 안절부절 설명을 이어가지 못했다.
실장도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데.
설아가 그녀의 앞으로 살짝 나오며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
"고객님들. 집의 내부 인테리어 구조를 고르는 요즘 트렌드 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어디일까요?"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방.... 아니면 거실 아닐까요?"
"맞습니다."
"근데 그거랑 욕실 모형 망가진 거랑 뭔 상관이 있는데?"
눈꼬리를 휘며 불신 가득한 목소리를 내던 50 후반의 중년 남자.
반말을 뱉으며 꼬장꼬장한 태도를 취했지만, 설아는 유연하게 낯빛을 펴며 받아쳤다.
"욕실은 청결을 담당하는 만큼 아이들을 키우는, 가족분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닌가요?"
남자를 포함해 공감하는 사람들의 끄덕임이 보였다.
갖다 붙이기에 따라 분위기나 상황은 변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물론 기시감이 떨어지는 그 멘트를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많은 대중 앞이라 설아 역시 안 떨 수는 없었다.
그때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수경이었다. 걱정이 그득한 얼굴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설아는 이 무대를 성공적으로 끝낼 이유가 있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설아는 차분해진 낯빛으로 이어갔다.
***[5]
"요즘은 특히나 인테리어에 열을 많이 올리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 늘 아쉬운 게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한 분 한 분의 목소리를 듣고 좀 더 완성도 높은 이상적인 인테리어를 따라가기보다는 기존의 사례와 배치도 요소로 끌고 가는 성향이 강했으니까요. 그렇다 보니 전체를 놓고 봐도 욕실만큼은 디테일과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거기 살 여러분들인데도 말이죠."
긴가민가 하던 사람들이 한 점 흔들림 없는 설아의 설명에 하나둘씩 매료되기 시작했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공감을 끌어내기 좋은 건 일상의 주제다.
아이들이나 전혀 생각하지 않던 공간의 기대감 같은 것들.
수경과 실장도 처음 보는 그녀의 프로페셔널함에 놀라움의 입을 벌려야 했다.
아파트 내부 인테리어 중 최근 회사로 가장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 곳도 이 부분이었다.
거실의 화려함을 부각시킨 인테리어 공사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보니 화진은 욕실에 대한 부분이 상대 업체들에 비해 평판이 좋지 않았다.
설아 역시 계약이 잘 진행되면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논의할 예정이었다.
꼭 홀린 듯 대화를 이어가는 그녀의 능숙함은 잘 조련된 조교 같았다.
떨떠름해하던 중년의 남자가 이끌리듯 공감을 자아냈고, 와이프로 보이는 여자도 거들었다.
"안 그래도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거실이나 안방은 마음에 드는데, 뭔가 욕실 내부 디자인이 좀 아쉽더라고."
"그쵸? 여보. 거실 그렇게까지 클 필요도 없는데, 쓸데없이 면적이 커서 상대적으로 욕실이 좁아 좀 불편하긴 해요."
군중을 이끄는 심리는 작은 동요에서 부터라는걸 설아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구심점의 존재는 바로 이 중년부부라는 걸 빠르게 캐치한 덕분이다.
"여기를 봐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선을 낚시하듯 욕실 모형의 내부로 마저 이끌었다.
최악으로 번질 뻔한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수경과 실장의 눈도 그들을 향했다.
아까보다는 둘 다 안색이 많이 밝아진 상태였다.
"그래서 여길 완성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시는 분들에게 좀 더 이상적인 인테리어를 만들어드리고 싶어서... 한 분 한 분의 의견을 모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여기가 망가져있는 건 바로 고객님들의 불만의 소리를 모티브 해본 거고요."
파손된 모형의 결과값을 이런 식으로 돌리다니, 대단한 순발력이었다.
상황이라는 건 주도하는 이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기존에 이미 맞춰진 매뉴얼이나 틀이 있다 해도 그게 다는 아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안전하길 바라는 매뉴얼과는 다르게, 이상적인 꿈을 꾸기도 함으로.
"아, 그래서 일부러 여기만 망가트려놓은 거군요. 부각되는 부분에 우리들의 불만을 이런 식으로?"
"저희는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다채로운 감성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긍정의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아까부터 한쪽으로만 기울던 부정의 시선들 역시 조금씩 활력을 띄기 시작할 정도였다.
막힘없이 답하는 설아의 바이브에 감탄한듯했다.
"와아, 나 이런 설명회는 처음인데?"
"그러게요. 아가씨가 설명도 또박또박 잘하고 당황하지도 않고, 뭔가 믿음이 확 가네요."
"그럼 만약에 여기서 완공될 아파트를 계약하게 되면, 우리 의견이 반영된 욕실 구조가 완성될 수도 있다는 거네요?"
기대와 호기심의 눈을 든 몇 명의 사람들이 연사적인 질문을 이었다.
살짝 미소 짓던 설아는 절제된듯한 바이브를 담아 화답했다.
"아무래도 건물 내부의 공간 때문에 완전히는 힘들겠지만, 여러분의 의견이 어느 정도 수반된 좀 더 이상적인 인테리어의 욕실은 가능할 겁니다. 물론 그에 따른 찬반 비율을 기준으로 시행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좀 기대되지 않나요? 전혀 생소한 욕실이 아닌, 기대하고 상상한 내 의견 한 방울이 들어간 그런 곳이?"
설아는 늘 꿈꿔왔다.
자신의 기대가 다른 이들에게도 같이 꿈꿀 수 있는 이상이 되기를.
지금의 그녀가 설명하는 건 이성과 사고가 아닌 감성이 묻은 그런 거였다.
어린 기우와 민혜와 함께 살 푸른 초원의 이상적인 집을 꿈꿔왔으니까.
물론 어찌 보면 받아들이는 상대에 따라 궤변처럼 도 보일 수 있었다.
허나 현실엔 늘 괴리감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 기묘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건 한 점 흔들림 없는 기준일 테다.
한사람 한 사람과 능숙하게 눈을 맞추는 그녀의 전문성은 이미 누가 봐도 프로의 모습이었다.
"여기 오신 분들께서는 그냥 살집이니까,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흰 그냥 계약을 따내기 위해, 집을 팔기 위해, 여러분들 앞에 있는 게 다는 아닙니다."
차분하면서도 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설아의 모습에 이끌리듯 그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수경과 실장은 그녀를 보며 경외의 낯꽃을 들 정도였다.
평백 또한 어느덧 그 마력에 매료되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럼 뭣 때문인데요?
"같이 꿈꾸고 싶어서입니다. 단순한 설명회가 아닌 이 한순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기댈 수 있는 그런 이상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먼 훗날 우리의 이상이 들어간 꿈 한 방울 담은 욕실과, 아파트에 살 모든 고객님들의 웃는 모습. 그게 저희가 진짜 보고 싶은 저희 화진그룹의 진정한 꿈이니까요."
꿈 한 방울이라는 그 말에 모두들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 말도 안 되는 괴리감 있는 상황을 움직인듯했다.
하나, 둘. 깐깐하게 납득을 하지 못하던 이들, 어떤 이는 실소를 지으며 유쾌한 미소를 보였으며, 어떤 이는 불신의 눈이 신뢰로 붉어졌다.
연일 까칠하게 굴던 중년의 남자는 처음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폈다.
"햐아, 꿈 한 방울이라, 솔직히 너무 장황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가씨 설명을 듣고 있자니 왠지 기대가 되는데?"
"그러게요. 화진은 디테일이 좀 아쉬웠는데, 소문으로만 듣던 거 하곤 딴판이네. 이래서 직접 와서 보고 들어야 한다니까."
"이거 거실과 안방보다 욕실이 더 기대되는데?"
재치 있는 중년 부부의 개그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삭막한 분위기가 걷히고 훈훈한 기류가 내부에 가득 들어찼다.
수경에 낯빛이 설아라는 빛을 통해 안식을 찾은 듯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췬 건 성영과도 같은 위대한 위인을 보는듯했다.
실장과 직원들 역시 본 적 없는 눈부신 설아의 활약에 안도의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평백은 턱을 쓸어올리며 귀한 보석을 찾은 듯 눈을 빛냈다.
그 표정엔 흥미와 기대, 그리고 왠지 모를 뜨거움이 서려있었다.
"꿈 한 방울이라, 후후 재밌는 친구 군."
다시 평백이 직원들과 좀 전보다는 더 유쾌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그걸 지켜본 또 한 명의 이가 그녀를 향해 눈을 들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서, 흑암처럼 끝나지 않을 길에서, 출구를 찾은 듯한 남자의 전율 이이는 눈빛이었다.
*****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며 직원들에게 진행 상황을 듣던 중이었다.
한바탕 웃음이 이는 모델하우스에 장현이 시선을 둘 때였다.
거기엔 있을 수 없는 객체가 서 있었다.
처음엔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미쳤구나 장현."
설아가 상품 설명회를 끝낸 후에도 장현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환상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눈앞에 그 아일 닮은 세상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환상이 아니었다.
장현은 잠시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뭐지.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내가 죽은 건가.
꿈인가.
본인이 추진한 회사 내 모델하우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던 작은 소녀는 누군가를 너무도 닮아있었다.
문득 장현의 뇌리 속에 짧은 회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소녀에게 받은 그때의 작은 선물을 들어 올렸다.
"자. 맨날 얻어먹기만 하는 거 같아서, 하나 가져."
학창 시절 얻어먹기가 미안하다고 준 소녀의 선물이었다.
"자봐. 나는 화난 토끼 인형이야. 딱 너 닮았네."
그리고 장현이 쥐고 있는 건 울고 있는 토끼 인형이었다.
여자의 손에도 쏙 들어갈 만큼 미니멀한 사이즈였다.
"너도 딱 너 같네."
현실로 돌아온 장현은 그녀에게 받은 토끼 인형을 꽉 그러쥐었다.
커다랗게 큰 손이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장현의 심장이 잠시 그를 대신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장현.
저건 그냥 닮은 환상이다.
보고 싶은 그 마음이 병이 되어 불러일으킨 환상인 거다.
그러니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너를 닮은 이 세상이다.
설아를 닮은, 설아가 살고 있는 그 자체인 거다.
완연하기만 하던 미래가, 너무나 꿈 같아서, 장현은 짧은 자조를 불러왔다.
저 설아를 닮은 세상을 향해 하는 고백이기도 했음이었다.
늘 웃고 있던 너를 몰라줬었다.
니 가정이, 그런 악마로 인해 망가지고 있음도 알아주지 못했다.
그냥, 그냥 니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게 너무 좋아서, 그것만 알고 싶었다.
겨우 숨 쉬고 있던 널, 누구보다 깊게 절망으로 민 것도 나였다.
그런데 니가 내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던 혼란 속에서, 그의 미로를 깨트려준 건 현실의 울림이었다.
"오, 순발력이 꽤 좋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 회사에 저 정도로 딱 부러지는 여직원이 있었나?"
"꿈 한 방울이라, 왠지 로맨틱하지 않아요?"
설아를 칭찬하는 직원들의 독려가 결국 이것이 꿈이 아님을,
미로를 깨트리는 빛의 한 줄기처럼 그의 환상을 깨트렸다.
'정말, 정말로 민설아란 말인가.'
그제서야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대상이 제대로 보였다.
그리고 거기엔 믿을 수 없는 실루엣이 서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빛은 그가 절대 모를 수 없는 거였다.
그때와 같은 눈으로,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봄꽃을 닮은 그 환한 미소도, 겨울철 시클라멘처럼 분홍빛을 띠던 그 볼도, 자신이 본 게 믿어지질 않아 몇 차례나 눈을 흔들어야 했다.
변할 리 없는 영겁의 세월 속에서 다시 빛처럼 그 앞에 나타난 인영.
장현은 다시는 불러볼 일 없을 것 같던 귀한 그 이름을 읊조렸다.
죽어있던 그 시절 소년의 심장 역시 눈앞의 상대를 향해 시간과 함께 다시 박동했다.
"빵..... 띨."
너를 처음 만난 고등학교 시절.
내가 너에게 낙인처럼 붙여준 너의 그 별명. 다시 불러보고 싶어서 수많은 날을 입속에서 머금어야 했었는데.
왜 니가 여기 있는 거지.
"본부장님. 슬슬 점심 드시러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런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설아의 존재만이 그의 가슴이 인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아이였다.
급식비가 없어서 정수기 물을 마시던, 왠지 비어 보이는 말간 눈이었지만, 여전히 광채가 났다.
유채처럼 싱그러운 미소 또한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다른게 있다면 키가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왜 저 아이가 여기에.
늘 일교차처럼 정교하던 사고와 이성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추운 그 겨울 그녀와 함께 죽은 심장이 다시 맥동을 시작한 것만이, 장현에게 있어 다시 세상을 살아갈 증거였다.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불러보고 싶어도 다신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이름.
평생 못 보게 될까 봐.
그래서 그날 죽은 심장과 함께 봉인해두었던 이름.
민설아.
정말 너였어.
*******[6]
그해 그 겨울은 두 사람에게 있어 아픔이었다.
처음 만난 날은 반가움이었고, 그 끝은 고통이였음으로.
봄꽃을 닮은 소녀. 민설아.
처음 전학 온 그날 장현은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곁에 잡아두기로.
학창 시절의 한 파편이었다.
오래도록 비워둔 주인 없던 그의 옆자리에 찾아온 물방울 같은 소녀.
설아는 장현을 보며 반가움의 악수를 청했다.
해사한 미소와 함께.
"안녕. 난 민설아라고 해. 우리 친하게 지내자."
솔직할 수 없어서, 너를 어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랬었지.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두려워서,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며 다신 너라는 존재를 못 볼까 봐, 늘 솔직하지 못했다.
괴롭힘 또한 너에 대한 관심 임도.
"야."
"나?"
"여기 너 말고 띨띨한 애가 또 있어?"
"그 띨띨한 애한테 무슨 볼일인데?"
입술을 샐쭉 내밀던 그 모습조차 너무 귀여웠다.
장현은 책상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 돌려 명령했다.
"가서 빵 좀 하나 사 와."
"뭐? 내가 니 빵을 왜 사 와야 되는데?"
그냥, 말하고 싶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싶어서 그랬다.
비겁하고 졸렬했다.
"내가 누군지 알면 앞으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게 될 거야. 이유됐지?"
총총걸음으로 걷던 설아는 불만은 잠시 재우기로 했다.
전학 첫날부터 찍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학학, 이제 됐니?"
책상 앞에 신경질적으로 도착한 파인애플 빵.
그걸 사 온다고 설아는 전장을 치른듯한 모습이었다.
장현은 느른한 어조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여전히 엎드려 고개만 내민 채였다.
"이빵 아닌데?"
"뭐어? 빵 사 오랬잖아."
"무슨 빵인지 안 물어봤잖아. 역시 생긴 대로 띨띨하네. 이제부터 니 별명은 빵띨이다. 알았어?"
"너, 이씨이."
그때였다. 이성을 향해 눈꼬리를 올린 것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넌 나를 웃게 한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거기에 서서.
패닉 상태의 장현을 시간과 함께 일깨워 준 건 여직원의 울림이었다.
"본부장니임?"
여직원 하나가 뒤통수에 대고 부르듯 던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현은 순간 고개를 돌린 설아와 눈이 마주치려 하자 잽싸게 엎드렸다.
직원들 역시 덩달아 도미노처럼 그를 따랐다.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듯 하면서.
'뭐야, 왜 내가 피하고 있는 거지?'
자신도 합의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듯 보였다.
미친 듯 뛰어 되는 심장만 움켜쥘 뿐이었다.
저기에 있는 건 분명히 그녀였다.
전 재산을 주고서라도 다시 돌리고 싶은 결실이었다.
헌데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못난 짓을 해서 창피한 건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괘씸하다며 따질까 봐 겁이 난 건가.
직원들은 참 반전 많은 자신들의 상사를 눈만 꿈뻑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본부장님?"
"먼저들 가요. 나는 볼일이 좀 있어서."
장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 손만 까딱거리며 뜻을 전했다.
그리고 특수 요원이 테러범 뒤 밟 듯 조심스럽게 에스컬레이터를 등지며 보복했다.
아주 조심히.
직원들은 이질적인 그의 엉뚱함에 혼란이 일었다.
"저분 대체 뭐죠?"
"지금 저 대사와 저 움직임이 맞다고 보시는 건가?"
"상품 설명회 하던 그 직원 아녀요? 왜 쫓아가시는 거지?"
"고백하려나 봐요."
"보기보다 여자 좋아하시나 보다. 보자마자 바로 액션을 취하시는 거 보니."
직원들은 각자의 소리를 내다 다시 현실로 복귀를 시작했다.
여직원들은 주인 잃은 강아지의 눈을 들었지만.
장현은 설아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습을 한참을 주시했다.
꼭 귀신에 홀린 듯 스스로의 자아를 제어할 수 가 없었다.
이런 능동적인 움직임 또한 스스로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늘 그랬다. 잠재적 무감각의 소유자인 그를 늘 우습게도 정상처럼 만들던 것이 그녀였으니 말이다.
왜 죄인처럼 몸을 숨기며 훔쳐보는지, 저 아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숨 쉬는 것 외에 감흥이 없던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지.
그 다채로운 감정 속에서 단 하나는 확실했다.
내가 알던 민설아는 전혀 변함없는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났다는 거,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곧 닫힐 엘리베이터 문 앞에 장현의 걸음은 바빠졌다.
여기서 놓치면 언제 볼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이례적일 만큼 역동적인 움직임에 스스로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겨우 문을 잡았다.
혹여나 설아가 알아볼까 재빨리 등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눈치채지 못하게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때와 같은 여전한 체향이 그의 후각을 통해 평안을 찾은 듯 일렁였다.
스스로가 이렇게 미소 짓고 있는 것 또한 알 리 없었다.
얼마 만인지조차 망각할 정도로 숨기지 않고 드러난 신소였다.
'빵띨이, 내가 니 뒤에 있는데도 눈치조차 못 채는 거냐.'
언제 봐도 귀여운 뒤통수였다.
저 깜찍한 뒤통수가 너무 사랑스러워 학창 시절 수도 없이 백 태클을 걸었으니까.
"꺅!"
"빵띨이 너였냐?"
"너, 일부러 그랬지?"
"뒤통수만 보고 내가 무슨 수로?"
씩씩거리며 가던 그 추억의 뒤통수란.
장현의 높은 신장에서는 설아의 전체가 관망하듯 잘 보였다.
그리고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바로 휴대폰이었다.
고리에 걸고 있는 화난 토끼 인형의 액세서리, 모를 수가 없는 물건.
설아에게 처음 받아 본 선물이었다.
그 두 눈에 담긴 것 또한 그랬다.
상실한 시간을 돌려받은 자의 기쁨처럼도 보였음으로.
그리고 장현의 심장은 다시 한번 외쳤다.
'맞네. 민설아.'
그때의 그 빵띨이가 확실했다.
그 인형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니.
장현은 당장이라도 그 사랑스러운 설아를 안고 싶은 걸 겨우 견뎠다.
왠지 저걸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쩌면 날 아직도 기억해 주고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 예쁜 심장에 여전히 나라는 한 방울이 숨 쉬고 있을지도 몰라서.
내 이 심장 소리가 아직은 저 아이에게 들키면 안 되는데.
타임 슬립 같던 시간이 문과 함께 열리자 그녀를 2M 간격으로 따라갔다.
그제야 장강이 만났냐?라고 말하던 게 뇌리 속을 돌았다.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도, 뱀의 음흉한 속내가 진작부터 만들어온 그림 임도 파악할 수 있었다.
설아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장현은 그녀가 여기까지 흘러온 경위를 알아야 했다.
"언젠가 꼭 좋은 집을 만들고 싶어. 우리 가족 모두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집을."
예전에 설아가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상상해 보기도 했다.
집을 만들기 위해 건축 자격증을 따지 않았을까.
자신의 사무실을 내고 싶다고도 했었다.
그럼 기적처럼 다시 만날 수 있지도 않을까 하고.
신을 믿어본 적은 없지만 이 한순간을 허락해 준 것이 그의 계시라면 절로 고개를 숙일 수 있을 만큼 기뻤다.
다시 찾은 이 귀한 시간을, 그 아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이미 안으로 들어간 그 자리를 장현은 한참을 서서 보며 다짐했다.
"니가 먼저 날 찾아온 거야, 빵띨이. 그러니 각오 단단히 해."
이젠 내가 갈 테니까.
창가로 비췬 햇살이 머금고 있는 건, 신소를 띄고 있는 시간을 돌려받은 소년의 열락처럼도 보였다.
*******
깐깐한 미팅을 잘 마치고 나온 설아의 낯빛은 보기보다 밝았다.
준비한 걸 충분히 실현시키고 왔다.
이래서 탈락된다면 그건 인연이 아닌 거였다.
자신 말고도 몇 팀의 사설업체가 참관했다고 했다.
행동은 빠르게, 생각은 차분하게 가기로 하면서, 들어갈 때보다 나갈 때의 발걸음은 많이 가벼운 기분이었다.
해사한 미소를 그리며 로비 정문을 지나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설아는 다시금 건물 위를 올려다봤다.
좀 전에 본 그 낯익은 실루엣이 너무 강렬히 남은 터라서였다.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1층 로비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무의식중에 올려다 본 3층 높이에 익숙한 사내가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설아는 의식의 흐름을 쫓아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럴 리가.
내가 뭔가를 잘 못 본 건가.
분명히, 분명히 그 애 같았는데.
허나 3층 어디에도 더 이상 그 흔적은 없었다.
귀신에 홀린 듯 그녀는 낙담과 아쉬움의 낯빛을 들며 힘없이 내려와야 했다.
그가 그러했듯 그녀에게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민설아. 서울이 그렇게 좁니? 아니잖아. 제발 좀 정신 좀 차려라."
설아는 가슴에 포트폴리오를 낀 채로 정수리를 살짝 콩하고 때렸다.
낌새를 못 느낄 만큼의 거리에서 서서히 따라오는 차가 있음도 알지 못했다.
검은색 고급 승용 세단 안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연일 상대를 주시했다.
그렇게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다.
남자는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얼마나 멀리 이사를 간 것일까 싶었다.
못해도 몇 시간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한 25분 정도 후 설아가 바로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럴 수가, 고작 원래 예전 살던 집에서 버스로 몇 코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아무리 서울이 넓어도 한 번 정도는 볼 법도 했을 텐데 어이가 없었다.
"이거야 원, 엎어지면 닿을 거리였단 말이지."
고즈넉한 기와집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와 어울릴 것도 같았다.
미친놈처럼 오지 않을 옛집 언덕 위에서 술 마시고, 하소연하던 자신이 허무할 정도였다.
그런 설아가 반듯한 기와집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안정이 되었다.
이젠 어디 사는지도 아니까 놓칠 리 없어서였다.
"빵띨이. 여기 살고 있었단 말이지."
올라 간 입꼬리 역시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유려한 세 손가락이 잘 빗은 이마를 지탱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내가 진짜 정상이 아니긴 한 모양이네."
남 뒤밟는 건 할일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다.
물론 사람은 스스로에게 늘 관대하다.
그건 장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이 참 성스럽네."
괜스레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놓친 세월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그보다 의미를 주는 그녀를 만났음으로.
저벅 저벅 저벅.
인기척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못 느낄 정도였다는 것도 문제였다.
똑똑똑.
검은색으로 야무지게 선팅 된 유리를 두드리는 아람의 두 눈은 의심의 눈초리가 그득했다.
이런.
너무 티 나게 주차를 했는지도 몰랐다.
설아의 눈에 띄지 않으면 안전한 거시적 거리라고 계산해서였다.
사실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타이밍이 나빴다고도 볼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설아의 절친이라는 사실조차도 당연히 알리 없었다.
일반 남자라면 아 죄송합니다, 아니면 지나가다가요, 라든지 당황스러운 낯빛을 들었을 상황이었다.
"좀 열어보시겠어요?"
그리 서서히 올라가는 유리문 사이로 수상한 남자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팔짱을 낀 아람. 어디 웬 놈팽인가 싶어 잔뜩 경계를 한 눈초리였다.
"누구시죠?"
*****[7]
아람은 설아의 중학교 시절 만난 절친이었다.
끔찍한 설아의 새아빠, 기철의 사연을 모두 알고 있는 찐친이기도 했다.
겨울 새벽 도망 나온 설아와 기우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준 혈육과도 같은 사이다.
그러니 이미 가족 이상의 존재인 셈이다.
장현 또한 전혀 접전점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자신의 차를 본 그녀를 무시하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열어보시라니깐요."
장현이 생각을 정리할 동안 아람은 한차례 더 강하게 유리문을 두드렸다.
그리 서서히 올라가는 윈도우 틈새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남자 얼굴이 이게 대체 뭔가.
"그러는 그쪽은?"
여상한 말투의 장현은 늘 그렇듯 차분히 답했다.
오히려 당황한 건 현장을 들킨 스파이가 아니라 아람이었다.
우리 집 근처에 연예인이 사나 싶은 얼굴을 들어야 했지만, 본론을 흐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내, 내가 먼저 물었는데요?"
눈을 부라리며 나가야 할 판이었다.
허나 차 안의 옅은 어둠이 만든 음영의 테두리만으로도 완벽한 선율을 자아내는 남자였다.
태어나 처음 보는 그 찬탄한 얼굴에 꼭 귀티 나는 그림을 본 듯, 아람은 눈만 꿈뻑 거려야 했다.
반듯하게 세공된 눈썹도 일품이었다.
특히나 저런 깊은 눈매는 바다 깊은 심해의 호수에서나 볼법했음이다.
아람은 혼란이 일었다.
평소엔 늘 싹싹한 그녀였기에, 적어도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진 않았을거다.
허나 낯선 사람이 안전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늘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아의 새아빠 기철 때문이었다.
그 후 아람은 설아를 지키기 위한 책임감이 늘 스스로를 따라다녔다.
그러니 아람의 시야에 비치는 장현은 끝내주는 비주얼 이전에 낯선 남자라는 수상함의 본능이 더 커서였을 테다.
아람은 다시금 집 지키는 강아지 모드로 변했다.
장현은 본 적 없는 야생을 바라보며 기특하다는 듯 눈썹을 씰룩거렸다.
개가 일을 잘하는군.
두 사람 사이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허공에서 한번 부딪혔다.
"이 시간에 왜 남의 집 문을 보고 실실거리냐고요. 도도독님이세요?"
"한국말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용건이 뭐냐고요. 이 시간에 우리 집을 보며 웃고 있는 이유가요오."
타격도, 파동도 없는 그의 항마력에 아람은 조금씩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장현은 일별을 가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군. 나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와 잠시 보고 있었던 거지,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데. 아가씨 눈엔 내가 그리 한가해 보이나?"
말이 좀 짫네.
아람의 눈에도 아무리 나쁘게 보려 해도 이 화려한 남자가 그랬을 리는 만무해 보였다.
그 느낌이 마치 앉아서 달고나를 굽고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고급스러움 때문이리라.
그러니 행색을 떠나 도저히 반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였다.
"다, 당신이 한가한지 안한지. 내가 어찌 알아요...... 오."
수상한 남자는 그렇게 살짝 눈썹을 휘며 유리문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야기 끝난 걸로 알고, 그럼 난 이만."
왠지 도망가는 모양새처럼 보이는 건 착각인가.
문제는 모든 오해를 불문하는 그의 고급스러움에 아람은 여운 남은 눈초리를 펴야 했다는 거다.
그녀는 안 한가해 보이는 남자를 향해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경계의 눈초리를 더욱 바짝 쪼았다.
안 한가한 남자 또한 시야를 빠져나와서야 겨우 날숨을 쉴 수 있었다.
"집 지키는 개가 있는 줄은 몰랐군. 좀 조심해야겠어."
분명히 자신의 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설아와도 어떤 접전점이 있을만한 여자라는 게 추론됐다.
얼굴만 봤을 때는 분명히 언니나 이모처럼 보이는데, 겉만 봐서는 확실히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아직 정보가 부족한 그로서는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재회의 그림을 그려보기도 전에 주위 이들에게 반감을 사고 싶진 않아서였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아람. 여전히 찝찝함을 다 던지지 못하는듯한 태도였다.
설아는 세안을 끝내고 들어온 상태였다.
작은 양볼을 두드리고 있는데 어째 친구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작은 고개가 아람을 향해 채근하듯 돌아섰다.
아직 볼에 묻은 로션 역시 뽀얀 피부 위에 덧발라져 있는 상태였다.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웬 이상한 남자가, 아니지, 웬 기가 막히게 잘 생긴 남자가?"
"뭔 소리야."
잘생겼다는 말만 여러 번 반복하는 아람이었다.
"근데 진짜 무지하게 잘 생겼더라. 와아, TV에 나오는 아이돌들도 그만큼은 안되겠더라, 진짜."
그런데 이상한 남자는 왜 나온 건데. 아이돌에겐 일도 관심 없는 그녀의 발언이 좀 생경했다.
모델이 꿈인 아람의 아이돌은 지저스 안 뿐이였으니까.
설아는 좀 더 바짝 붙어 호기심의 눈을 들며 채근하듯 물었다.
"그 무지하게 잘 생긴 남자가 어쨌는데?"
"웅? 아, 우리 집을 보고 웃고 있더라고."
"왜?"
"모르지. 자기 말로는 고지식한 분위기에 눈이 돌았다는데?"
누가 보면 고요 속의 외침인 줄 알겠다.
평소 상식과는 담을 쌓은 친구의 그 화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명제를 못 찾은 설아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화장대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문득 무지하게 잘생겼다는 말에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밖에 있던 남자가 아무리 멋져도 그 아이만 하지는 못할 거다.
잠재적 사이코패스라고 피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건 남자의 한해서였다.
여학생들에게는 중독이라고 불렸던 소년.
그 신성한 비주얼 앞에 얼마나 많은 여학생들이 병들었는지, 그런 감각에 꽤나 둔감한 설아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잘 있을까.
지금도 여전할까.
꼭 한 번 정도는 보고 싶었는데.
방금 그 이상한 남자가 장현일 리는 추호도 알 리 없던 설아는 모처럼 가슴속에 그를 담아본다.
괜스레 폰에 걸린 액세서리를 만지며 입가도 한번 올려본다.
*******
장현은 옥상에 올라와 경화의 흔적을 바라보며 고백했다.
답지 않게 조금 들뜨기까지 한 어투였다.
그런 심경을 싸늘한 바람은 아는지 경화 대신 세차게 답변하듯 불어주었다.
장현의 앞머리가 기쁨의 춤을 추듯 출렁거렸다.
"찾았습니다. 사소하지 않은 그거."
기다란 손가락이 김이 서린 캔맥주를 쥐며 목울대를 넘겼다.
저녁 테라스 위 조경은 완벽했다.
달빛에 비친 그 모습조차 꼭 신화에 나오는 아폴론이 연상될 만큼의 화사한 매무새였다.
그 금안 같은 밝은 미소가 멀리 떠난 경화를 담고 있었다.
혼자서 독백이라도 하는 그 모양새가 참 낯설었다.
"저 어떡해야 할까요?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설아가 자신을 어찌 기억하고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잔인하게 말하고 상처를 주었으니.
보자마자 귀싸대기가 올라온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 성향에 그리하진 않겠지만, 차라리 때려준다면 속이라도 후련할 텐데 말이다.
한대 맞아주고, 아니 몇 대가 되더라도 맞아주고, 꼭 그 말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미안하다고.
내가 놓친 게 뭔지 몰랐다고.
못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그냥, 그냥.
보고 싶었다고.
우스웠다. 잠재적 무감각이 만들어낸 이 유치한 상상이 스스로를 웃게 만들 정도였다.
서늘한 날씨 속에서도 장현의 체온은 전혀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였음으로.
********
그 집을 겨우 빠져나올 때 설아를 받아준 건 아람이와 부모님들이었다.
처음엔 기대하지 않았다.
어른이라는 건 기철처럼 조건 없이 다가와 폐를 도려내가는 괴물들이라고 생각했다.
염치없는 마음 또한 스스로를 먼저 대변할 수 없기도 했다.
그런 설아의 마음을 먼저 알아준 건 늘 두 분이었다.
성인이 된 그녀가 그동안의 고마움과 함께 더는 신세를 질 수 없어 독립을 선언할 때였다.
"섭섭하다 설아, 너. 우린 너나 아람이나 똑같은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 있어?"
"당신도 참, 설아야. 니가 이해해라. 집사람은 너도 딸처럼 거둔 마음이라, 서운해서 그런 거니까."
설아가 이 땅에 태어나 신께 유일하게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부모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아람이의 엄마 권숙자와 아버지의 상냥함을 가진 이말용이 그랬다.
모두가 그 인간처럼 그렇지는 않구나라는 걸 두 사람이 일깨워 주었으니까.
화목한 분위기 속에 설아도 점점 안정되어갔다.
허나 진짜 따님께선 점점 찬밥 신세로 밀려나고 말았으니.
문 지방에서 짝 다리를 짚고 있던 아람은 농성이라도 할 기세였다.
"쒸이, 엄마 딸은 그래도 나거든?"
"그게 문제야. 왜 착하고 내 젊었을 적을 고대로 닮은 설아가 아니라,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못난 너냔 말이다."
"우씨, 그럼 내가 다리 밑에서 주어온 게 명백한 사실이지, 지금?"
"어찌 알았어? 설아야. 실은 니가 내 딸이야. 여보 안 그래요? 설아랑 내 얼굴은 아주 판박이잖아요."
말용은 설아에게 미안한 얼굴을 하며 숙자를 보며 그건 아니라고 말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숙자 역시 어려운 예전을 보내며 여동생을 떠나보냈다고 했다.
같은 아픔을 상실한 설아가 그래서 더 낯설지 않았다고 한다.
"내겐 먼저 간 동생이 하나 있단다. 잘 자랐으면 너처럼 예쁜 숙녀가 되어있었을 텐데, 그래서 널 보면 더 눈에 밟혀. 그러니 미안해하지도 말고 어려워하지도 말았으면 좋겠어. 우린 어차피 만날 인연이었다고 생각하자."
처음 새아빠라는 인간의 만행을 알게 되었을 때, 창고에 있던 잘 갈린 낫을 들고나와 설아의 엄마를 대신하기도 했다.
"당신이 짐승새끼지, 무슨 아빠야! 한 번만 더 우리 설아랑 기우한테 얼쩡거려봐. 이 정의의 낫이 당신 심장을 종잇장처럼 찢어줄 테니까."
숙자는 그를 처음 보았지만 설아와 기우의 사색이 된 낯빛을 보곤 바로 내주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비임을 주장하며 들이닥쳤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두 아이가 맞았던 상처가 있어 기철도 순순히 물러나는 듯 보였다.
숙자는 아동학대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더는 소유권을 쥐지 못하게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비로소 두 사람을 데려갈 수 있었다.
허나 현실의 벽 때문에 숙자도 두 사람을 다 키울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던 딱한 아이들.
결국 어린 기우를 이민 보내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르완다가 그런 기우를 보며, 꼭 입양하고 싶다는 DM까지 보내왔었다.
처음엔 기우와 계속 연락이 닿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허나 기우가 떠난 후 르완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녀의 재력으로 모든 출처를 끊어놓은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마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설아는 극한 자조가 밀려왔었다.
한동안 대문에 기대어 오지 않을 기우를 바라보던 시절.
동네 사람들 모두 설아를 짠하게 바라봤으니까.
그런 설아의 지독한 고통을 숙자는 늘 함께 해왔다.
아직 부모의 나이가 그리울 아이를 안아주며 엄마를 대신하기도 했다.
"설아야. 그곳에서 니 동생 더 웃고, 행복한 일만 있을 거야. 그러니 그때를 위해 지금은 좀 덜 아프자... 먼 훗날, 우리 설아 완전히 크면... 그때 우리 기우 찾아오자. 꼭."
숙자의 품이 어찌나 포근했던지 세 사람의 따스함 때문에 설아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상실한 아이의 깊은 골이 다시 세상을 향해 나올 수 있게 민혜와 같은 마음으로 애썼다.
***[8]
"설아야."
설아는 모처럼 그 꿈을 꿨다.
절규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였다.
기억속에서 잊히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 시기에 한 번씩 나타나는 사내였음으로.
다시 잠을 자기엔 쉽지 않을듯해 마당을 밟았다.
고즈넉한 한옥의 분위기는 복잡한 상념을 떨치기에 적합했다.
가족의 쉼터로 말용이 제작한 나무 평상이 눈에 띄었다.
설아는 그곳에 앉아 을씨년스로운 새벽을 맞고있었다.
모질게 차였음에도 가슴 한편엔 늘 장현이 켜켜이 담겨있었다.
아픈 추억도 설아에겐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조건 없이 자신을 챙겨주었다.
그 상냥한 마음이 가장 큰 이유였을 테다.
세월이 흐르면 그 아픈 상처와 함께 흩뿌려지는 연기처럼 사라질 줄 알았다.
아직도 가슴에 담아두는 자신이 때때로 바보 같아 보였지만.
아니 바보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벌써 좋은 인연 만나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같은건 까맣게 잊은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꿈속에서, 현실에서, 늘 발목을 잡듯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다시 볼수있을까."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다.
나를 찬 주제에, 왜 아직도 자꾸 꿈속에 나타나는거냐고.
왜, 헤어질때 그리 슬픈 얼굴을 한거냐고.
집에 있을때도, 회사에 있을때도, 그가 꿈에 나타나면 설아 또한 그랬다.
지금의 현실이, 그 과거가, 장현과 함께 자신을 끌어당기는듯 했음으로.
그렇게 출근한 설아가 휴대폰 고리의 토끼인형을 매만지고 있을때였다.
현제의 현실과 함께 그 상념을 깨준 건,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대표 이미진이었다.
정갈하게 펴진 단발머리가 보기 좋았다.
특히나 한쪽 이마를 올린 언발란스한 헤어 역시 건강함을 부각시켜주었다.
올해 44살의 나이가 무색할만큼 동안이였다.
한편으론 인자해보이지만, 또 한편으론 공과사에 있어서는 칼날같은 인상이 돋보였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
"아니에요. 시키실 일 있으세요?"
"견적이 하나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민실장이 다녀와야 될 것 같아서."
설아는 그제서야 미진이 주는 두터운 샘플 자료 목록을 받아들어 살폈다.
일에 집중하는 그 모습에 미진은 살풋 입꼬리를 올렸다.
"여긴 처음 보는 곳이네요? 신규 업체인가 봐요."
"보쌈 보따리 가져오라고는 안 할 테니까, 한번 다녀와봐."
미진은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윙크했다.
"이번에도 잘 할거라고 믿어도 되지?"
"아하하하."
부담 스러운 제스처에 설아는 웃음으로 답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설아가 확인한건 가양산업이라는 간판이었다.
함께 미팅을 가지고 난 후 바로 계약도 따낼수있었다.
그때 일이 좀 쉽게 진행되는 상황을 한번 정도는 더 의심했어야했다.
물론 뒤에 누가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할때였으니.
거대한 상어 아가리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라는 것 역시 알수없었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오더를 부탁한 가양산업에서 한참 진행될 시기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지금. 그날 만나서 여기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잖아요! 아 진짜 말 안 통하네. 자꾸 이런 식이면 잔금 못 치러요."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발음이 온전치 않아 좀 양해해달라고는 했다.
물론 논점을 흐린 부분을 설아는 몇 번이나 지적했다.
해줄수있는 부분과 아닌 부분은 확실히 구분점을 지어줘야했으니까.
상대측도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길래 그 의사를 꺾은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생각조차 못 한 곳에서 억측을 제기한 거다.
설아는 명제를 확실히 했지만 상대는 요지부동이다.
"그때 제가 말씀드렸을 때, 몇 번이나 들으셨잖아요."
"뭘 들어요. 나만 이상한 사람으로 모는 것 같은데, 그때 나 말고 우리 직원들도 다 들은 사실이야. 왜 이래, 이제 와서."
사기꾼이 작정하고 사기 치는 데는 답이 없었다.
게다가 굳이 갑과 을을 논하자면 일을 받은 자신들이었다.
아직 잔금도 치르지 않은 상황인데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다.
미진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방법이 보이지 않자 자조가 가득 밀려왔다.
그날 화진그룹에서의 활약이 스스로의 오만을 키운 것일까.
만약에 가양산업에서 밀린 대금을 받지 못한다면 큰일이다.
화진에서 계약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추진할 만한 자금이 받쳐주지 못할 터였다.
포장마차에서 시작한 조촐한 술자리도 두 사람에게 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미진은 기회를 주고 싶어 만든 거였다.
가양산업이라는 곳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건, 대표로서 본인의 책임도 전혀 없지 않음을 인정하는 말투였다.
주눅든 설아의 마음을 잘 알기도 했음으로.
"참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 그렇지?"
"죄송해요, 대표님.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고개가 꺾일듯 한잔 넘긴 미진은 그 잔을 그대로 설아에게 건넸다.
좋은일도, 슬픈일도, 함께 하자는 의미가 담긴거였다.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미진은 설아가 들을수있을만큼 목소리를냈다.
"아니야. 그딴 업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나도 잘한 건 없는데, 뭘."
미진은 다시 설아에게 초점을 맞췄다.
면목없어 한잔 술조차 눈치를 보는 이 가여운 양에게 필요한 건, 위로라는 걸 알았기에.
"어떡하겠어. 상대 업체 쪽에서 작정하고 계획한 일인데. 휴우, 같이 방법을 한번 찾아보자."
그녀에게 하나 있는 딸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중학교에 들어갈 터였다.
놀이공원도 같이 못 가고, 다른 부모님들처럼 같이 소풍을 가는 것도 못했다.
그리 바쁘게 살아온 인생을 알기에, 설아는 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한잔 술을 꺾으며 보이지 않는 앞날을 걱정하는 미진의 낯빛에서 느껴지는건 절망 같아 보였다.
그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더욱 면목이 없었다.
그리 헤어지고 올라오는 길은 평소보다 멀기만 했다.
왜 늘 이 모양일까.
단지 그냥 잘 하고 싶었을뿐인데.
많은 욕심내는 거 아닌데.
엄마, 기우야. 나는 뭘 해도 안되나봐.
처연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흑색 세단 승용차 안의 남자는 염려 가득 주시했다.
"왜 저렇게 비 맞은 가지처럼 축 늘어져있는 거지. 또 어디 가서 괴롭힘당하는 건가?"
힘없이 늘어진 모습에 장현 역시 가라앉은 눈을 폈다.
요즘 그의 일상은 퇴근 후 그녀의 집밑에서 잠복하는거였다.
아람이 또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서였다.
멀찍이 내려 댄 차 안의 장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내렸다.
한발 한발 설아를 따라가는 그의 심장이 아릿해져왔다.
평소보다 더욱 쳐진 어깨,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 곧 사라질듯 초췌한 등까지.
무엇 때문에 저런 건지 알고 싶었다.
달려가 그 얼굴을 보고, 말하고도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지냈는지.
내가 보고 싶었는지.
끝내 타이밍을 잡지 못한 발걸음이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급해지고 있었다.
여민 문 소리와 함께 사라진 설아를 보며 걱정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허나 살짝 올라간 장현의 신소 만큼은 지는 노을처럼 아름다웠다.
"빵띨이.. 수고했어. 오늘 하루도."
요즘 그의 하루에 낙은 설아가 안전히 귀가하는지를 보는 거였다.
그런데 원래부터 에너자이저처럼 발랄하지는 않았다지만, 좀 전의 그 모습은 영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비서를 통해 알아보았다.
"가양 산업?"
"그렇습니다. 창립한지는 15년 정도 된 업체인데, 대표가 바뀌며 질 안 좋은 직원들이 대거 교체되면서부터 말썽이 빈번하다고 합니다."
작정하고 업체에서 장난을 치고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장현의 눈썹이 살짝 갈매기 모양을 만들었다.
상기된 분노를 대신했다는 의미로도 보였다.
"보기에 어떤가?"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조각같은 턱을 손으로 쓸던 장현의 뜨거운 기류가 상대에게까지 전해졌다.
한비서 역시 조금 긴장한 모습이였다.
"그쪽 대표는?"
"이미진이라고... 건설 인테리어 쪽에서는 나름 정평도 나 있고, 자기 사람 잘 챙기고 평도 괜찮습니다."
미진의 평판이 나쁘지 않음도 그에게는 관심사가 될만했다.
설아가 몸담고 있는 그 환경이 적어도 불행은 아니라는 것에 한 번 더 안심이 돼서였다.
뭔가가 이상함도 바로 감지할수있었다.
왜, 하필 지금 이런일이 생긴걸까.
조금 누그러진 장현의 뇌릿속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했던 뜬금없던 그 말도 그렇고, 집요한 그 성향으로 볼 때도 그럴 거니까.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는 그런 상황이다.
그러니 상대의 의중을 한번 파볼 타이밍이라 판단을내렸다.
그 천년 구렁이 안의 속내는 직접 보고 통찰하는것이 가장 적절해서겠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설아가 관련되있다면 이젠 그의 일이다.
그렇게 대표실 앞에 선 장현은 비서의 안내와 함께 격앙된 눈빛을 펴며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거만하게 두 발을 책상 위로 편 장강.
올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환영했다.
"이야! 니가 먼저 나를 다 찾을 날도 있네. 큭큭, 웬일이냐?"
가증스러운 낯빛은 이미 모든 걸 다 아는 듯 조소마저 일었다.
그런 부분에 크게 감흥이 없던 장현 역시 놓여진 소파에 몸을 누비며 그가 들을 수 있을 만큼의 목소리를 냈다.
시선은 천장을 향한채였다.
"무슨 꿍꿍이지?"
"뭐가?"
"알잖아."
"조금은 뭘 던져줘야 잡든지 하지, 갑자기 쳐들어와선 뜬금없이 뭔 이야기냐."
앉은 자세로 서서히 장현은 그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짙은 갈색 눈동자는 장강에게도 늘 무감각해 보이는 인상이긴했다.
물론 통찰력이 뛰어난 장현을 장강도 잘 알고있었다.
그러니 도발에 당하지 않겠다는듯, 웃는 미소 뒤엔 경계의 레이더를 바짝 세운 상태였다.
오리발을 내미는 장강을 향해 장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았던 걸로 아는데?"
다 알고 왔음을 알면서 어디서 수작이냐.
장현은 눈빛으로 그 여러 말들을 압축시켜 쏘았다.
장강 역시 비소로 답했다.
"하여튼 귀염성 없기는, 그래서 만났냐고 물어봤잖아. 내가."
"그건 니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고, 내가 궁금한 거에 대한 답만 들었으면 좋겠는데."
삐딱한 자세를 올바르게 편 장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한걸음 들려오는 발소리가 숨 쉬는 것조차 들리지 않는 내실을 묵직하게 울렸다.
맞은편에 앉은 장강은 속내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알잖아 너도, 내가 뭘 원하는지."
"그건 모르겠고, 그 음흉한 뱃가죽 안에 뭐가 들었는지 한 번 정도는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나야 당연히 뱃가죽 안에 넣을 먹잇감이 목적이지."
예상한 답안이 사물과 함께 소리가 되어 나왔다.
장강에게도 민설아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컬렉션 중 하나였으니까.
긴장감이 숨을 조여올 만큼의 공간에 장현의 손가락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 움직임이 멈췄을때 장현의 시선은 장강을 향했다.
"가양산업. 그것도 그림의 한 폭인가?"
"뭔 산업, 가장산업? 그게 뭔데? 민설아, 만난 것 때문에 따지러 온거 아녔어?"
늘 장현에게 단련된 장강의 포커페이스가 이번만큼은 꽤 그럴듯했다.
그래서인지 음흉한 그의 속내를 읽어내는게 쉽지는 않았다.
묵직한 장현의 음성이 화살처럼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그 말. 사실이여야 할거야."
물론 장현은 이번 업체의 장난질에 그가 무관하다는것 또한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 서서히 몸을 일으킨 장현이 입구를 향했다.
그 등뒤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장강의 한마디가 화살처럼 돌아왔다.
"잘해봐. 뭔지 몰라도, 기대하고 볼테니까. 큭큭."
저 유치한 도발보다 먼저 바로 잡아야할건 설아의 상황이였다.
저 비열한 놈의 꿍꿍이가 뭔지는 우선 설아부터 살려놓은 다음에 해결할 일이었다.
결국 지금의 장현에게는 방향을 틀 만큼의 열쇠가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나가는 발걸음이 강한 소리를 낸 것 또한 착각이 아니었다.
장강 역시 그제야 비릿한 입꼬리를 올릴 수 있었다.
"크큭, 하여튼 혼자만 잘 나셨지. 아주."
***[9]
장강 역시 오랫동안 설아를 잊지 못했다.
장현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
그 역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포만감이 적지 않은 세월의 발목을 잡았다.
늘 집착이 강했고, 질투도 강했으며, 지는 걸 싫어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런데 급식비도 없어서 쩔쩔매던 그 빌어먹을 가난뱅이가 자신을 거절했다.
용서할 수 없는 거였다.
끼익.
그가 머무는 본가의 서재는 지하에 있었다.
외부와 단절된 패닉룸처럼도 보였다.
거기엔 수많은 사진 컬렉션들이 즐비돼있었다.
헤어진 여자들의 절망 가득한 얼굴이 각각의 표정을 잘 그려내고 있었다.
우는 여인, 절망에 빠진 여인, 분노한 여인.
그리고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까지.
마치 정복한 여자들을 훈장인마냥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넌 모르겠지, 기대해. 우리의 재회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그 끝을 한 번같이 보자고.... 과연 너는 가장 소중한 걸 상실했을 때 어떤 표정이 돼줄까, 웅, 설아야.."
장강은 아직 비어진 하얀 포토용지를 들었다.
짙은 눈빛 사이로 흐르는 건 광기 어린 섬뜩함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니 주인이 너를 담을 날도, 크크큭."
그 눈에 담긴 건 분노처럼도 보였고,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은 쾌락처럼도 보였다.
"그래야 너희들을 헤어지게 만든 보람도 있을 테니까 말이지."
당시 모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먼저 고백한다면, 절대 설아가 거절할리 없을 거란 계산이었다.
처음부터 장현을 물 먹이기 위한 연출이었으니까.
그만한 자신도 있었다.
무엇보다 장현이 반응하던 아이였으니 그에게도 가치가 있었다.
흔쾌히 받아주길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설아는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 뒤뜰로 장강을 불러냈다.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던 장강의 오만함에 종지부를 찍어주기 위함이었다.
"왜? 내가 너 좋다는데 뭐가 문젠데?"
"미안해요. 장강 선배 자존심 한번 살려준 걸로 좋게 끝내주세요. 그게 제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을 받아준 이유에요. 죄송합니다."
내가 배려한 게 아니라 그 아이가 배려한 거였다.
전교 부회장인 자신의 모양세를 생각해준건가.
으드득.
인정할 수 없었다. 장강 역사상 가장 흑역사로 남을 순간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여자에게 차이다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위에 혹여나 누가 있을까 두리번거리던 장강은 다시 설아에게 집중했다.
"난 단순 퍼포먼스가 아니었어. 진짜 민설아 너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설아는 곤란한 낯빛을 들었다.
장강은 혹시 좋아하는 남자가 있나 싶어 되물었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바로 답할 줄은 몰랐지만.
"혹시?"
"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 혼자 짝사랑이긴 하지만."
자신을 당황시킨 몇 안 되는 여자였다.
솔직히 설아의 외형만 놓고 보면 어디 내놔도 창피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길게 갈 거란 계산도 있었다.
여자랑 사귀는 건 그에게 있어 늘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받아본 적 없는 충격이었을 거다.
회피 없이 맞은 그 한방이 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분하고 기가 차서 목소리마저 떨렸다.
"너 말이야. 그런 시시한 놈 때문에 누군지 모르겠지만, 날 거절하는 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난 니가 지금까지 못 본 세상을 보여줄 수도 있거든."
학창 시절 장강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를 위세였다.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였다.
허나 이번만은 미세하게 금이 간 눈꼬리만큼은 어찌할 수 없어보였다.
감히 니가 뭔데, 니 까짓게.
급식비도 없어서 물로 배를 채우는 니 까짓게 감히.
여자란 존재는 그의 스펙과 피지컬 앞에 늘 쉬운 존재였다.
한 번씩 튕기는 애들도 있었지만 자존심과 컨셉이라는것도 잘 알았다.
그녀 역시도, 저 하얀 피부, 사랑스러운 눈동자도, 곧 시간의 문제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와 함께 돌아온 건 여전한 소녀의 단호함이었다.
"그 세상이 아무리 화려해도, 제가 좋아하는 상대와 보고 싶어서요."
티 없이 맑은 미소였다.
거짓이라고는 일도 들어가지 않은 말 그대로 완벽한 거절이었다.
니가 못 본 세상이라는 발언에 설아 역시 힘이 좀 들어간 은유처럼도 들렸다.
대체 누구길래, 이처럼 잘난 나를 두고, 누군지 그 터무니없는 상대에 이름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게 누군지 말해줄 수 있을까? 아, 나 그렇게 지저분한 스타일은 아냐. 그냥 그 부러운 놈이 누군지는 알아야 확실히 포기가 될 것 같아서."
망설이던 설아는 그의 각오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물쩡 둘러대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종자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잘 아시는 분이에요."
"잘 알아? 혹시 전교회장? 아니면...."
자신만큼이나 높은 인기라면 그 남자뿐이었다.
허나 예상과는 달리 긍정의 낯꽃이 아닌 설아를 보며 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농구부 주장?"
"......"
학교의 나름 인기 있는 남자들이 다 거론됐지만 그녀의 눈은 긍정을 그려내지 않았다.
장강의 가슴속에 불편한 파동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웬만큼 존재감 있는 이들을 다 거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라면, 그러면서 내가 아는 이라면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그놈은 아니어야 하는데, 아닐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놈에게 뺏겼다면 모를까.
하늘 아래같이 숨 쉬는 것만으로도 싫은 그놈은 아니어야 하니까.
"혹시.... 아니지? 그 정상적이지 못한 녀석은 아닌 거잖아, 그렇지?"
"......"
빗나가길 바랐던 마지막 한방의 화살이 결국 장강의 심장을 제대로 뚫었다.
처음 보았다. 이성에 눈을 뜬 소녀의 분홍빛 볼이 홍조를 띠며 머뭇거리는 걸 말이다.
더 이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두 눈동자에는 선혈의 거미줄마저 자욱할 정도였다.
그 대상을 알자마자 장강은 설아의 여린 두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민설아, 너 제정신이야 지금?! 그놈은 널 못 괴롭혀 안달인 놈이잖아. 빵 심부름에, 숙제 심부름에, 하교 심부름까지... 그런 사이코패스 자식을 좋아하다니. 너 아니지? 다른 놈이라고 말해, 빨리!"
어디 좋아할 사람이 없어서 그 사이코패스 자식인가.
"그놈은 너한테 관심이 일도 없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미친 듯이 흔드는 격정적인 몸부림보다 두려운 건, 야수처럼 변한 그의 광기 어린 눈이었다.
설아는 그런 파탄자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분명히 일깨워 주었다.
"알아요."
"근데도 그놈이 좋다고?"
"네."
더 이상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이라도 좀 길게 하면 꼬리를 잡고 회유든 협박이든 하겠는데, 수문처럼 굳게 닫힌 작은 입은 모든 걸 마친듯 고요했다.
장강 역시 그제서야 이성이 좀 돌아오는 듯 보였다.
꽉 쥔 팔 때문에 여린 설아의 팔이 터질 듯 떨리고 있음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손을 풀고 미안한 기색을 폈다.
"미, 미안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제 가도 되나요?"
흔들림 없는 바이브로 차분히 말하니 더 틈이 안 보였다.
안된다. 이렇게 보내면 언젠간 장현과 합을 이룰지 모른다.
그놈은 절대로 행복하면 안 된다.
내가 보이는 곳에서 늘 그늘 아래에서 살아야 한다.
병자 취급을 받으며 평생 음지에서 손가락질 받아야 한다.
게다가 나를 거절하는 여자가 그와 함께라니, 차라리 여기서 시신을 만들지언정 절대 허락할 수 없다.
결국 마음이 없는 설아를 붙잡은 그는 구차한 부탁을 이어갔다.
"하아, 그래. 니 마음 잘 알았어. 대신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들어주면 두 번 다시 귀찮게 안 할게."
"뭔가요."
숨 쉬듯 연 설아의 답변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보이스였다.
그래도 지금뿐이다.
장현과 설아를 갈라놓기 위해선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차릴 때가 아니었다.
뭐가 됐든 장강은 장현과 같이 양분하고 싶지 않았다.
내 허벅지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준 그놈은 평생 자신의 앞에서 죽어지내야 하니까.
장강은 무게를 잡고 처연한 태도로 돌변해야 했다.
광기 어린 조금 전과는 상반되는 호소 어린 음성이었다.
"내 주위에 있는 애들은 그날 내가 너한테 했던 고백 때문에 사귀는 줄로 다 안다. 그러니 잠시만 그런 척 좀 해줘. 그 뒤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 만약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안다면 니 남은 학교생활에도 지장이 갈 거야."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왜 좋아하지도 않는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남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런 눈을 들고 있는 설아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장강은 참아야 했다.
사람 좋은 두 얼굴을 준비해야 할 타이밍이었기에.
"너는 모르겠지만 현이는 아직 사랑에 대한 감정을 잘못느껴. 소문 들어 알겠지만 잠재적 사이코패스라서 니가 많이 힘들어질 수도 있어. 사실 내게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지만, 니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내가 꼭 밀어주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 내 자존심 한 번만 살려주면, 너랑 나 좋게 갈 수 있지 않겠어? 모르잖아. 혹시 또 먼 훗날 가족이 될지도."
가족이라는 말에 처음으로 동요하는 설아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이 그리도 좋은가? 다른 얼굴에선 화기가 치밀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리고 어렵게 승낙을 받았다.
그 언젠가가 돼도 장현만큼은 허락하지 않을 악어의 두 얼굴을 설아는 알 리 없었으니까.
싫은 상대인 만큼 장강은 장현의 성향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에 둔감한 그가 생전 처음으로 감정을 느낀 설아였다.
처음 열고 나온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 뒤를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장현은 제대로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전교에서의 고백 뒤에 이 순간의 진실은 자신과 설아만 아는 거였으니.
장현이 충격으로 일주일째 누워있을 때도 문자를 보냈다.
속옷만 입고 있는 교묘히 얼굴만 가린 여학생의 사진을.
"그게 왜 너한테 갔냐. sory ~ 무시해라. 넌 뭐 이런 거 신경도 안 쓰는 성격인 거 알지만 ㅎ 하여튼 없는 애들이 밝히는 건 더 해요, 진짜. 정수기 물을 하도 마셔서 갈증이 커선가 보다 ㅋㅋ"
장현은 그게 설아일 거라 확신했다.
불안한 믿음은 올바른 본질을 파쇄시키기에 충분했음으로.
그렇게 흡족한 그림대로 만들어졌는데 변수가 생겼다.
시간과 공을 들여 천천히 느긋이 갉아먹어야 할 컬렉션이 사라진 거다.
새아빠라는 인간이 학교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렸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너도 여기 있어야 하는데.
밤새 벌어진 그 상황까지 장강이 감시할 수는 없었다.
연기처럼, 안개처럼 사라진 그 대상은 장강 스스로도 다 알리 없는 느껴본 적 없던 상실감을 주었다.
설마, 좋아한 건가, 진심으로.
장현이 무감각의 소유자라면, 장강은 거짓 감정의 소유자였다.
그 많은 여자를 만나도, 안아도, 진심으로 좋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녀들과의 헤어짐 후에도 아프거나,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고작 장난감 하나가 떠난 것뿐인데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왔다.
시간이 지나도 흉부에 내려앉은 가시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설아가 떠난 후 그 역시도 모든 재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장현처럼 미각을 상실한듯한 불쾌한 고통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혀왔다.
그리고, 다시 찾은 거다.
"기대해라, 현아. 못다 한 우리의 후막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불도 꺼진 어두운 서재.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에 음영의 테두리를 만들고 있는 건, 실로 오랜만에 쾌락의 즐거움을 자각한 악의 실루엣이었다.
*******[10]
컨테이너 박스. 낡은 소파와 난로로 보이는 물건 옆에 잠든 사내가 보인다.
빨간색 모자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쓰여있었다.
지지리도 일도 없는지 퍼질러 자는 게 생활인 듯했다.
대자로 누워 잠든 모습이 세상 백수가 따로 없어 보인다.
카르르릉.
전차 지나갈 정도의 코 골음에 사무실까지 진동을 할 정도였다.
그 체급 또한 골리앗을 연상케 할 정도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의 인기척은 또 귀신같이 알아채고 몸을 바짝 세웠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절권도 자세는 좀 그렇지 않나.
그에겐 아직도 훈련장의 향수가 짙었던 모양이다.
"암구호를 대시오."
"일 안 하냐?"
"난 또 누구라고... 하암, 웬일이냐. 누추한 이곳을 다 방문하고, 니가?"
"누추란 건 최소한으로 갖춰놓은 상태에서 해야 되는 말 아닌가."
괜스레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소매를 터는 장현이었다.
상대는 전우이자 친구인 박해병이란다.
그는 냉장고인지 찬장인지를 열더니 캔 커피 하나를 내왔다.
장현은 마시지 않은 채 입꼬리만 올렸다.
"넌 참 이름 하나는 잘 지은 것 같아."
"부럽냐? 내 이름하고 니 재산하고 바꿀까? 도련님."
그깟 이름 얼마든지 주마.
진지함이 가득 묻은 그 얼굴을 보며 장현은 실소를 지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그러니 너 줄 테니까, 바꾸자고. 이 컨테이너도 옵션으로 주마."
"신선한 어필이네."
장현 역시 귀신도 안살 끔찍한 사무실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목적은 하나였음으로.
너스레를 떠는 상대에게 장현은 서류 파일을 던지듯 건넸다.
일감이라는 확신이 든 전우의 낯빛은 안광처럼 밝아졌다.
파일을 열어보니 웬 예쁘장한 아가씨의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 선 보라고?"
"뭔 미친 소리냐."
"이 아가씨는 뭔데, 그럼?"
"니가 구해야 할 세상의 빛이다."
"뭔 빛?"
이해를 못 한 상대를 향해 장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한 번 더 설명할 인내가 본인 안에 있음을 스스로도 놀라야 했다.
시작된 용건에 놀라긴 해병도 마찬가지였다.
다름 아닌 이 녀석이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도 놀라운데.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을 써재낄 정도면 대체 사람이 아닌 AI 인가 싶었다.
다시 설아의 사진을 들어 올린 해병은 알만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이것 봐라."
전우는 고양이처럼 눈을 휘며 말했다.
"히야, 딴 사람도 아니고 니 그 입에서 여자 이야기가 다 나오다니, 내일 다시 입대해야 되는 거 아니냐?"
"헛소리 말고, 니가 할 일은 빛을 다시 세상으로 인도하는 거다. 알아들었냐?"
"그럼 나는 누가 인도해 주는데?"
해병은 노골적인 목마름을 솔직히 표했다.
저 측은한척하는 면상에 돈 대신 발을 밀어주고 싶었지만, 한 번 더 스스로를 삭힌 장현은 흰 봉투를 던지듯 건넸다.
"이제 구원됐지?"
"감사합니다. 주여."
해병은 해부현미경으로 개구리를 보듯 액수를 정확히 들여다봤다.
비로 소야 안정을 찾은 친구는 다시금 우정의 자본주의적 미소를 지으며 기쁨을 표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두둑이 넣었구나. 전우야."
한 번 더 던진 서류 역시 장현이 찾아온 용건이었다.
그동안 한 비서를 통해 기록한 가양산업과 더홈의 계획서였다.
"얼마나 걸리겠어?"
"귀신 잡는 나를 믿어라. 그게 무엇이든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마."
적당히 훑어본 해병은 이미 코어를 찾은 듯 자신감을 표했다.
일어나려는 장현을 눈으로 잡은 친구는 꼭 물어야 할 게 있는 듯 보였다.
"근데 대체 진짜 누구냐?"
"이야기했잖아. 빛이라고."
저 인물에 평생이 돼도 여자를 못 사귈 것이다.
그리 걱정하던 친구의 얼굴은 갑자기 나타나 빛이라고 하니,
어디 일루미나티나 외계인이라도 사귀나 싶은 얼굴을 들어야 했다.
다시 차로 돌아온 장현은 출발하기 전 내키지 않던 다음 플랜을 떠올렸다.
"음. 집 지키는 개가 사나워 보이던데, 이걸 진짜 하는 게 맞는 건가."
내부를 들여다 보기 위해 가장 유력한 프락치는 딱 한 명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 개와 싸울 때가 아니라 회유를 할 시기였을 테지.
얼굴만큼이나 내키지 않은 그는 목적지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마침 표적으로 보이는 이가 하드를 빨며 집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 장현."
집에서 거울을 보며 답지 않게 연습도 했다.
그날보다 더 육중한 검은색 슈트를 입은 그는 간 크게도 아람의 앞에 유리창을 내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간 하늘에 맞게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예상한 대로 아람은 먹던 하드를 얼굴에 던질 기세였다.
장현은 티 없이 맑은 눈을 뜨고 객체를 향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대사를 뱉었다.
사람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은 이게 제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인상이 참 선해 보이는군요."
저 대사를 저리 담담하게 할 수 있다니.
언젠가 길거리에서 말을 걸던 그 남성의 바이브를 기억해 낸 장현이었다.
물론 그다음 말까지 기억한다.
"우린 하나입니다."
목표의 얼굴이 이미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도 기가 막혀 먹던 하드를 던져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묵직한 입을 열어 이 연타를 날렸다.
함축된 소리가 대상을 향해 날아가자, 상대는 결정타를 맞은 듯 굳어갔지만.
"당신은 이 세상이 다 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람은 결국 그 자리에서 하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설아 외에 그 누구에게도 먼저 호감을 비췬 적 없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저세상 텐션으로 시작한 멘트는 그렇게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떨던 정상의 입에서 결론이 나왔다.
해맑은 미소를 띄며.
"당신 또라이지?"
장현 역시 고장 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
추모관은 언제 와도 가슴을 욱하게 만든다.
고요하지만 뭔가 애달은 사람들의 호흡소리에 설아 역시 가슴이 저려왔다.
늘 와도 이곳만큼 상실한 자의 빈자리가 큰 곳은 없을듯싶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도, 떠난 사람도, 시간이 멈춘듯 했음으로.
경화의 사진은 남아있는 아이를 향해 여전히 인자하기만 했다.
설아는 시린 낯빛을 들어야 했지만.
"거긴 여기보다 좋은가 봐. 늘 웃고 있는 거 보니."
떠난 자는 말이 없었다.
단지 산자보다 더한 완연한 미소만 그득할 뿐이었다.
여전히 떨리는 작은 손이 사진과 가까운 유리면을 쓸었다.
지켜주지 못한 그 자조 섞인 마음에, 눈 시울이 붉어졌다.
죽은 자도, 산자도, 잊지 못할 끔찍한 기억이었다.
설아의 상념 가득한 눈동자가 추억하듯 암전을 일으켰다.
그날. 새벽녘 기우와 설아가 잠이 든 시간이었다.
콰당.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새아빠 기철은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역겨운 알코올 향이 방 안을 가득 매웠다.
"이것들 봐라, 처자고 있네? 하아, x 발. 사람 이 추위에 밖에서 개고생 시켜놓고 돈만 빨아먹는 쓸모없는 것들이, 내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잠이 쳐 오지, 앙?!"
평소보다 더 상기된 눈꼬리와 거친 어투였다.
아직 눈꺼풀이 다 떠지지도 않은 기우는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어야 했다.
설아는 본능적으로 기우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타이르려 애썼다.
"죄송해요. 늦게까지 안 들어오시길래 잠시 눈 좀 붙인다는 게.."
"이불까지 펴놓고 아주 퍼질러 자드만 잠시 눈을 붙여? 하아, 이게 이젠 거짓말까지 처하고 자빠졌네."
기철은 으르렁 되며 늑대의 표독스러운 살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불을 위협적으로 발로 차며 적의를 드러내곤 설아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힘없는 설아는 방바닥에 무릎을 질질 끌려가야 했다.
저항하려 하자 급기야 작은 정수리에 몇 차례의 손찌검을 시작했다.
"꺄악! 놔주세요."
"거짓말하는 년은 혼이 좀 나야지. 안 그래?"
"우리 누나 때리지 마세요. 으헝헝헝."
어린 손으로 기철의 바짓가랑이 끝을 잡고 막던 기우.
그는 눈이 돌아 결국 두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오호라, 둘이 한패다, 이거지? 감히 먹여주고 재워주는 은덕도 모르고 날 깔봐?"
설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던 기철은 바짓단을 잡은 기우를 발로 차 농으로 처박아버렸다.
"아악! 기우야!."
기우는 힘없이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설아는 그 와중에도 동생 염려 때문인지 가슴팍을 세게 밀치며 달려가 생사부터 확인했다.
"기우야, 기우야! 정신 차려."
"우웅, 누나아아... 괜찮아?"
그 짠한 모습에 결국 기철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방에 침을 뱉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행히 기우는 큰 찰과상이나 골절은 없는듯했다.
그제야 설아는 안도의 날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도 저 문이 무서웠다.
또 어떤 변덕을 부려 자신들을 괴롭힐지 몰라서였다.
새벽까지도 설아는 어린 기우를 품에 꼭 감싸안으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다음날 다행히 술이 깬 그는 자신의 모리배와 같은 처세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답지 않게 저 자세로 나오기 시작한 거였다.
"어제는 미안했다.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내가 너무 지나쳤구나."
"아니에요."
고개를 숙여오는 이자에게 왜 그랬냐고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겨우 풀어진듯한 그의 변덕이 다시 그런 공포를 연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적어도, 자신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그래야 기우와 함께 다른 삶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는 견뎌야 했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라 믿고 싶었다.
12월의 겨울치곤 날씨부터가 무척 음산했던 날.
한동안 잠잠했던 기준은 그날따라 일찍 집으로 귀가했다.
기우는 일찍 잠이 들었고 설아는 저번 트라우마의 일 때문에 그 후로는 그가 들어올 때까진 먼저 잠에 들지 않았다.
"설아.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니? 이젠 안 그래도 된다니까."
모처럼 인자한 미소를 띠며 그가 들어왔다.
한 손에는 검은색 봉지를 들고 있었고 내용물은 소주 세 병과 과자 두 봉지였다.
설아가 테이블을 차려주자 그는 또 잔도 없이 소주를 나발불기 시작했다.
"크으, 설아야. 이 세상은 말이야, 진짜 엿 같은 거야. 크흐흐."
불길했다. 하지만 그만 마시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본인 스스로가 절제하길 바라야 했다.
두병이 넘어가자 그의 두 동공에 힘이 풀렸고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가시의 독이 조금씩 그 씨앗을 피우고 있었다.
설아는 그날만 생각하면 왼쪽 눈이 더 욱신거렸다.
어쩌면 민혜가 이런 딸의 처참한 몰골까지는 안 보고 간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정갈한 작은 입술이 눈물을 대신 토해낼 만큼 떨려왔다.
설아는 민혜의 유리면에 작은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엄마. 외롭게 해서."
비열한 그의 그림에 가장 피해를 입은 건 민혜였다.
정에 굶주린, 사랑에 굶주린, 그 가여운 운명길에 선혈의 밭을 깔던 악마보다 더 잔인한 인간이었다.
용서할 수 없다.
내 이 한쪽 눈의 운명보다 더한 고통은, 단 하나밖에 없는 엄마와 기우를 갈라놓은 그 끔찍한 화마였음으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몸과 마음이 서로 공명하듯 부딪히는 것만 같다.
엄마도, 기우도 지키지 못했다.
그 한탄스러운 죄책감은 호흡처럼 자신이 달고 살아야 할 죗값이라고 생각했다.
"또 올게."
그리 처연하게 떠난 그림자를 잠시 후 덮는 또 다른 그림자.
민혜를 향해 다가가는 그 소리는 묵직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뵙습니다."
*****[11]
처음 마주하는 민혜의 얼굴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남자였다.
정갈한 정장과 잘 어우러지는 절도 있는 움직임 또한 의젓했다.
왠지 그 어떤 풍랑 속에서도 자신의 딸을 지켜줄 것만 같아 보였다.
추모관 한쪽에 비치된 꽃바구니 사이로 가장 큰 화분을 둔 장현은 유리관 너머의 민혜에게 조의를 표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의 딸은 이제 더 아프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만들 겁니다. 제가."
비록 염치없는 고백이라 할지라도, 장현은 상관없었다.
묵직하게 던진 그 한마디는 맹세의 서약과도 같아서였다.
떠난 자의 빈자리가 외롭지 않도록 한편에 가득 채운 꽃송이들을 보며 조금 더 그곳에서 웃길 바랬다.
"편히 지켜봐 주십시오."
왜인지 장현의 주위로 한적한 기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민혜의 답변일지도 몰라 그는 한참을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연한 두 눈동자에 다시한번 각오를 새겼다.
그가 왔음을 알 리 없던 설아는 출구에 들어서자 난감한 낯빛을 띄웠다.
세차게 퍼붓는 비 때문이었다.
올 때와는 다른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앞으로를 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올 때는 택시를 타고 왔지만 갈 땐 조금 멀어도 걸어갈 각오를 했었다.
근데 이 장대비는 쉽게도, 금방도,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은 카카오택시니 뭐니 잘도 부르는데, 설아는 그런 것을 잘 해보지 않아 더 했다.
쏴아아아.
발 앞으로 떨어지는 대찬 비 앞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그냥 맞고 가기엔 정류장이 너무 먼데."
야속한 하늘을 보며 심란한 눈꼬리를 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방향으로 거짓말처럼 택시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자신이 부른 게 아님을 알면서도, 간절한 마음이 컸나 보다.
자꾸 눈이 그리로 가는 걸 보니.
그리 현실을 등지고 있을 때였다.
택시는 꼭 백마 탄 기사처럼 발 앞에 정확히 정차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물을 가르며 올라간 유리창 속의 남자는 형형한 눈빛을 들었다.
설아 역시 꼭 마법이라도 걸린 듯 커다란 두 눈을 키웠다.
"민설아씨 맞으시죠?"
"어? ... 아네."
"타세요. 빨리."
"저는 부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여길 알고."
"천사를 잘 모셔다 달라고 어떤 분이 부탁했거든요."
영문 모를 소리였다.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듯한 기분이었다.
대체 누가.
환한 기사의 인상에서 이 차는 처음부터 자신이 주인임이 자명해 보였다.
작은 발 한 짝을 올리자 살짝 복숭아뼈에 빗물이 튀었다.
떠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장현 역시 택시의 뒤를 따랐다.
좁은 도로여서 그의 존재를 설아는 느끼지 못할 터였다.
세차게 내리는 빗길에 승용차 세대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장현은 행여나 무슨 사고라도 생길까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진짜 백마 탄 기사였다.
"빵띨이, 너무 많이 울지 말고."
뒷모습만으로도 설아의 현제 심경을 안다는 듯 읊조렸다.
무딘 감정만큼이나 미동 없는 형색이었지만, 더없이 따스한 눈빛이었다.
다 표현하지 못한 한 여자를 향한 절실함만큼은 이미 금안과도 같았다.
"너무 아프지 말고."
넌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네 고통은 내가 나눌 거니까, 그러니까, 도착할 때까지 좋은 꿈 꾸길.
사람은 늘 믿음과 진심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다.
때론 치부를 드러냄이 자신을 나약하게, 창피하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게 만들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상황을 허락해 준 하늘과 조력자인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게 나입니다."
그날 모든 정황을 설아도 아닌 친구에게 토로했다.
아람 역시 말투에서 느껴지는 그 떨림이 굳이 많은 걸 예시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처연했다.
그래서 더 많이 물어보지 않아도, 지금 이 남자에게 설아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 같은 병신의 심장은 여전히 그때를 살아갑니다. 그러니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듣는 그녀도 바보가 아니다.
때때로 상념에 젖어든 다 들여다볼 수 없는 친구의 수심 깊은 얼굴이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그 인물에 남자 하나 없는 스토리가 자신으로서도 안타까웠을거다.
묵묵히 듣고 있던 아람의 입술이 수문처럼 서서히 열렸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두 사람 모두 차안 앞 유리에 비친 전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무게감인지 잘 알고 있던 장현이었다.
그래서 눈으로 끄덕임을 대신했고, 상대는 명제를 확실히 했다.
"지금 본인의 그 미련은 그때를 풀지 못한 시간에 있는 건가요. 아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친구에게 있는 건가요.
라고 말하는 어투에서 아람이 듣고 싶어 하는 질문이 명백히 잘 드러나있었다.
본질을 뚫는듯한 한마디에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어갔다.
"시간은 내게 늘 큰 의미를 주지 않습니다. 이러고 있는 지금조차도."
대답이 되었는지 밝아진 상대의 낯빛이 쇼윈도를 통해 투영하게 살짝 비쳤다.
"다음 주가 돌아오는 설아 어머니 기일이에요. 같이 갈 수는 없겠지만 어렵게 잡은 상황을 어찌할지는 그쪽의 몫일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알 수 있었던 거다.
그때는 네가 마신 정수기 물에 양보다 더 아픈 게 다른 곳에 있는 줄 몰랐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황무지 속에서도 늘 웃고 있는 너.
그런 네 안의 세계가 그렇게 썩어있는지 몰랐다.
웃고있는 그 얼굴이 실은 울고 있는거라는걸.
하나는 약속하겠다.
앞으로 다시는 같은 상황에서, 아니 이 땅이 그 큰 입을 벌리고 너를 삼켜내려 해도 내가 막아줄 거라는걸.
나를 다 걸어서라도.
뒤를 따라가는 이 길이, 이 하루가, 지금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길길 바라는 못난 남자의 맹세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하늘은 대차게도 퍼붓는 비 속에서 두 사람을 지켜주는듯했다.
*****
"우리 한잔할까?"
뜬금없는 아람의 한잔소리에 듣고 있던 숙자까지 가세했다.
무슨 날인지 아니까, 빈 그 마음이 좀 덜 외롭길 바란 두 여자의 배려였다.
숙자가 먼저 운을 뗐다.
"내가 술 고픈 건 또 어떻게 알고, 딸. 어여 예쁘게 세팅 좀 해봐."
"이럴 때만 딸 취급이지."
아람의 입이 샐쭉 나온 걸 본 설아가 살풋 웃었다.
숙자는 그런 아람을 달래며 먹을 걸로 포섭했다.
"하여튼 속은 좁아서. 그래. 내가 안주는 니가 좋아하는 동태탕으로 만들어올게. 됐지?"
"엄마, 사랑해."
자본주의적 숙자의 미소와 아람의 것이 닮아있음을 본 설아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생각했다.
이 자리에 말용만 있으면 완벽했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쉬운 어투가 묻은 설아의 눈이 숙자를 향했다.
"아저씨는요?"
"다음 주에나 오겠지."
세 식구를 위해 이번엔 제주도로 공사를 떠난 말용이였다.
자신의 팀을 꾸려 독립을 한지도 벌써 이십 년 정도 돼간다.
건설 쪽에선 꽤 관록이 쌓인 베테랑인 만큼 일당도 꽤 쏠쏠했다.
단지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여느 가장들처럼 일찍 일찍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거였다.
말용이 빠진 채 세 모녀의 술자리 파티가 그리 시작됐다.
탕 안에서 몸이라도 풀듯, 잘 고인 빛깔의 동태가 기가 막혔다.
설아와 아람은 그 찬연한 비주얼에 금방이라도 통째로 삼킬 만큼의 입꼬리를 들었다.
도란도란 서로의 속내를 이야기하며 누구보다 가족적인 그들이었다.
"우리 설아.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에헤이, 또 이 아줌마 취했네, 취했어."
한잔 술에 눈이 좀 풀린 숙자는 설아부터 챙겼다.
아람은 타박을 일삼았고 설아는 해사한 미소로 답했다.
"남의 딸은 조용하고, 딸꾹, 설아야. 엄마가 니 옆에 있다는 거 알지?"
"그럼요. 엄마."
흔히 하는 입발림이 아니었다.
숙자에게 있어 설아라는 존재는 오래전 잃어버린 동생의 소산과도 같았다.
그건 설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갈 데 없는 자신을 학창 시절부터 쓴소리 한번 없이 받아준 그녀였다.
다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설아의 가슴속에 있는 건 또 하나의 민혜였다.
소주 두병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먼저 꺼내볼 수 없는 그 외로움을 빨리 읽은 숙자는 설아의 눈을 맞추며 대신 울분을 토했다.
"우리 기우 잘 있겠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 내 친구 심란해지게."
눈치 챙기라는 듯 아람이 노려봤다.
숙자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설아의 아픔을 대신하듯 오열했다.
"넌 몰라. 지금 설아의 가슴이 얼마나 모든 걸 참고 있는지, 나라도 한 번씩 꺼내줘야 우리 딸도 숨을 쉬지. 안 그러냐, 설아야?"
"맞아요. 잘 있을 거라 그렇게 믿으려고요. 엄마 말대로 저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돈 많이 벌어서, 좀 더 성공해서, 반드시 우리 기우 데려올 거니까요."
늘 따뜻했던 숙자의 손이 여린 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설아의 가슴이 언제나 울컥해지는 모정이 그득한 온기였다.
"그래, 그거면 돼. 그때 다 보여주자. 우리 기우 만나면, 우리 설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다 보여주자."
결국 설아의 한쪽 눈을 쓸던 숙자는 눈물이 터졌다.
잘 보이지 않는 그 예쁜 눈을 볼 때마다, 짐승보다 못한 객체가 떠올라 더욱 분해서였다.
"그 x 같은 인간. 이 가엾은 것에게 어찌 그리 마지막까지 몹쓸 짓을 하고 갔누."
왼쪽 설아의 눈은 기철의 흔적이었다.
망막이 손상될 만큼의 폭력은 아니었다.
허나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맞은 한방이 결국 조금씩 설아의 시력을 멀게 했다.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른쪽과 왼쪽의 시력을 비교하기엔 정상과 비정상임이 명확하게 나뉠 만큼의 차이가 나서였다.
설아가 기우를 데리고 도망친 그 다음 날이었다.
기철은 학교로 쳐들어가 설아의 주변 이들을 뒤졌다.
그리고 아람의 주소를 알아낼수있었다.
문부터 위협적으로 차고 들어온 그는 술도 한잔했는지, 두 동공이 풀려있었다.
위협적인 광기 어린 눈 또한 여전했다.
하필 말용이 없을 때라 세 여자는 더욱 난감한 상황이었다.
겁박하며 윽박지르는 그 모습이 예전 트라우마를 일게 할 만큼 무서웠다.
"데리고 나오라고, 내 새끼들. 확 다 엎어버리기 전에!"
"무슨 당신 새끼들이야. 썩 안 꺼지면 그 낯짝 진짜 가만 안 둬?!"
숙자는 설아의 여린 어깨를 힘껏 붙잡았다.
내가 있으니까, 넌 혼자가 아니니까. 꼭 그런 마음이 느껴질 만큼 든든했다.
조소를 가득 띄우며 기철은 비아냥댔다.
"아이고 무서워라. 여편네가 뭔 성질이 이렇게 지랄맞아. 내 새끼들 데려가겠다는데, 뭐가 잘못됐냐고."
"오냐, 그래. 내 안 그래도 한 번만 보여라, 그러고 있었는데 잘 됐다. 여기 잠깐만 기다렷!"
기철은 숙자가 잠시 사라지자 설아의 팔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12]
"이리 와. 이 x아. 기우 너도 이리 안 와?!"
"놔요! 이거."
잡아끄는 기철의 손목을 설아는 세차게 뿌리쳤다.
"집에 가야지 왜 여기 있어, 니가. 아빠랑 가서 마저 못다 한 이야기도 좀 해야지."
"당신 같은 인간이랑은 절대로 같이 안 살아."
다시 격렬하게 설아를 잡아끄는 기철이었다.
기우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겁도 없이 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우리 누나 놔줘. 이 못된 인간아!"
"크흐흐, 놔주지. 집에 가서 말이야. 너도 이리 와 이 xx야."
기철은 이번엔 기우의 작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채 흔들었다.
설아는 그의 억센 팔을 움켜잡으며 떨어트려놓으려 힘썼다.
"내 동생 놔줘요!"
"안 놔, 이거?!"
결국 그걸 저지하던 설아가 기철의 팔꿈치에 왼쪽 눈을 강하게 맞았다.
"설아야!"
아람이 어깨로 밀어 기철을 떨어트렸다.
이미 왼쪽 눈이 크게 부은 설아는 쓰러져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기우를 보며 설아는 한쪽 눈으로 웃으며 안심시켜주었다.
"누나아! 엉엉엉."
"괜찮아, 기우야. 누나 괜찮아."
아람이 설아와 기우를 안으며 무섭게 그를 노려봤다.
"이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
숙자는 창고에서 선득히 잘 갈린 낫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휘두르며 위협을 시작했다.
기철 역시 번뜩이는 연장에 술이 다 깨는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진짜."
"왜 또 니 몸은 걱정되고? 살면서 너처럼 끔찍한 인간은 진짜 처음이다. 정말."
"난 애들 아빠야. 당신이 뭔데, 뭔 권리로 이러는 거야, 지금?!
"당신이 짐승 x 키지, 무슨 아빠야! 한 번만 더 우리 설아랑 기우한테 얼쩡거려봐. 이 정의의 낫이 당신 심장을 종잇장처럼 찢어줄 테니까."
다행히 기철은 그날 이후로 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늘 그랬다.
이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을 그리했다고, 상념 가득했던 숙자의 눈에선 또 한 번 주책없는 눈물이 터졌다.
누가 혈육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울어주겠는가.
설아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태어나 한번 만나기 힘든 엄마를 두 번이나 만났으니까.
그러다 잠이 든 숙자를 침대에 눕히고 나와 두 사람은 마저 술자리를 이었다.
설아는 왠지 홀짝 홀짝 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아람의 눈초리가 평소 같지 않아 의아했다.
"뭐 할 말 있어?"
"아니야. 이야! 여기 소주가 진짜 고소하네."
음.
"흠."
"뭐, 무어가? 나 잘못한 거 없어."
진실의 방으로.
역시 당황하는 저 면상을 보니 뭔가 있다.
설아는 쓸데없는 곳에서 예민한 촉이 곤두서고 있었다.
허나 내키는 일이라면 아람은 진즉에 말했을거다.
그러니 괜히 곤란하게 채근하는 건 아닌듯해 다시 한 잔을 꺾을 때였다.
"저기, 말이야. 설아야."
"웅?"
"너는 뭐 첫사랑 같은 거 없었어?"
"캑캑."
설아는 소주가 사레에 걸린 듯 기침을 해댔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 건데?"
"웅? 아 그냥, 비도 오고, 뭐 그렇잖아."
비 오면 첫사랑 생각이 나야 돼.
물을 축이며 잠재운 설아는 생선 몸통이 빠진듯한 말을 이해하기가 좀 힘든 눈을 폈다.
아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학교까지 나와 여기저기 모델 면접을 들이밀어도 얼굴 때문에 떨어지는 자신이었다.
당연히 용돈 달라는 말 역시 숙자에게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 나타난 호객님께서 부탁하신 지령이 떠오른 거다.
"혹시 지금 설아가 저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만반의 준비를 하고 플랜을 짜 눈앞에 나타날 생각이었으니까.
남자친구라도 있으면 끝장이지만 다행히 조력자는 그건 절대 아니라 했다.
장현은 만약에 혹시라도 저 혼자 그럴까 봐서, 답지 않게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람에게 부탁을 한 거다.
현제 어떤 상태고 주위에 누가 있는지.
그런 두 사람의 그림을 알 리 없는 설아는 쓴 소주를 다시 목으로 넘겼다.
왠지 눈빛이 묘하게 일렁이기 시작한 그녀는 고백 비슷한 옛 추억을 곱씹었다.
"있었지. 후후. 뭐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긴 했지만."
산지에서 광활한 미네랄을 캔 듯 아람의 낯빛이 한층 밝아졌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도 좋아해? 아니 사랑해? 만나면 결혼할 생각이야?"
설아는 갑자기 무서워진 친구의 광기 어린 눈빛에 부담이 더해졌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결혼이야.
별로 돈 댈만한 정보가 없음에 잠시 맥이 빠져 아람은 턱을 괴고 있었다.
그러다 민어도, 방어도, 아닌 대어가 상대의 입에서 분출됐다.
"그래도...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긴 해. 어떻게 지내는지."
그래 그거야.
그게 내가 원하는 말이었어, 친구야.
조력자의 돈탐은 기의 덩어리가 되서 장현을 향해 매섭게도 날아갔다.
"바람도 안 부는데 왜 이렇게 추운 거지?"
역시 한 남자는 감이 남달랐다.
*****
AI 및 VR 산업혁명이 주는 신세계의 시장이 바쁘게 설자리를 증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 신축 아파트에 설치된 가상 3D TV 등은 국내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불러왔다.
이번에 설계될 화진그룹의 야심작인 아파트 역시 그러했다.
이미 지니를 통한 AI 시스템은 많은 주택단지에 정평이 나 있었을거다.
그러니 보다 좀 더 21세기에 걸맞은 그런 아파트를 중점으로 설계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기존 인테리어 업체 역시 이번 계약을 끝으로 만료한다는 공고가 뜬 상태였다.
당연히 화진그룹과의 연을 맺고 싶은 경쟁 업체들이 주를 이룰 것이다.
물론 처음 장강이 직접 러브콜을 해올때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설아가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된 후 그린 그림이였음을, 미진은 추호도 몰랐을테니.
화진그룹과의 컨택이 성공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경우, 지금으로선 자금 확보만이 살길이였다.
가양산업과의 싸움이 길어질 우려도 있어서다.
기운내야지.
설아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했다.
지금은 확정되지 않은 앞날을 걱정하기보단 그게 최선일 것 같아서였다.
입구를 들어오는 미진의 낯빛이 영 시원치가 않았다.
영업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후우, 민실장. 나 커피 한 잔만 좀 부탁하자."
"괜찮으세요? 얼굴이 수척하세요."
설아는 그런 미진을 염려하며 목소리를 냈다.
"그래? 우리 민실장이 너무 예뻐서 내가 기가 빨린 모양이지."
미진은 일부러 더 능글거렸다.
아직도 설아가 주눅 들어있을까 봐서였다.
본인 혼자만 죄인인 양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미진의 마음도 영 편치 않았겠지.
"우리 저녁에 한잔하까. 둘이서?"
미진은 한잔하자는 듯 목을 꺾으며 제스처를 취했다.
"좋아요."
자축이나 할 상황은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가슴속 피로함 또한 때론 풀어주는 것이 오히려 능률에 도움이 될 때도 있을 거였다.
그리 의기투합한 자리가 좀 성과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저번보다는 좀 더 가벼운 걸음으로 헤어질 수 있었으니까.
설아는 조금 빨갛게 상기된 볼을 만지며 싸늘한 바람을 뚫고 나아갈 때였다.
"뭐지?"
눈에 들어온 건 아람이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거였다.
키가 전봇대처럼 큰 남잔 태평양 같은 등으로 우뚝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아람이 돈 봉투를 건네주고 있는 것이다.
경악한 설아는 미처 사고를 정리하기도 전에 외쳤다.
"아람아!"
자신의 기억으론 친구가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며칠 전이 생각나자 더 그런 염려가 그득했을거다.
혹시 협박이라도 당하나 싶었을 테니까.
그런데 오히려 굳은 듯 당황함으로 물든 건 여자 쪽이었다.
꼭 도둑질하다 들킨 도둑고양이의 눈을 들고 있어서였다.
천천히 다가가는 설아.
기철 이후로 낯선 남자는 모두 의심부터 들었다.
남자는 그녀가 다가올수록 더 얼굴을 숨기는 모양세였다.
그래서인지 그 수상한 등을 향해 절로 앙칼진 음성이 나갔다.
"누구세요? 제 친구에게 무슨 볼일이신 거죠?"
설아와 미진이 의기 투합을 하던 시간이었다.
한쪽에서는 정당한 거래가 오가고 있었다.
아니 정당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뒤가 구린 그런 대화였다.
차 안에서 젊은 남녀가 그러고 있는 것도 좀 그래서 아람이 장현을 차 안에서 끄집어냈다.
"나오세요. 뭐 잠깐인데 어때요. 설아 오늘 회사 대표님이랑 한잔한다고 했으니까, 늦을 거예요."
육중한 장현의 구둣발이 지면에 닿았다.
늘 여상한 얼굴인지라 따로 파동이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노을빛이 역광을 지고 서 있는 모습조차 금안처럼 광채가 흘렀을 뿐이다.
"이 시간에 불러낸 걸 보니, 뭐 대단한 거라도 건진 모양이지?"
"후후,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 대단한 걸 넘어서라고 봐도 될지도."
늘 차분한 장현의 두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저 집 지키는 개가 대체 뭘 물어왔길래 이리 자신만만할까.
꼭 정부 기밀이라도 알아온 듯 흥분한 상대 앞에서 장현은 목울대로 침음성을 삼켜야 했다.
그리 본론을 꺼내는 아람의 안광은 힘이 있어 보였다.
"설아가 댁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습니까?"
설마, 사랑한다고? 아니 그건 이상한 여잔 거지.
못 본 지 벌써 수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아예 근거가 없지 않은 그 기대가 반은 현실임을 알리 없었다.
단지 저 요란한 입에서 무슨 소리가 흘러나올지 알 수 없어서 속은 좀 탔다.
아람은 명제를 확실히 했다.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표정과 내용이 딴판이었지만.
"다시 만나면 당신을...."
"?"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
"........"
귀싸대기 몇 대 정도는 각오했다.
근데 죽여버린다니, 그토록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축 늘어진 장현의 어깨가 시든 이파리처럼 힘이 없었다.
그걸 본 아람은 설명을 이어갔다.
어제저녁. 두 여자의 술자리가 소주 네 병을 넘어갈 때의 상황이었다.
혀가 꼬부라져 마시멜로우처럼 느른해진 설아는 추억의 대상을 향해 울부짖었다.
"죽여버리꺼야아! 나쁜 자식. 내가 지한테 뭘 그리 잘못했어. 딸꾹. 빵 셔틀에, 하교 셔틀에.. 그것도 모자라서 떠날 때까지 재수 없는 소리로 날 아프게 하고옹. 다시 만나며 늘 꼭 주겨버리꺼야아아!"
설아의 풀린 두 눈엔 서운함이 그득했다.
과연 알코올은 무서운 거였다.
그 순둥한 애가 저렇게나 표독스럽게 변했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돈 될 정보는 없겠다 판단한 아람은 심란한 얼굴로 친구를 눕혔다.
이마를 쓸어 넘기며 그 낯빛엔 미안함도 담아봤다.
"미안하다, 친구야. 우정도 중요하지만 당장에 이 현실을 내가 어찌할 수가 없구나."
감기 들까 염려돼 흉부까지 내려온 이불을 다시 목까지 덮어주고 나갈 때였다.
"..... 싶어."
조용한 방 안에 슬픈 소녀의 메아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 본 아람이 설아의 근처로 다시 이동하고서야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보고 싶다고.... 나쁜 자식아."
장현만 그 시간에 머무른 게 아니었다.
아직도 이를 갈던 소녀의 작은 가슴 역시 그랬다.
*****[13]
"그랬습니까?"
장현의 낯빛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이트 빛깔을 그렸다.
빵띨이.
넌 역시 이상한 여자였구나.
그래, 늘 내 심장을 반응하게 하던 너였다.
이러고 있는 지금도.
오랜 시간을 달려오며 불안했다.
이젠 이미 좋은 남자 만나 사랑하고 있지는 않을까,
시간이라는 애인이 그의 곁에서 설아를 데려간 건 아닐지,
그런데, 여전히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게 그토록 기쁠 수 없었다.
얼음처럼 응고됐던 가슴이, 다시 꿈을 꾸듯 깨어나기 시작했다.
차안 내부로 따스한 기류마저 감돌았다.
장현의 서늘했던 눈이 지금은 가장 행복한 남자의 미소를 띠고 있어서였다.
매일 똑같은 일상. 반복되는 하루.
수백 년을 산 영겁의 생물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 감정.
그런 보이지 않는 흑암 속에서 건져준 건, 언제나 조그마한 소녀의 손이었다.
"바보라서 그래요."
".........."
아람은 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웃음이라곤 있을까 싶은 차디찬 장현의 미소가 바뀌는 걸 봐서였다.
남자가 웃는 게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이런 신소를 지을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라는 의문을 가져야 할 만큼 성영처럼 눈부셨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광채마저 흘렀다.
'우와, 뭐 이런 사람이.'
얼마 전 설아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바람둥이 인가, 난봉꾼인가, 별생각을 다 했다.
친구가 겪은 그 고통이 너무 커서인 걸 알아서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 얼굴을 보며 확신이 일었다.
봄꽃을 닮은 설아의 웃는 얼굴을 지켜 줄, 리시안셔스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각오를.
이 남자 정말 진심이구나.
원래는 돈을 달라고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그 신소를 본 순간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가진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정보를 줘서."
장현이 우측 재킷에 든 묵직한 돈 봉투를 건넬 때였다.
"아, 아니에요, 됐어요."
"원하던 거 아니었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아서요. 여기까지만 받을게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 설아 잘 부탁드려요."
설아가 한 말이 문득 뇌리를 스치면서부터였다.
숙자를 재우고 나온 두 사람은 정겹게 다시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숟가락으로 빨간 동태국물을 뜬 설아는 한입 베어 물며 조금은 씁쓸한 어투를 뱉었다.
"불쌍해. 한편으로는."
"뭐가? 그 재수탱이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를 모르니까."
"너 그런 소리까지 들어놓고, 그래도 편들어주고 싶어?"
답답한 내 친구.
만나기만 해봐라.
니 복수는 내가 확실하게 해주마.
뼛속까지 뜯어먹어주겠다며 결심한 자신이 뭇내 부끄러웠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좀 가엽게도 느껴졌다.
설아가 한 그 말의 의미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설아. 분명히 그쪽한테 마음 있을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쿨한 모습을 보였지만 본인의 현실도 만만치는 않았다.
아람은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기 위해 애써왔다.
지금도 부지런히 넣고 있는 이력서는 한번 가면 소식이 없었다.
그러니 돈 줄이 끊긴 건 그녀에게 좋은 소식일 리 없다.
물론 이젠 그를 돈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그런다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다.
"그럼, 전 그만 들어가 볼게요."
당장 다음 주부터 또 백조 소리를 들어야 해, 씁쓸한 입가를 올리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장현은 긴 팔을 뻗어서 아람의 어깨에 얹듯 건넸다.
"잊은 것 같아서."
"아니, 이러시면 안 돼요. 이제."
어깨에 얹어진 돈 봉투를 다시 돌려주려 아람이 손을 뻗을 때였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네? 그게 무슨."
"전 공짜를 싫어합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정 불편하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받으십시오. 그래야 제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정 없이 올려 둔 돈 봉투인 줄 알았다.
그런 줄 알았는데, 종잇장에서 느껴지는 온기 가득함은 정이 없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읽은 장현의 배려였다.
감정이 없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 보이려고 물질로 접근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 사람, 이 남자. 설아가 오랜 시간 못 잊을만 하구나 라는걸 결국 인정해야 했다.
"아람아!"
그런데 감동할 틈도 없이 위기가 도래했다.
설아는 살벌한 분위기를 띈 채 서서히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누구세요? 제 친구에게 무슨 볼일이신 거죠?"
장현은 설아를 향해 다시 잽싸게 등을 졌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아람을 향해 설아는 채근을 시작했다.
"왜, 제 친구에게 돈을 받아 가시는 거냐고요. 아람아. 너 사채 썼어? 그런 거 아니지?"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왜 사채를 써."
다시 장현의 등을 노려보며 날을 세우는 설아였다.
"그럼 대체 이 상황은 뭔데?"
"아, 그, 그건 말이지. 설아야."
불신 가득한 눈으로 쏘는 그 눈빛에 장현은 등에 칼이라도 꽂힌 듯 선득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릿한 건 설아의 보이스였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인지,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장현의 시린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 그리운 향이 그때의 그 시절을 그대로 닮아있어서, 설아의 냄새가 여전히 체향 과도 같아서, 이 등 뒤로 있는 게 봄꽃을 닮은 그때의 추억이라서.
불러보고 싶었다.
나라고, 장현이라고. 너를 괴롭히던, 미치도록 좋아해 나조차 놓아버린 못난 그때의 나라고,
지금도 내 앞에 있는 네가 꿈처럼 느껴져서, 놓칠까 봐 두렵고 아프다고.
그리고 너무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 고백하는 건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 소년인 거다.
"좋아해서, 너무 좋아해서 그랬습니다."
설아의 당황스러운 말투가 이어졌다.
처음 보는 남자의 등인데, 왜, 낯설지가 않을까.
"네? 그게 무슨?"
"미안하고, 숨조차 쉬기 힘든데, 이리라도 해야 제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이 말이 뭐라고, 널 그리 오래 기다리게 했을까.
2025.07.1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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