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표지
우리의 여행에 필요한 것들
굴러다니는 송황가루
5화무료 5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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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ντίο” 우리는 딱 하나 알고 있는 그리스어를 뱉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기사님의 택시에 무엇을 실어 보냈는지 이제는 안다. 우리는 말 한 마디 없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바쁜 한국인치고 꽤나 오랜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냈다.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 이 시간은 ‘앞으로 잘 부탁해,’ 같은 인사였다. 이곳에서 보낼 시간 동안 기필코 이곳에 녹아들어 즐겨보겠다는 의식이었다. -작품 中

공모전 참여작#현대

우리가 처음 대화의 물꼬를 튼 건 더움이 살살 눈치를 보며 피어오르는 초여름의 점심시간이었다. 수많은 날 중 고작 하루의 꼬임이 평생을 따라다닐 인연이 된 건 우리의 첫 대화 때문이었을까.


"야."

"악!"

"악! 갑자기 소리는 왜 질러?"

"네가 놀랬잖아! 너 뭐야?"

"조용히 좀 해봐. 쟤네가 여기 오면 다 네 탓인 줄 알아."

"뭐라는 거야?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뭐 하는데?"

"알아서 뭐 하게, 경하진. 저리 가라고 했다."


도서관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쌓여있는 책 더미를 책상과 의자 삼아 달팽이 블로그를 작성하는 게 수많은 취미 중 하나였던 나는 그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매우 기분 나빴다. 게다가 방해의 주체가 고작 같은 층 복도를 공유하는, 고작 같은 학원에 다닐 뿐인 경하진이라는 게 더더욱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잘난 애들의 얼굴값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남 탓이 자연스러운 무례함은 한층 강한 확신을 하게 만들었다.


"뭐야, 너 내 이름 알아?"

"응. 그리고 너 시끄러워."


사람이 오면 내 탓이라더니,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은 커녕 도서관이라는 의식조차 없는 듯한 모습은 헛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잠시 후 소란스레 몰려오는 아이들을 보며 경하진을 데리고 갈 애들임을 알 수 있었다.


"경하진! 그림 그려달라니까 여기서 뭐해?"

"하진아 오늘은 뭐 그려줄 거야?"


그림 그리는 애여서 손이 그렇게 예뻤나 싶었다. 애들이 재촉하며 경하진의 팔 양쪽을 하나씩 붙잡고 일으켰고 한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 상황에 경하진에게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마음을 담아 눈짓했다.


'거봐.'


시끌벅적함에서 고요한 내 영역으로 눈을 돌린 내게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아, 넌 왜 소리를 질러서..."


그렇게 경하진은 '얼굴값'에 대한 내 확신을 신념으로 바꾸는 망발을 내뱉은 뒤 사라졌다. 아니 내가 경하진을 노려보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연행하듯 붙잡힌 채 끌려가버린 상태였다.


"하?"


어이없어 짧은 탄식을 내뱉은 게 전부였고 그게 우리의 첫 대화였다. 야, 가 고작인 첫 인사와 같이 건네진 손가락이 살포시 닿았던 곳이 간지러웠다. 뭐라도 묻혀 놓았을까 의심스러워 계속 허리를 비틀어 확인하게 되었다.


그날 밤 온몸에 물감이 묻는 꿈을 꾸었다.



아침, 다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내 얼굴이 얼룩덜룩해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던 나는 질린 눈으로 경하진의 신발장을 째려보고 등교했다. 잘난 경하진의 얼굴값에 재수 없음과 동시에 끈질김이 포함될 줄 알았더라면, 아니 알았어도 결국 도서관에 갔을 것이다.


"야."

"악!"


그래도 놀라진 않았을 텐데. 어제의 요란스런 애들이 설마하니 경하진을 또다시 놓칠 줄은 몰랐다. 꽤나 화려한 미술쟁이가 쨍한 색을 제멋대로 뽐내며 나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휘젓고 있었다.


"오늘도 놀라네? 좀 잘 놀라는 편인가 봐?"

"놀랜 사람한테 참 듣기 싫은 말이다."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올 것 같지는 않은 애가 할 일도 없는지 또 빈손이었다. 자신을 힐긋 보고는 금세 사라지는 시선을 느꼈는지 경하진이 내 팔을 살짝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내 시선을 끌어오고 싶은 것 같았다.


"영어 숙제는 하고 노는 거야?" "


나와 경하진은 같은 영어 학원을 다녔다. 10분 전에는 도착해 늘 두 번째 줄 가운데에서 조금 벗어난 자리에 앉는 나와 달리 종종 지각하는 것을 제하고도 뒷자리에 앉는 경하진을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남이사 숙제를 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야."


물론 숙제는 이미 다 끝냈다. 조금, 베끼긴 했지만.


"아니 뭐, 달팽이를 봐서 그런가 맨날 느리길래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내가 달팽이를 너무 대놓고 화면에 뛰어놨었나 보다. 아침에 달팽이 사진을 찍고 점심시간에 관찰하며 달팽이 시점의 관찰 블로그를 쓰는 게 점심시간의 내 일과였다. 교실에서 쓰면 취미 생활이 공개되니 아무도 오지 않는 도서관 구석에서 혼자 즐기고 있던 취미인데 경하진이 끼어들며 더 이상 나만의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매번 촉박하게 도착해 수업 후 단어 시험을 봐야 했던 경하진과 달리 나는 일찍 와서 다 했으니 여유를 만끽하며 귀가했던 것뿐이다. 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뛰어가야만 탈 수 있는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다. 많이 더운 날이면 근처 문구점에 들어가 구경을 하다가 가끔 취향에 맞는 게 있으면 구매하는 등 소소한 취미를 즐기고는 했다. 경하진은 아무래도 수업 후 바로 나가는 내가 항상 자기랑 같은 버스를 타는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굳이 뛰면서 개미나 달팽이를 밟고 싶지 않아."

"지렁이는 어디 갔어?"


망할 말꼬투리. 치사한 질문을 받은 게 오랜만이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지렁이는 잘 보여서 뛰면서도 피할 수 있어."

"너 당황했지ㅋㅋㅋㅋ"


나도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한 건지 어지러웠다. 그만 대화를 끝내고 잔잔한 순간을 즐기고 싶었던 나는 전날의 망발도 염두에 두고 한 마디로 일축했다.


"무례하네."


햇살을 너무 오래 받은 까닭인지 얼굴이 조금 따가웠다. 난 햇빛에 오래 노출되거나 당황하면 얼굴이 빨개지면 따가움을 느낀다. 당황할 때는 거의 없었지만.


"무례를 참을 만큼의 매력이 있어서 괜찮아."


요즘은 그림을 입으로 그리나, 하는 예술인에게 무례한 생각을 해버렸다. 내 눈앞의 경하진을 제외하고.


"오늘은 애들이 안 데려가?"

"잘 뗴어놓고 왔지."


이름도 모르는 경하진의 친구들을 원망했다. 이렇게 천방지축인 애를 학교에 풀어놓고 단속하지 않으니 나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여기서 뭐하는데?"

"알아서 뭐 할 거냐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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