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미지의 대륙 그곳은 온갖 보물과 유적이 즐비한 세계. 내 부귀영화를 위해 모조리 독식할 생각이다. 겸사겸사 망나니 타이틀도 떼고 돈도 벌고 명예도 얻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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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보다 보면 두근거릴 때가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을 뒤집고 승리하면 그것 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
소설을 보면서 그 두근거림을 느낄 줄은 몰랐다.
망나니 가든 바르카스.
악독한 범죄자다.
멸망이 도래했고 영웅들이 모두 죽었지만 바르카스는 죽지 않았다.
어둠의 시체가 산을 쌓았고 바다가 피로 물들었으나 바르카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인류의 골칫거리였던 그는 인류를 위해 싸웠고 영웅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홀로 모든 적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당시의 어린 내겐 너무 충격적인 서사였다.
악당으로 불렸던 자가 정의를 내세우며 인류를 구하다니.
짜릿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장이 마구 떨렸다.
망나니 가든 바르카스는 정말 개쩐다.
“시발 진짜냐.”
성격이 드럽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
꿈에서 깨어나니 소설 속에 빙의 되어있었고.
가든 바르카스가 되어있었다.
* * *
「개척자로 살아남기」라는 책이 있었다.
판타지 대륙을 개척하고 살아남는 이야기.
내게 글도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소설책이다.
애석하지만 10년 전 일이었다.
[당신은 망나니 가든 바르카스가 되었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그 추억의 속에 빙의 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망나니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홀로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최강.
인류 최악의 범죄자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변모했던 영웅 가든 바르카스였다.
“시발 진짜냐.”
상황이 믿기지 않으나 우선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었다.
끼익
끼익
바닥 판자가 눌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후엔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거울 앞에 보이는 이 놈은 도대체 뭐냐.
내가 상상한 바르카스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돼지가… 바르카스라고?”
설정상으로는 숨만 쉬어도 여자가 꼬이는 장신의 미남이었다.
키가 188cm 정도로 장신은 맞았다. 뒤룩뒤룩해서 비율이 가려졌을 뿐이지.
왕짜에 가슴 근육이 선명하단 묘사가 있으나 이건 지방 덩어리일 뿐이었고.
“으흠…?”
근데 궁상맞게 눈동자에서 기품과 이지가 흘렀다. 산발 된 붉은 머리칼은 햇빛을 머금어 화려했고, 이목구비도 확연히 뚜렷하다.
살만 빼면 굉장한 미남일 거라는 것.
그것이 종합적으로 바르카스라는 증거였다.
그리 확정 지었을 때 문 너머에서 낯선 발자국 소리가 예민하게 들려왔다.
“가든 바르카스님.”
여자의 목소리.
“누구냐.”
‘누구시죠?’라고 고운 말을 하려 했는데 억센 말이 튀어나왔다.
바르카스의 육신이라서 그런가.
철컥
단정히 메이드복을 입은 시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표정을 숨기고 있으나 엄연히 긴장이 역력해 보였다.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나, 미세한 행동들이 드러내는 생각과 감정.
그런 것들이 저절로 꿰어졌다.
바르카스가 보는 세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외, 외람된 말이나… 이젠 정말 외출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지?”
순전히 이유를 물으려 했던 건데 비아냥으로 바뀌어 나왔다.
그것 만은 어찌할 수 없는 듯 하다.
“죄, 죄송합니다….”
“질문에 답을 해야지. 내가 망나니 새끼라 그런 거냐?”
시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온갖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손찌검이 날아올 거라 여기고 있는 거다.
“쯧, 금방 준비할 테니 나가라.”
그 말에 시녀가 놀라듯 눈을 크게 떴다.
되려 당황한 표정.
이 녀석은 드물게 대륙 최악의 범죄자가 될 떡잎이고 나는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떡잎이었다.
섞여선 안 될 기름이나, 세상은 나와 이 놈을 섞어버렸다.
이 뭔 개떡 같은 상황인진 모르나.
바르카스의 족적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바닥부터 날아가면 망나니 바르카스일 뿐이지 내가 아니니까.
“가든 바르카스! 도대체 언제 나올 생각이죠? 또 시녀나 괴롭히고 있는 건가요?”
“엘리나님! 오, 오늘은 아니에요…!”
문 너머에서 엘리나라는 이름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썩 당황스러운 듯 날 바라보았다.
시선을 한눈에 빼앗을 만큼 아름답다.
“아, 아니야…?”
그렇게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그녀는 그저 당황스럽게 바라봤고.
나는 관망하듯 들여다 보았다.
엘리나 아스테리온.
익히 알고 있는 캐릭터다.
최고의 미녀로 정평이 나있는 캐릭터.
“호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따뜻한 갈색 머리카락, 눈발이 휘날리는 하얀 피부, 풍부한 이목구비,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듯한 초록 눈동자.
그것들이 어우러진 한 폭의 미美.
절세 미녀라는 칭호에 손색이 없었다.
“이게 술이 덜 깼나! 시간이 없는데 뭘 멍 때리고 있어! 내 말 안 들려!?”
반말을 하다니.
살인 병기 망나니를 앞에 두고 호쾌하기까지 하다.
내가 꿈꿔온 이상형이었다.
역시 불행이 찾아오면 행운도 찾아오는 법이다.
“짐승도 아니고 사납게 굴 것까진 없지.”
“어쭈! 약혼자한테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
“……뭐?”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 사실 제대로 들었다.
약혼자라고 말했다.
엘리나가 바르카스의 약혼자였어…!?
아니었다.
중반부에 주인공과 이어지는 히로인으로 나오는 캐릭터였다.
중반부에…….
“허어….”
세상에.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스프가 오이 스프였던 것보다 충격적이네.
소설 내 최고 미녀가 망나니의 약혼자였다니.
내가 벙쪄 있는 걸 본 엘리나는 3분 내로 나오라 신신당부하며 방 문을 닫아버렸다.
철컥!
그녀가 사라지니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직 초반부라는 소리네.”
엘리나 덕분에 시간대에 대한 윤곽이 대충 잡혔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은 듯 했다.
곧 있으면 가든 가문이 가든 바르카스에게 절연을 선언해버릴 거기 때문이다.
그게 왜 문제냐.
절연을 선언하면 가문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삶이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약혼자 엘리나도 떠날 거다.
아니지, 엘리나 얘기는 잠시 내려두고….
“가문의 돈으로 날먹할 수 없다는 거잖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인간이었다.
적어도 과열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온 나에 한해선 더더욱 그러했다.
아늑한 집도 잃을 거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없을 거고 팬티도 하나를 돌려 입어야 할 거다.
그 뒤엔 길바닥에 앉아 하늘만 멍하니 보겠지.
원래의 바르카스였다면 치를 떨고 가문을 멸해버릴 일이다.
실제로 그렇게 대륙 최악의 범죄자로 거듭나는 스토리였다.
“음.”
근데 난 바르카스가 아니다.
범죄자는 모르겠고 빠른 시일 내로 알거지는 될 것 같다.
그러니 정말 좋지 않았다….
어떻게 타계하면 좋을까.
26년 인생.
이 정도로 진지하게 고민해본 건 4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다.
부우우웅!
대뜸 하늘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머릿속 깊이 사장되어 있던 설정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곧장 창가로 향해 커튼을 확 걷어버렸다. 그러자 거대한 배가 여러 대 보였다.
항구라서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있어서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지평선 위의 매우 푸른 세상.
구름 몇 점 떠 있는 하늘에 날고 있었다.
배의 형태를 하였으나 돛이 없었고 바람이 잔잔하나 그것은 바람의 도움 없이도 날 수 있는 것이었다.
2025.09.27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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