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낙하산, 재벌 3세, 망나니 허지민. 500년 간의 세월을 넘어 현대로 돌아오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홀로 살 때는 이것이 웃기게만 느껴졌거늘.
아무래도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는 것 같다.
“스승님.”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골방의 안.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여성이 말했다.
말해 뭐하랴. 기다란 백발을 지닌 채 이를 악 깨문 그녀는 내 제자였다. 그것도 200년간 함께해온 진전 제자라고나 할까.
얼굴을 구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돌아가아야만 하시겠습니까?”
“그래, 몇 번이고 말했잖느냐. 설아, 나는 이만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다.”
청설(靑雪). 나는 간단하게 설이라 부르는 그녀가 이리도 화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본래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
내가 본래의 세계, 즉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탓이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돌아갈 필요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녀는 호소했다. 자신은 내가 없다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며. 이미 청출어람을 이룬 지 오래인 주제에 참 우스웠다.
설핏 입꼬리를 올리며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그래, 그때 차만 잘 끌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떠올려보면 별거 아닌 계기였다. 아니, 우연이라 함이 올바르려나.
가벼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설마 누군 알았겠느냐, 도로 한복판에 집채만 한 게이트가 열릴 줄은.
징조도 없이 생겨난 게이트 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 선협 세계 속에 떨어져 있더라.
“하하.”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보아도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이미 시간은 흐를 대로 흘렀고, 나는 수백 년 산 노괴가 되어버린 것을.
자고로 과거는 바꿀 수 없는 법이다.
‘그래도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이젠 집에 돌아가고 싶구나.’
수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향수병이 가슴을 좀먹었다.
이곳에 와서 참 다양한 연을 맺었다. 또 다양한 추억을 쌓았다.
그럼에도 향수라는 이름의 독은 전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지라.
“자그마치 500년이다. 물론 수선자에게 있어 500년이란 찰나 같은 시간이나 나에게는 너무나 길고 긴 여정이었어.”
“스승님.”
“나는 슬슬 쉬고 싶다.”
쉬고 싶었다. 이젠 모습조차 떠오르지 않는 가족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부글부글 끓는 연단로 안에서 정제된 환(環)을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깔을 지닌 그것을 손에 쥔 나는 설이에게 고개를 옮겼다.
“….”
“꽤 오래전부터 이야기했잖아. 이제 작별할 시간이 온 거야.”
나는 5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여러 재주를 익혔다.
그 중에서도 유독 뛰어났던 것이 이 연단술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세간에선 나를 ‘절대약선(絶對藥仙)’이라 부르더라.
처음에는 충년이나 지을 법한 별호라 결사 부정했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뭐, 이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고.
방금 내가 한 것은 여러 재주 중 하나인 연단술이라 하는 것이다.
‘재주라 하기도 뭣하지. 이런 건 수선의 길을 걷는 자에게 있어 기본기나 다름없으니까.’
아무튼.
100년 정도의 기간을 들여 나는 드디어 개발해 냈다.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단약을.
“이 약을 먹는다면 나는 언제든지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쌓은 인연 또한 나에게는 소중해.”
“그렇다면.”
입을 벙긋하길 반복하던 설이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마지막으로, 스승께 작별을 하게 해주소서.”
나는 긍정의 의미로 빙그레 웃었다.
말없이 이를 바라보던 설이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흔히들 말하는 구배지례를 하려는 것이다.
제자의 이마가 땅을 찧을 때마다 코끝이 찡해졌다. 500년을 살았다고 한들 감정이 생생히 살아있던 탓일까.
쿵, 쿵, 쿵….
기어코 아홉 번째 절이 마쳐졌을 때, 나는 드디어 이 길고도 길었던 선협 세상에 작별할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
“단화진인(丹火眞人)이나 미호(迷狐), 백강후(白鋼侯) 누님께도 이야기 전해주거라.”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 나는 손에 든 단약을 삼켰다.
“스승님!”
설이가 무어라 하는 것이 보였으나 내 정신은 이미 고차원을 향해 도야(陶冶)하기 시작한 뒤였다.
이 단약, 그러니까 천지귀환단(天地歸還團)의 원리는 간단했다.
복용한 인간을 정신만 남은 원초의 상태로 되돌려, 인과를 따라 본래 있어야 할 장소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내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 지구.
극한으로 도야(陶冶)한 정신이 차원을 넘어 고향 땅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차원의 격류를 뚫고 이동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단약을 먹는다고 끝이 아니야.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는 수인을 맺으며 사방의 방위를 나의 영역으로 점했다. 천지귀환단이 보내는 건 오로지 정신뿐.
그렇기에 나는 이동하는 과정에서 내 몸을 실시간으로 새로 구성, 생성해야 한다.
이름하여 환원주신법(還元鑄身法).
현재 내가 행하는 대법의 이름이었다.
“크흑…!”
이동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대법을 실행하니 지금까지 영혼을 이루고 있던 수행들이 깎여나갔다.
그것들이 아까울 법도 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수행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애초에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쌓은 수행들, 귀환할 수 있다면 전부 사라져도 좋다.’
부디,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게 해다오.
대법이 종료되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그것을 확인할만한 정신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망했다. 눈을 뜨면 그리고 꿈에 그렸던 지구에 도착해있기를.
그러한 기원과 함께 나는 물 밀려오듯 들이닥치는 격통에 의식을 잃었다.
***
“끄응.”
삭신이 쑤신다. 근 200년 중에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던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켁, 케흑.”
공기가 너무 나쁘다. 척 봐도 매연과 먼지로 가득한 공기. 이 시점에서 깨달았다.
아, 귀환이 참 잘 되었구나!
슬며시 고개를 들자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던 빌딩의 숲이 눈에 들어왔다. 선협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회색의 도시는 감동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정말로 고향에 돌아오다니.’
천지귀환단(天地歸還團)은 능력이 능력인 만큼 제대로 된 임상실험을 하지 못했다.
해봐야 하계인이나 축생들에게 먹여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정도가 전부.
그렇기에 이 시도는 나에게도 큰 도박이었다.
영혼의 무게 자체가 다른 수선자에게도 제대로 통할지 의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걱정은 무위로 돌아갔다. 나는 지금 이렇게 본래 세계에 돌아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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