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좆망한 비인기 장르 웹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던 나. 어느 날, 아이돌 그룹 '미스핏츠'의 한세나가 올린 게시물 하나로 내 인생이 바뀌게 된다.
오후 네 시. 퇴근 시간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대였지만, 홍대입구역은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대학생들, 관광객들, 일찍 퇴근한 직장인들.
홍대는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아 진짜, 사람들 왜 이렇게 많아."
"엄마, 나 이따 10시쯤 들어갈게. 응, 밥 먹고."
"어제 말한 그 집 아니고, 아니 연남동 쪽에 있다니까. 거기 웨이팅 심하대."
누군가 부딪혀도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나가고, 짐을 든 손이 세나의 어깨를 스쳤다. 승강장을 가득 채운 발소리, 기침 소리, 이어폰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
"2분 후 열차가 들어옵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노란 선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 모든 소음이 세나의 귀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깊숙이 눌러쓴 모자 때문에 시야가 좁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맞은편 벽면의 거대한 광고판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미스핏츠 세나의 18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 핏츠둥이들이'
광고판 속 자신의 모습은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차갑고 도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크롭 후디로 드러난 탄탄한 복근. 패셔너블한 로우라이즈 청바지.
한 손은 허리춤에 걸친 채 카메라를 도발적으로 내려다보는 당당한 포즈.
아이돌 문외한이 봐도 광고판 안의 소녀는 '톱급 중의 톱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그 모습은 지금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승강장 구석에 숨어있는 자신과는 정말 딴판이었다.
세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늘 하는 버릇이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복잡한 생각에 빠질 때면 어김없이 하는 동작.
입술 안쪽 살이 아릿하게 쓰라렸지만, 그 작은 고통이 오히려 현실을 환기시켜줬다.
'... 개웃기네, 진짜.'
속으로 비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저 완벽한 아이돌 한세나와 지금의 자신 사이의 괴리감이 묘하게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허했다.
마치 거울 속 자신과 현실 속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아니, 실제로 다른 사람이긴 했다. 무대 위의 세나는 연출된 페르소나였으니까.
"2호선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들어왔다. 바퀴와 레일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귓바퀴를 따갑게 울렸다.
세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누군가의 어깨가 자신의 등을 스쳤고, 또 다른 누군가의 가방이 팔뚝을 툭 건드렸지만, 다행히 아직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지하철의 공기는 무겁고 습했다. 여러 사람들의 체온이 뒤섞인 공간에서 세나는 살짝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답답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칸 안은 오후 4시의 어정쩡한 시간대 특유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렇게 학생들, 직장인들, 관광객들이 뒤섞인 공간에서 세나는 자신만의 소소한 (?) 취미에 빠져들었다.
사람들 관찰하기.
이건 데뷔 전부터 가지고 있던 버릇이었다.
세나가 이를 시작하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박완서의 단편. 평범한 일상,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그 시선이 좋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그들의 따스함과 예리함이 좋았다.
그 날 이후부터, 그녀에게는 사람들의 표정, 몸짓, 심지어 옷차림까지도 하나의 이야기였다.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길거리에서.
왼쪽에 앉은 중년 남성은 스마트폰을 보며 계속 한숨을 쉬고 있었다. 넥타이는 삐뚤어져 있고, 셔츠 소매에는 커피 자국이 있었다. 그의 어깨는 무겁게 처져있었고,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있었다. 아마 4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저 아저씨는 외근나가서 사무실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것 같고...'
오른쪽 앞자리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는 거울 어플로 머리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새로 산 듯한 셔츠 태그가 목 뒤로 살짝 삐져나와 있었고,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보니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
'저 남자는 소개팅 나가는 건가?'
하지만 세나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맞은편에 앉은 대학생 커플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고, 남자는 그런 여자친구가 흔들리지 않도록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팔이 저릿저릿할 텐데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세나의 숨이 잠시 멎혔다.
'진짜 달달하네, 미친...'
세나의 가슴속에서 뭔가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목구멍이 갑자기 메마르고,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아이돌이 된 지 3년. 남자친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데뷔 전에 몇 명 만났었고, 그중 한 명과는 꽤 오래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사랑이었는지는 잘 몰랐다. 가슴이 뛰거나, 밤새 그 사람 생각에 잠 못 이루거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외롭지 않으려고 붙잡았던 것 같았다.
지금은 그마저도 없었다. 매니저 오빠들이야 있지만, 그들은 일하는 사이니까. 진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거나, 그 사람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그런 감정. 그게 정말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만들어진 환상일까?
어쩌면 자신의 감정은 어느 순간부터 메말라버린 게 아닐까.
카메라 앞에서 웃고, 팬들에게 손 흔들고,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소화하는 동안... 진짜 자신의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 나는 진짜 언제쯤...'
"이번 역은 삼성역. 삼성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지하철 어나운스 소리에 세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벌써 도착했나? 그렇게 오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딴생각에 빠져있었나?
"앗, 씨-...!"
세나는 급하게 일어나면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주변 승객들이 힐끗 쳐다봤지만, 다행히 자신을 알아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돌이 대중교통에서 욕하는 모습이 찍히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바삐 지하철에서 내린 세나는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운동화 밑창이 타일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늦으면 안 되는데, 진짜...'
세나는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갔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당기고, 종아리가 알알하게 뭉쳤다.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해서 체력이 좋은 편이었음에도, 급하게 뛰니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지상으로 나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여학생 두 명이 세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시선.
세나는 고개를 더 숙이고 걸음을 빨리했다.
"쟤 미스핏츠 세나 닮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어? 야, 방금 저 사람 아이돌 아니야?"
반대편에서 오던 대학생들도 세나를 지나치면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편의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하나둘 쏠리기 시작했다.
세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걸었다. 반응하면 안 됐다. 반응하는 순간 확신으로 바뀐다. 그냥 닮은 사람. 그냥 지나가는 사람.
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들이 점점 무겁게 짓눌러왔다.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냥 걸어. 아무 일도 아니야.'
세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공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목구멍 어딘가가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가슴이 조여왔다.
'어...? 뭐지?'
처음에는 뛰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멈춰 서 있는데도 숨쉬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지면서, 마치 누군가가 흉부를 꽉 조이는 것 같았다.
이내,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쿵, 쿵쾅.
평소의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귀에서도 맥박 소리가 들렸다. 손끝부터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손바닥에는 축축한 땀이 맺혔다.
'잠, 잠깐만, 이거 뭐야...'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주변 소음들이 멀어지는 것 같았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숨을 들이마시려고 해도 공기가 목까지만 오고 폐로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았다. 목구멍이 바짝 마르면서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또 왔다.
공황.
다리에서 힘이 빠지면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발목이 휘청거렸다. 마치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머릿속으로는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세나는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차가운 아스팔트의 감촉이 무릎을 통해 전해졌다. 후드티 모자가 뒤로 벗겨지면서 얼굴이 드러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야 근데 쟤 세나 같은데."
"헐 진짜? 설마..."
"언니 저 사람 세나 아냐?"
"어 미쳤다, 진짜 닮았어."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점점 더 많은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세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이 더 많이 났다.
아직 확실히 들키지는 않았지만,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이 찍혀서 인터넷에 올라가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도망가야 돼, 도망가야 돼...'
하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는 젤리처럼 흐물거렸고, 시야는 점점 더 흐려졌다. 귓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그때였다.
"... 괜찮아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순간 세나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목소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마치 가을 저녁의 따뜻한 바람 같았다.
허스키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낮지만 깊이가 있는 억양이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부산... 사투리...... 인가...?'
세나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족히 175는 되어 보이는, 나름 중간 정도의 키. 162인 세나가 고개를 들어야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곱슬거리는 진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와 귀를 자연스럽게 덮고 있었고, 햇빛에 비치니 은은하게 붉은빛이 도는 게 보였다.
그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속눈썹. 여자인 세나도 부러울 만큼 길고 풍성했다.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는 따뜻한 갈색. 아니, 정확히는 호박색에 가까웠다. 조명에 따라 미묘하게 색이 변하는 것 같았다. 살짝 날카로운 눈매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이었다.
세나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보게 되었다.
오른쪽 뺨.
3센티미터쯤 되는 흉터가 비스듬히 내려가 있었다. 귀 앞쪽에서 시작해서 뺨 중앙으로.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뚜렷했다. 오래된 상처 같았다.
칼에 베인 것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무언가에 긁힌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세나의 심장이 멎었다.
아까까지 미칠 듯이 뛰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심장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요했다.
막혔던 숨도, 답답하던 가슴도, 떨리던 손도.
모든 게 멈췄다.
공황.
순간 공황이 왔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저 그 흉터만이 세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세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소년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놀란 걸까. 왜 이렇게 충격을 받은 걸까.
흉터 하나 때문에?
마치 소년을 보는 순간, 세나의 세계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숨.... 숨이 안 쉬어져요."
2025.10.27 16:30
2025.10.2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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