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아니라 체포한다고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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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셋H
1화무료 1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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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청 소속 강력 범죄 전문 수사관, 엘로테 에르바이저는 오늘도 빛나는 경력에 한 줄을 추가하려는데! “저를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체포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진술은 거부하겠습니다. 하지만.” 라펠르넌 백작은 수도 사교계를 뒤흔들었던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그런 미소에 속지 않아! 원작 속 당신이 제국을 조종하는 흑막, 숨겨진 1 황자라는 걸 알고 있거든! “저와 결혼해 주신다면 전부 진술하죠.” “네?” 백작은 붉은 장미 다발과 다이아 반지를 내밀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결혼해 주십시오, 엘로테.” 눈앞의 상대,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 X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청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시체가 누워있는 피바다에서 하는데요? — “당신 용의자에게만 집중해야지, 수사관님.” 아니, 원작의 미제 사건을 해결했을 뿐인데 왜 흑막의 눈이 더 돌아있죠? “내 곁에 있어. 당신 남편을 봐야지.” “당신이 그토록 풀고 싶어 하는 유일한 문제는 나잖아.” 집착 심한 이 흑막님을 체포할 수 있을까? “이 거짓 속에서 날 꺼내줄 수 있는 건, 당신뿐이야.” 그런데 이 흑막님, 원작보다 더 지독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황실이 숨긴 흑막 황자님의 비밀, 아무래도 심각한 범죄의 냄새가 나는데? 수사관 후작 영애, 치명적인 흑막과의 결혼 수사 일지! [걸크러시 / 능력여주 / 계략남 / 능글남 / 선결혼후연애 / 수사물]

#로맨스판타지#서양풍#수사물#걸크러시#능력녀#계략남#능글남

1. 후작 영애는 수사관



묵직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건 비가 올 때 나는 비린내가 아니었다.

오래된 건물에 고인 비린 물 냄새가 아니었다.


숱하게 맡아온 전생의 냄새.

진득하고 섬뜩한 피비린내였다.


검붉은 웅덩이 한가운데 놓인 시신.

아카데미 학생복을 입은 학생들의 비명이 울렸다.

같은 옷을 입은 시신의 입에서 나오는 피에 질겁하며.


나는 습관처럼 시신의 곁에 가서 맥박을 잡았다.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뺨을 두드리고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검은 머리카락도 동공이 풀린 황금빛 눈동자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렸다.


- 사랑해.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웃음소리도.


- 거짓말이야.


***


“아니야!”


벼락같이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손에 감기는 건, 푹신한 이불의 촉감과 노란 햇빛이었다.

아, 뭐야.


“뭐 이따위 꿈을 꾸냐…….”


모처럼 주말인데, 왜 이따위 꿈을 꾸냐고!

진저리를 치며 다시 털썩 누웠다. 잠이라도 푹 자려니까 끔찍한 꿈을 꾸네. 이것도 직업병인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사건이니 사교계니,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다고. 오늘이 아니면 잠도 못…….


쾅! 쾅!


“아가씨! 엘로테 아가씨!”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 불길한 예감.


“살인 사건이래요! 어서 일어나세요!”


망했다.

하지만 투덜거릴 틈은 없었다.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자, 내 전담 하녀 마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사건 발생 장소는?”

“이겐베르 가 53번지래요! 그 연쇄 살인범이 또 나타났나 봐요!”


그 말을 듣자마자,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세수부터 서둘렀다. 마리도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와 내 경관복을 준비했다.


***


전생을 자각한 건,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였다.

불현듯 온갖 현장을 누비며 범인을 잡았던 전생이 떠올랐다. 범인을 검거하다 치명상을 입고 죽던 순간까지도.


다시 태어난 이곳은 렌츠하겐트 제국이었다.

제국 이름을 떠올리자 금세 알았다. 이곳은 <황태자의 새하얀 후원에서> 라는 로맨스 소설 속이라는 걸.


황태자와 후작 영애의 사랑.

그걸 방해하는 저주받은 1 황자.

뭐 그런 평범한 삼각관계 로맨스였다. 매일 범죄자만 보던 나에게도 인류애 충전할 로맨스는 필요했으니까.

마지막에 흑막인 1 황자가 엄청난 재앙을 터트린 것 말고는 꽤 달달한 로맨스였다.


하지만 그런 로맨스보다 훨씬 놀라운 건!

내가 환생 로또에 당첨됐다는 거다.


바로 내가 여주인공 엘로테 에르바이저 후작 영애란 말씀!


편안하게 황태자나 만나서 로맨틱한 인생을 펴보려 했는데.

범죄 현장을 굴러다니던 내게 사교계란 미친 듯이 따분한 곳이었다. 이렇게 갑갑하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내 첫사랑, 도서관에서 몰래 만나던 그 첫사랑이.

무려 교실에서 독살당했다.


과학 수사는 당연히 있을 턱이 없었고, 치안청 수사관이란 놈들은 제대로 된 수사도 하지 않았다.

과거 내 경력을 살려 추리해 본 바, 독살이 분명한데도 그놈들은 소년이 호기심에 약물을 먹고 사고로 죽은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후작 영애고 뭐고 때려치우고, 이놈의 세상, 내가 수사관이 된다! 하고 결심했다.

범죄자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게 나라냐!

그걸 알면서도 홍차니 마들렌이니 하는 게 목구멍에 넘어가?!


후작 부부인 부모님은 뒤집어졌지만, 결국 사교 행사에는 성심껏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수사관이 되는 걸 허락하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 급히 경관복을 차려입고 사건 현장으로 갈 준비를 하는 중인데……!

하필 이럴 때 이놈의 부츠가 말썽인 거야!


“주말 출근하는 기분은 어때?”


문간에 선 미카엘이 얄밉게 낄낄 소리를 냈다.


“꺼져, 미카엘! 지금 너 상대할 시간 없어!”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튼튼한 검은 부츠에 한쪽 발을 집어넣고 통통 튀었다.


“얼씨구. 영애님 말투가 굉장하네. 수사관이 아니라 사관 학교에 들어와도 밀리지 않겠어.”

“그냥 사관 학교로 꺼져 줄래?”


미카엘이 넘어질 뻔한 나를 슬쩍 붙잡자, 드디어 발이 부츠 안에 들어갔다!

그제야 백금발의 머리를 높이 묶고 검푸른 경관복에 달린 명찰을 바르게 달았다.

에르바이저 경위.

내 직급이 쓰인 금속 명찰이 빛났다.


“난 군사 훈련이 제일 짜증 나는 줄 알았는데, 살인 사건은 밤낮이 없네. 대체 왜 내 누님은 생고생을 자처하는 걸까.”

“됐다, 비켜! 어머니한테는 나 출근했다고 말해 줘!”


어깨를 으쓱해 보인 미카엘이 순순히 비켜섰다. 나는 단숨에 후작저를 나와 거리로 나섰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번화가였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가기는 너무 번잡했다. 뛰어가는 편이 빨랐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사람들이 경관복을 입은 내게 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신기한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에르바이저 후작 영애 아닌가? 저리 채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이라니!”

“후작이 결국 딸의 철딱서니를 못 이겼군. 치안청도 곤혹이겠어!”

“하긴 미제 사건을 연달아 해결했다고는 하지만, 치안청이 후작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말 아니겠나!”


하하하, 웃던 사람들을 슬쩍 째려보자 곧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곧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돌린 채 거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지금 출근 중만 아니어도 당장 쫓아가서 따졌을 텐데!


할 수 없이 나는 재빨리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이미 순경들이 도착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화려한 클럽하우스 건물 뒤로 돌아갔다.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골목 뒤편에 한 신사가 쓰러져 있었다.


“엘로테 에르바이저 경위, 방금 도착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필트로 경감님이 고갯짓으로 시신을 가리켰다.


“빨리 왔군. 이번에도 똑같은 자상일세. 솜씨 좋게 단번에 그은 걸 보니, 같은 녀석이 분명해.”


나는 바닥에 꿇어앉아 피해자를 살펴보았다.

깨진 외알 안경, 고통스럽게 뒤틀린 얼굴. 조각칼보다는 커다란 끌로 그은 듯한 목의 치명상.


앞서 발생한 세 건의 연쇄 살인들과 똑같은 자상이었다.

매끄러운 옷감으로 만들어진 시신의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두둑한 가죽 지갑과 손수건, 열쇠 꾸러미가 잡혔다.


“베르너 네펜로스. 엠페르테아 체스 클럽. 이겐베르 가 53번지라고 쓰여 있군요.”


가죽 지갑 속에 든 명함을 읽어 보이자, 경감님이 골목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 건물이군. 체스 클럽으로 향하다 변을 당한 것 같은데.”

“혹은 체스 클럽에서 나올 때 당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이런 고급 옷을 입을 만한 신사라면 클럽에 드나들만도 하지. 일단 체스 클럽을 조사해보게, 에르바이저 경위.”

“알겠습니다!”


몸을 돌리자마자, 익숙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럴 때는 후작 영애라는 신분이 유용하긴 하겠어. 안 그래, 후배님?”


스코로비 경위였다.

이제 이 레퍼토리도 질릴 만도 한데, 누가 수사관 아니랄까 봐 끈질기기도 하네.


“높으신 분이나 드나드는 클럽이라니. 나 같은 평민 무지렁이는 지저분한 현장 감식이나 해야지.”

“선배님보다 제 취조 실력이 좋아서가 아닐까요?”


나는 애써 웃으면서 상대했다.


“그리고 플릭트 남작 사건에서 선배님이 놓치신 현장 증거를 잡아낸 게 누구였죠?”


스코로비 경위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 잡듯이 뒤져도 흉기가 없습니다!’라고 했던 건 창피한 모양이지?

피식 비웃어주던 찰나, 경감님이 질린다는 말투로 명령했다.


“그만들 투닥거리고 어서 할 일들 해! 스코로비 경위, 자네는 어서 현장 감식하고 증인을 찾아! 난 시신을 살펴볼 테니!”

“넵!”


쌤통이다, 라는 말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건이 일어난 건물 앞으로 돌아갔다.

건물 입구에는 ‘엠페르테아 체스 클럽’이라고 새겨진 고급스러운 동판이 걸려 있었다.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나는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치안청 소속 수사관, 에르바이저 경위입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십시오.”


종업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살인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베르너 네펜로스가 오늘 이곳에 들렀습니까?”

“아뇨.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클럽을 운영하시는 분을 뵙고 싶습니다만.”


당황한 표정의 종업원이 애써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종업원은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에 내려온 그는 한껏 고개를 숙이며 내게 손짓했다.


“따라오십시오. 라펠르넌 백작께서 경위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라펠르넌 백작, 그 이름은.


이 세계의 흑막.

제1 황자의 가명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나를 기다렸다고?


“백작이 내가 오는 걸 기다렸다고요?”

“그렇게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업원을 따라 클럽 하우스의 최상층, 5층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창살 무늬가 고풍스럽게 새겨진 문 앞이었다.


“백작님. 에르바이저 경위님께서 오셨습니다.”


종업원이 문을 두드리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테라스가 있는 방이 드러났다. 작은 샹들리에 아래 얇은 커튼이 흔들렸고, 그 앞에는 체스판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체스판 앞에 앉은 제1 황자는.

진한 기시감이 드는 흑발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2. 저와 사귀어 주셔야겠습니다



오늘 그런 꿈을 꾸어서 그런 걸까?

죽은 첫사랑이 떠오른 건 분명 꿈 탓일 것이다. 달콤하고 풋풋한 분위기의 소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남자였으니까.

검고 위험한 기운이 진하게 섞인 미소를 지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에르바이저 경위.”


넓고 정갈한 이곳은 벽난로, 가스등 그리고 체스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하얀 커튼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이 비추었지만,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밤처럼 어두웠다.

상상보다도 훨씬 훤칠하고 좋은 체격을 가진 그는 밤을 지키는, 아니, 밤 그 자체인 남신 같았다.

정갈하고 정확한 체스판 아래에 긴 다리가 고결하게 뻗어 있었고, 잘 벌어진 어깨는 곧았다.


“아니면 엘로테 에르바이저 후작 영애라 부르는 게 나을까요.”


체스 기물을 보는 듯한 눈빛.

잔혹한 흥미가 묻어나오는 입꼬리.

선득한 느낌에 종업원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조차 위험하게 들렸다.


“근무 중이니 경위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달빛처럼 아름답게 백작의 입꼬리가 휘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체스판 위의 기물에 시선을 주었다.


“오늘도 부츠 때문에 곤혹을 치르셨군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처음 만난 백작이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늘 이용하던 해리온즈 가의 조향사가 일을 그만둔 것도 아쉬운 일이긴 하겠습니다만.”


정확했다.

나는 해리온즈 가의 향수 가게만을 이용했고, 늘 내 향수를 맡아주던 조향사가 있었다. 최근에 그가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새로운 향수 가게를 찾던 참이었다.

백작은 나에 관한 일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 얼굴을 슬쩍 바라본 백작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긴 손가락이 검은색 폰을 한 칸 앞으로 전진시켰다.


그걸 본 내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백작의 표정이 살짝 단단해졌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취미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글쎄요. 놀라셨습니까?”

“아쉽게도 그리 놀라진 않았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부츠에 관해서라면, 매일 억지로 구겨 넣어 생긴 부츠의 주름으로 알 수 있었겠지요. 게다가 발이 맞지 않아 꽉 조인 부츠 끈으로도 알아보셨을 겁니다.”


그가 짙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제법이라는 듯이.

백색의 비숍이 대각선으로 3칸 움직였다.


“정답입니다.”

“조향사에 관한 것 역시 체향으로 아셨을 겁니다.”


백작이 빙긋 웃었다.


“맞습니다. 보통 후작 영애들에게서 나는 향이 나지 않더군요. 수사관이 잠복 수사나 현장 감식을 할 때는 향이 남으면 방해가 될 테니 일부러 체향을 지우신 거겠죠.”


사교계에서 흔히 보이는 미소였다. 이미 여러 영애 사이에서 화제가 된 외모였다.

환한 피부와 잘 다듬어진 이목구비, 매혹적인 깊은 눈동자, 지적인 인상이 주는 아름다움.

위험할 만큼 유혹적인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사교 행사에 빠질 순 없을 테니 옅은 향수를 쓰셨을 겁니다. 해리온즈 가의 향수는 은은하면서도 향이 오래 가지 않아 자주 이용하셨을 테지요.”


흑색의 룩이 전진했다.


“백작의 추리가 훌륭하다고 말씀드려야겠지만.”


나는 체스판 앞에 가까이 섰다.


“아쉽게도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서요.”


긴 속눈썹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체스판 위 그의 한 손을 잡았다. 백작이 가볍게 놀라는 게 느껴졌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깨끗하고 손톱이 잘 다듬어진 단정한 손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험한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긴 손가락을 잡고 손바닥이 보이게 뒤집어 보았다. 굳은살이 박인 방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근육이 자리 잡은 방향은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귀족답지 않게 손이 매끄럽지 않군요. 3년 전의 전쟁에 참여하셨을 테지요. 육군이었을 테고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박힌 근육을 짚어 보였다.


“기본적으로 소총을 자주 사용했지만, 권총도 능숙하시군요.”


손목을 쥐었다. 조금 빠르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나는 새로 생겨난 굳은살을 가리켰다.


“하지만 최근에는 칼이나 도끼, 어쩌면 채찍을 주로 사용하시나 봅니다. 새로 돋은 굳은살 역시 전혀 귀족답지는 않군요.”


그의 손을 놓고 깔끔하게 정돈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중에 이질적인 물건이 하나 있었다.


“주로 낮이 아니라 밤에 활동하시고요. 밤부터 아침까지는 이곳에 계신 모양이죠?”


그가 잡혔던 손을 꾹 움켜쥐며 말했다.


“가스등 때문이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그을음이 잔뜩 남은 램프를 손짓했다.


“그을음으로 보아, 가스등이 밤새 켜져 있었을 겁니다. 아침인데도 하인이 손질을 하지 않았고요. 즉, 하인은 백작께서 종종 이곳에서 밤을 새운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 겁니다.”


흰색 나이트가 체스판 중앙으로 이동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머무르는 회원은 없을 테고, 이 방은 아무래도 클럽장이 사용하는 곳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백작께선 이곳에서 자주 새벽을 보냈단 이야기겠죠.”


굵은 목울대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났다.


“소문보다 훨씬 뛰어난 수사관이시군요.”


금빛 눈동자가 홀리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례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그저 호감을 사고 싶었을 뿐이니.”


호감?

왜 나의 호감을 사려 할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허투루 지나칠 말이었으나 상대는 정체를 감춘 1 황자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백작께서 제게 호감을 살 이유가 있습니까?”

“제게도 호기심이라는 게 있는지라.”


아까보다 선명한 미소가 아름다운 얼굴에 떠올랐다.


“수사관이 되신 후작 영애라니, 궁금하기도 하고.”


검은 폰이 한 칸 더 전진했다.


“황태자비 후보로 떠오르는 영애를 미리 뵙고 싶기도 했습니다.”


아.

역시 흑막님에게도 다 계획이 있구나.


원작의 흑막은 황태자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 황태자가 사랑하는 여인, 엘로테 에르바이저까지도.

원작에서는 지금보다 이후에 있을 황실 연회에서 백작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곳에서 라펠르넌 백작이라는 가명으로 정체를 숨긴 흑막이 엘로테를 유혹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수사관이 되는 바람에 더 빨리 만나게 된 것 같다.

아무튼 흑막의 유혹에 응해줄 수는 없지.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아쉽지만 직업상 개인적인 호감에는 답해드릴 수 없겠군요. 중요한 사건을 수사 중이거든요. 수사에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뭐든 물어보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는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아침, 이 부근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피해자는 이 체스 클럽 회원의 회원인 것 같더군요.”


일부러 살인 사건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하지만 백작의 표정에 놀라움이나 섬뜩함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심문을 해줘야지.


“베르너 네펜로스가 이 체스 클럽의 회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경위께서도 그를 아실 테지요.”


의외로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펜로스 자작은 최근 사교계에도 자주 드나드는 인사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네펜로스 자작은 높은 작위는 아니었지만, 최근 동부의 뷘케 강 댐 공사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다.

그전에는 그다지 잘 알려진 귀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큰돈을 번 후에는 제법 사교계에 자주 얼굴을 들이밀었다.


슬쩍 떠보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격이나 말투, 또는 친우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좋은 일이 있다며 클럽 회원들에게 종종 좋은 술을 선물했지요. 제법 활기찬 성격이라 회원들도 그와 자주 어울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돌연 씨익 웃어 보였다.


“체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요.”


일부러 사건과 관련 없는 말을 하는 건가?

여기서는 당황하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백작께서는 밤새 이곳에 계셨겠지요.”

“네.”

“그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나 증거가 있습니까?”

“글쎄요. 저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그는 내가 잡았던 손을 펼쳐 보였다.


“살펴보신 대로 고운 손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의심받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라니.

바보가 아니라면 위험한 인물이었다. 수사관이 심문을 하는데도 이런 여유를 보이는 건, 엄청난 전과가 있는 범죄자들뿐이니까.


“손을 보면 의심할 만하지만, 제가 백작이라면 직접 살해하진 않았을 것 같군요.”

“직접 살해하진 않았다.”


그가 백색의 퀸을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제가 다른 이에게 살인이라도 명령했단 말씀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가 뭘까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방을 먹일 차례였다. 저 침착한 태도를 흔들어 놓아야 허점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백작께서는 네펜로스 자작을 이른 시간에 불러낼 방법이 있을 테니까요.”


백작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저 표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슨 방법일까요?”

“최근에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알고 계실 테지요.”

“네. 신문마다 떠들썩하게 보도하더군요.”

“피해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하나뿐입니다.”


그는 듣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 강의 공사에 관심이 많은 투자자라는 것이지요.”

“투기가 심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저와 무슨 관계가 있지요?”

“백작께서는 뷘케 강 공사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아실 테니까요. 충분히 피해자를 끌어들일 만한 정보를 미끼로 쓰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의 긴 손이 흑색의 퀸을 들어 올렸다.


“제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이제 막 수도에 정착한 시골뜨기인데 말입니다.”


확실한 한 수.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환생한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로 1 황자의 비밀을 떠보기 위해.


“글쎄요.”


피식 웃은 내가 운을 띄우듯 물었다.


“황실?”


그 순간, 검은 퀸이 백색의 킹 앞에 섰다.

체크메이트.

하얀 킹이 체스판 위에 누웠다.


“에르바이저 경위.”


그의 얼굴에서 싸늘한 미소가 진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저와 진지하게 교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저와 사귀어 주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지?



3. 사랑에 빠질 시간을 드리지요



“백작. 수사를 피하려는 수작이라면 소용없습니다. 장난이라면 질이 낮고요.”

“둘 다 아닙니다.”


체스 테이블에서 백작이 일어났다.

커다란 키와 체격이 가까이 다가서며 위압감을 만들어냈다.


“저야말로 여쭙고 싶군요. 경위께서야 말로 허투루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요?”


황금빛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빛났다. 만들어낸 듯했던 미소도 어느새 섬뜩하게 바뀌었다. 목소리 역시 한층 더 낮아진 걸로 보아, 황실과 연관 있을 거라는 내 추측이 영향을 준 건 분명했다.


“하긴. 성실한 수사관이자 후작 영애, 차기 황태자비 후보께서 아무 말씀이나 함부로 하실 리 없지요.”


내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인 그가 빙긋 웃었다.


“영특하신 경위께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신 말씀도 아니실 테고.”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경위. 당신은 이 제국에 정확히 5명밖에 모르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이제 당신까지 6명이 알고 있군요.”


살기를 띤 눈동자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작은 빌미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저는 당신을 죽여야 합니다.”


아차.

떠보려 했던 게 오히려 그를 자극했나.

불필요하게 흑막님의 표적이 된 것 같은데.

허리춤의 권총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백작의 손가락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죽고 싶지 않다면 저와 타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타협?”

“네. 저는 당신이 꽤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러더니 내 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와 결혼하여 가족이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래?

나는 백작을 한 손으로 밀쳐냈다.


“뭐라고요?”

“못 알아듣진 않으셨을 텐데요. 저와 결혼해 주신다면 살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처음 백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귀자고요? 그것도 결혼을 전제로?”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야 금빛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어딘가 비뚤어진 시선으로.


“사랑에 빠질 시간이라도 필요하신지요?”


그는 단숨에 권총 위에 올린 내 손을 붙잡았다. 재빨리 뿌리치고 손목을 틀어 공이치기를 당기고 위협사격을 할 생각으로 몸을 틀었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철컥, 철컥.


발포 대신 금속이 걸리는 소리만 들렸다. 총의 공이 앞에 작은 쇳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어느 틈에……!”


쇳조각을 꺼내려 하면, 그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리 없다. 여기서는 맞붙어야 했다.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내려치려 했다. 본능적으로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권총으로 그의 후두부를 가격하면!

그러나 금빛 눈동자가 빛나며 내 명치를 먼저 내리쳤다.


“크헉……!”


순식간에 손목을 가격당했고,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그가 권총을 들어 올리며 쇳조각을 제거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


총구가 내 관자놀이를 향했다.


“이 지루한 세상에 당신 같은 상대라니. 죽이기도 아깝고요.”

“거절한다면, 죽일 건가요?”

“네. 내키진 않지만.”


맛이 간 게 분명한 미소였다.

생각해야 한다. 이 정신 나간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야 하니까.


“제가 결혼을 승낙한다 해도, 백작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을 텐데요.”

“글쎄요.”


붉게 그려진 입술 끝에서 오만한 웃음소리가 배어 나왔다.


“경위의 입을 다물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당신에게 좋은 방법을 제안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나와 교제하는 겁니까?”

“교제뿐만은 아니지요. 제 아내가 되는 겁니다.”


재빨리 눈을 굴려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근처에 쓸만한 무기는 없었다. 무기가 있다 한들 방이 넓었다. 머리에 갖다 댄 총보다 빨리 움직일 만한 시간은 없을 터였다.

방법이 없었다.


“……좋아요.”


살기 위해서 해야 할 대답은 하나였다.


“교제하겠습니다.”


서늘했던 미소가 어느새 부드러운 사교용 미소로 돌아왔다. 총구 역시 내 관자놀이에서 떨어졌다.


“좋은 선택입니다, 경위.”


언제든 쏠 수 있다는 듯 그는 총구를 천장으로 향하게 했다.


“아니, 이제 엘로테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요. 내 피앙세.”


그는 진심으로 기쁜 듯 빙긋 웃었다.

이해하려 하지 말자. 지금은 살아 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영애께서 필요하실지 모르니, 사랑에 빠질 시간을 드리지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혹시나 등을 보이면 발포할 것을 경계하며 뒷걸음질했다.


“불편해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은 건 진심이니까.”


그는 들고 있던 권총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안심해도 좋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엘로테.”


소름 끼치는 기분을 남겨두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가 던진 내 권총을 주웠다.


미친 자식.

흑막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미친놈일 줄이야.

그래도 결혼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하지만 빠져나온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정말로 백작이 손을 뻗치기 전에 먼저 체포하는 수밖에. 그가 연쇄 살인을 주도했다는 증거를 잡아 감방에 넣어줄 테다.


시신이 누워있는 골목으로 돌아와 경감님께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경감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사인도 경동맥 파열로 인한 과다 출혈이야. 특이한 점은 없더군.”

“오른쪽 경동맥이 끊어진 걸로 보아, 왼손잡이인 건 분명하군요. 동맥이 끊어지면서 피가 많이 튀었을 텐데요.”

“맞아. 하지만 저번 사건에도 그랬듯이 피를 뒤집어쓴 걸 목격한 사람이 없어.”


어느새 나타난 스코로비 경위가 손을 턱에 가져가며 말했다.


“주변을 탐문해 보았습니다만, 이번에도 피를 뒤집어쓴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상한 사람은 없었나?”

“네. 못 보던 사람이 어슬렁거리진 않았는지도 수소문해 보았으나 부랑자가 있었다는 증언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거만한 말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랑자가 범인이라면 분명 지갑부터 사라졌을 겁니다. 그러나 현장에 남은 지갑은 없어진 돈 하나 없이 멀쩡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앞선 사건에서도 금품을 노린 흔적은 없었으니까.”


필트로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긴 이겐베르 가 입니다. 부랑자들이 절대로 오지 않는 부유층의 유흥가입니다. 이곳에 부랑자가 나타났다는 것부터 수상합니다.”


스코로비 경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탐문 조사를 못 믿겠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못 믿겠는데요, 라는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경감님이 우리를 말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부랑자에만 집중하자고. 에르바이저 경위, 부랑자가 어땠다는 건가?”

“범인은 부랑자로 위장하고 현장을 벗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부랑자를 목격한 사람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스코로비 경위가 쳇 소리를 내며 앞장섰다.


부랑자를 본 증인은 근처 클럽 하우스의 마차 관리인이었다. 귀족들이 타고 온 마차를 아래층에 대기 시키는 일을 하는 그는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부랑자를 봤다고 했죠? 이 거리에 부랑자가 흔히 나타납니까?”


증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거리에는 부랑자가 없습니다. 귀하신 분들은 깨끗한 거리를 선호하시니, 주변 상인들이 부랑자를 보면 바로 쫓아내니까요.”

“혹시 그 부랑자에게 수상한 점은 없던가요?”

“음……. 다른 부랑자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는데, 기억이 잘…….”


평소와 다른 부랑자.

투자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만한 부랑자라면, 분명.


“혹시 얼굴이 깨끗했습니까?”


그러자 증인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맞습니다! 얼굴이 더럽지가 않았습니다. 몸이 구부정하지도 않고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전쟁터에서 본 군인처럼 섬뜩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안리데르 가 쪽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혹시 얼굴을 기억합니까?”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인상은 기억납니다.”


필트로 경감님이 순경을 돌아보고 말했다.


“몽타주 그리는 순경을 불러오도록 해.”


***


몽타주를 확보한 후, 지난 연쇄 살인 사건의 정보를 뒤지며 증거를 정리했다.

뷘케 강 공사에 투자한 이들 중, 수도에 남아있는 이들을 추려 연쇄 살인범의 다음 목표가 누군지 예측했다.


브레이든 남작.

그가 다음 목표라 추측한 우리는 그를 경호할 인력을 보낸 후, 저녁이 다 되어서야 퇴근했다.


너덜너덜한 기분으로 퇴근했는데.

미카엘 녀석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깐족이며 내게 따라붙었다.


“어떡하냐. 우리 누님 다음 주말에는 사냥대회도 참석해야 하는데. 주말이 없으시네.”

“저리 가. 이제 진짜 너 상대할 기운 없어.”

“벌써 기운이 없으면 안 되는데? 더 안 좋은 소식이 있거든.”


대체 뭐가 남았는데.

주말 아침부터 미친 자식 상대하는 것도 지치는데 대체 뭐가 또 있는데!

소리치고 싶은 기력도 없어서 미카엘의 얼굴만 노려봤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궁으로 와달라고 하셨어.”

“뭐? 지금?”


미카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었다.


“응. 설마 후작 영애가 아침부터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가 이제 막 퇴근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하셨겠어?”


으아아악!

제발 나 좀 쉬자!


4. 내게서 도망치지 마



“아가씨! 드레스는 미리 골라놨어요!”

“고마워, 마리!”


경관복을 벗고 재빨리 하얀 드레스를 받아들었다. 하녀들이 달라붙어 한껏 올려 묶은 내 머리를 풀고 가볍게 땋아주었다.

반짝이는 머리핀 몇 개와 꽃장식, 연분홍빛 볼 터치를 살짝 넣어주자 제법 그럴듯했다.


“얘야, 엘로테.”


마지막으로 적당한 구두를 신어 보는데 어머니가 오셨다.


“황태자 전하께서 너만 부르신 걸 보면 분명 너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게 아니겠니? 전하께 무례한 말씀은 드리지 말고, 부디 잘…….”

“어머니, 제가 전하와 잘 되면 수사관을 할 수 없잖아요.”

“황태자비보다 수사관이 되겠다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굴 닮았는지 정말 못 말리겠구나. 에휴, 네가 어련히 잘 처신하겠지만 흔한 기회가 아니니 잘 생각해 보렴. 너도 결혼은 해야 하지 않겠니?”

“제가 어떻게 수사관이 됐는데요. 결혼 때문에 수사관을 그만둘 순 없어요.”


어머니가 가슴을 팍팍 치는 동안, 미카엘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잘 생각했어. 누나 같은 사람은 데려가는 녀석이 손해지. 결혼 같은 건 하지 말고 그냥 집에서…….”

“미카엘!”


어머니가 결국 참지 못하고 미카엘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누나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어서 결혼하라고 설득해도 모자랄 판국에!”

“아, 아야. 알았어요. 어머니.”


옅은 은빛 구두를 신은 나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방을 나섰다.


“아무튼 다녀올게요!”

“그래, 어서 서두르렴. 미리 마차를 불러놨단다.”

“혹시라도 전하께서 이상한 수작 부리면 도망쳐. 범죄 현장 좋아하는 영애한테 홀딱 넘어가기엔 황태자 전하가 불쌍하잖……악!”


어머니가 들고 있던 부채로 미카엘의 이마를 딱 때렸다.


“얘는! 황태자 전하께서 엘로테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게 얼마나 영광인데!”


마차에 오르자, 뒤따라 나온 미카엘이 재빨리 덧붙이는 말이 들렸다.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 누님!”


***


렌츠하겐트 제국은 고대부터 존재한 나라였다. 그렇다고 황궁까지 고대 유물은 아니었다.

오랜 역사 속에 지금의 수도, 로디움으로 옮겨 온 건 500년 정도 됐다. 황궁도 당연히 낡은 건물이었지만, 지금의 황제는 황궁이 너무 오래되었다며 새 황궁을 지었다.


그 결과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황궁이었다. 금으로 치장한 궁륭에는 호화로울 만큼 세밀한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눈 닿는 곳마다 각종 조각품과 세련된 벽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기엔 좋지만, 역시 너무 화려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불편한 마음이 들 정도로 화려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황궁을 뜯어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도착한 응접실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한쪽 벽에 유명한 화가의 최신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은 물론, 테이블까지도 비싼 석재를 다듬은 듯 매끄럽고 부드러운 마블링이 들어가 있었다.

나름 후작 영애로 화려한 삶을 살았는데도 온통 신기한 것들뿐이었다.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펼쳐 보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앉지, 에르바이저 영애.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군.”


짙은 금발이 우아한 남자였다.

몸가짐 역시 원작 남주답게 기품이 넘쳤고, 체격도 훤칠했다. 얼굴선은 진하다기보다는 섬세한 편이었다.

눈동자는 황금색이었다.


낮에 만난 흑막님과 똑같은 색이었다. 아무래도 형제니까 닮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조금은 닮은 것 같고.


“줄곧 영애를 부르고 싶었는데, 아주 바쁘다고 들었네.”

“직업이 있다 보니 조금 바빴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요?”

“직업이라.”


한 손을 턱에 가져간 황태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직업을 갖는 영애는 흔치 않은데 말이지.”


금빛 눈동자가 따뜻하게 나를 향했다.


“오늘은 그저 영애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불렀네. 그간 연회에서 인사만 주고받은 게 아쉬워서 말이지.”


아, 그건 말이죠.

아무래도 원작 남주를 만나면 분명 사귀자고 할 테고, 그러다 보면 수사관도 못 하게 될 테니 일부러 도망 다녔습니다……라고는 말할 순 없지.

어쩌다 인사만 몇 번 나눈 게 전부니까 벌써 나에게 감겼을 것 같진 않고. 오늘도 적당히 대꾸만 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일부러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전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영애와 차 한잔할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하면 실례가 될까?”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심상치 않은데.

설마……진짜 감겼나?


“처음 영애를 만났을 때는, 영애가 막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때였지. 그땐 앞으로 수사관이 될 거라고 한 영애의 말을 믿지 않았네.”


그때의 나는 이미 수사관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더더욱 황태자를 밀어내려고 그렇게 말했던 건데.


“하지만 영애의 말이 너무 인상적이라 잊히지 않더군.”


그게 오히려 기억을 각인시켰단 말이지?


“정말로 수사관이 되었을 때는 놀랐네. 수사관 시험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텐데.”

“과찬이십니다.”


황태자는 꿈꾸는 듯 아름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영애가 정말로 멋진 여성이라고 생각해.”


……이게 아닌데.

원작의 엘로테 에르바이저는 우아한 몸가짐과 선량한 성격으로 황태자를 사로잡은 게 아니었나?

왜 황태자가 범죄자 때려잡는 수사관을 멋진 여성이라고 하는 거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감히 전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직업도 아니고요.”

“글쎄. 난 영애에게 관심이 있는데.”


뭐야, 이 노골적인 플러팅은?


“몇 번인가 연회에서 말을 걸어 보려 했는데, 늘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다 일찍 돌아가더군.”

“황송합니다. 제가 전하의 호의를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영애처럼 영특한 여인이 모르진 않았을 텐데.”


황태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익숙한 싸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피해 다닌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수사에 열중하느라 연회에 집중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영애의 관심을 충분히 끌지 못한 모양이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만큼은 내가 영애의 관심을 끌어보겠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하지만 이렇게 직구를 날려대는 황태자를 거절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눈을 깜박이다가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디 영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에스코트하듯 내 손을 살짝 쥔 그가 응접실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 길지 않은 복도를 지나, 테라스 문을 활짝 열자 깜짝 놀랄 풍경이 펼쳐졌다.


“영애가 흰색을 좋아한다고 들었네.”


곳곳에 가로등이 켜진 밤에 꽃들이 빛나듯 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황태자의 새하얀 후원에서>라는 원작의 제목대로, 넓은 후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은 모두 흰 꽃들이었다.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후원의 한가운데 있는 벤치로 나를 이끌었다.


“이곳은 영애가 좋아할 만한 꽃을 심었어. 이쪽으로는 내가 아끼는 것들을 놓았지.”


꽃길이 끝나는 곳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하얀 면사포를 쓴 여인, 강림한 천사, 죄인을 끌어안은 여신과 같은 유명한 조각들이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정말 아름답습니다, 전하. 밤에 핀 흰 꽃도 조각들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습니다.”


살풋 웃으며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감히 제가 받을 수 없는 것이군요.”


그 말에 황태자의 얼굴에 서글픈 감정이 피어올랐다.


“제게 마음을 써주신 것은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저는 평생 수사관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영애.”

“전하의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제게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외람되오나 황태자비가 된다면 더 이상 수사관으로 일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그는 진심으로 섭섭하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죄책감이라도 일으키려는 듯이.


“영애를 만족시키려면 꽃이 아니라 다른 걸 준비해야 했을까?”


두 손으로 내 손을 쥔 황태자가 아쉬운 듯이 웃어 보였다.


“예를 들면, 사인을 알 수 없는 시신 같은 것 말이야.”


움찔했다.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지, 하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미제 사건 속 시신이 나보다 영애의 관심을 끄는 것 같아서.”


농담, 맞겠지?

왜 기분이 싸하지?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따라 웃으면서 예의를 차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전하께서 수집하신 조각들도 모두 훌륭합니다. 전하의 높으신 안목에는 감탄하고 있습니다.”

“조각을 좋아하다 보니 알게 된 것뿐일세.”


그가 자신의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조각을 보고 있으면, 아름다움도 시간도 모두 내가 지배하는 것 같거든.”


그러더니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영애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지만, 나는 영애와 이 모든 것을 나누고 싶어. 앞으로 내가 통치하고 지배하는 모든 것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


마주 잡은 두 손에서 열기가 배어 나왔다.


“나와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해 줬으면 해. 에르바이저 영애.”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에 안타까운 진심이 흘렀다.


“내게서 도망치지 마. 부디 나를 봐 줘.”


황금빛 눈동자가 살며시 떨리며 내 눈을 마주쳤다.

5. 단서가 가리킨 남자



어쩌면 당연한 전개였다.

내가 원작 여주인 이상, 남주인 황태자랑 엮이는 건 정해진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황태자비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직 수사관으로서 조사해야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까.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는 수사관을 그만둘 수 없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제가 수사관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이해하실 겁니다.”


나는 간절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됩니다. 황태자비가 수사관으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영애.”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와서 수사관을 그만두는 건 큰 결심이 필요하니까요.”


미간을 살짝 찌푸린 황태자가 내 손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아릿한 통증을 느끼는 듯한 눈길이 나를 향했다.


“……강요해도 듣지 않겠지.”


짙은 한숨이 하얀 정원을 향했다.

원작이었다면, 여주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곳이었다. 그는 천천히 맞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영애를 기다릴 걸세.”


쓸쓸한 미소가 입가에 스몄다.


“그러니 꼭 내게 돌아와 주었으면 해.”


간절해 보이는 당부에도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백합, 하얀 장미, 흰 프리지어의 향기가 뒤섞인 정원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분명 여주를 위한 자리인데도 도저히 이곳이 내 자리인 것 같지 않았다.


***


주말이 이렇게 사라지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일인걸.

치안청에 출근한 나는 연쇄 살인범이 나타날 동선을 파악하려 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필트로 경감님과 막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쾅!


사무실 문이 엄청난 기세로 열렸다. 곰처럼 덩치 큰 남자가 시근덕거리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필트로 경감이 누구요?!”


다짜고짜 소리치는 남자에게 경감님이 손을 들었다.


“접니다만.”

“당장 나한테 붙은 순경들 치우시오! 걸리적거리는 그놈들 엉덩이를 모두 걷어차기 전에!”


인상을 쓴 경감님이 정중히 물었다.


“브레이든 남작님이시군요.”

“그렇소! 연쇄 살인범을 잡을 거면 얼른 잡으면 될 일이지, 왜 남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닌단 말이오!”

“남작님께서 살인범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놈을 잡을 때까지만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필요 없소! 내가 그깟 살인범 따위에게 당할 것 같소?”


남작은 커다란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북부에서 곰 사냥으로 이름을 떨친 나요! 그런 쥐새끼 같은 녀석은 겁나지도 않소!”

“하지만 위험한 놈입니다. 실력이 아주 뛰어난 놈이라…….”

“실력? 내 앞에서 실력을 운운하는 거요?”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던 남작이 소리쳤다.


“실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소! 그러니 쓸데없는 순경 놈들은 당장 치우시오!”


몸을 돌린 남작은 문짝이 떨어져라 쾅 닫고 사무실을 나섰다.

곁에 있던 스코로비 경위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설득해도 소용없을 것 같군. 순경들은 모두 철수시키게. 대신 우리가 직접 남작을 뒤쫓도록 하지.”


경감님이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쇄 살인이 일어나는 주기는 3일. 오늘은 반드시 놈이 나타날 테니까.”

“예!”


***


오후 7시 16분.

우리는 안리데르 가의 한 클럽 하우스 근처에 숨었다. 이겐베르 가만큼은 아니어도 이곳도 꽤 부유한 유흥가였다.

나는 클럽 하우스 입구가 보이는 식당 근처에 서 있었다. 경리 일을 하는 평민 여인으로 위장한 채, 일행을 기다리는 척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빛이 스며 나오는 클럽 하우스 앞으로 노란 가로등이 일정하게 서 있었다.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가로등을 벗어나면 새까만 골목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기엔 최적의 장소라고나 할까.


“하하하! 요즘엔 투자를 안 하는 놈들이 바보라니까! 전쟁이 끝나니 호황이 오지 않나!”


굵은 시가를 문 브레이든 남작이 신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닌데도 거나하게 취했는지 걸음이 흐트러져 있었다.


“뷘케 강에 관한 정보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사야 한다니까, 암!”


대범한 건지, 바보인 건지.

살인범이 노리고 있다는데도 술을 마신 배짱은 대단하네. 애초에 술꾼이었던 걸까?


남작은 같이 나온 신사들과 시가를 피우며 시시덕거렸다. 마차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고급스러운 마차가 몇 차례 오가며 신사들을 태웠다. 남작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남작의 앞에 마차 한 대가 다가왔고, 그는 마부를 향해 손짓했다.


마차가 시야를 가린 순간.

마차는 멈춰 서지 않고 남작을 지나쳤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남작이 사라졌다!


재빨리 남작이 있던 자리로 가보았다.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남작이 보였다. 그 옆에는 정장을 입은 건장한 신사가 함께 있었다.

둘은 클럽 하우스 뒤로 이어지는 골목 모퉁이로 사라졌다.


재빨리 뛰어갔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 뒤는 낮은 건물들이 난잡하게 세워져 있었다. 비좁은 골목이 불규칙하게 엮여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지도는 완벽히 숙지했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확실한 거지? 이제 와서 댐 설계를 바꾼다고?”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속삭이고 있는 건가?


발소리를 죽이고 목소리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


“으헉!”


단말마 같은 비명이 들렸다.


“이, 이 자식이……! 커, 커흑!”


거친 몸싸움 소리.

사람을 밀치고 패는 소리가 얽혔다.

재빨리 목소리가 들린 골목에 위협사격을 했다.


탕!


“치안청 수사관이다! 꼼짝 마!”


그 순간, 거대한 덩치가 내팽개치듯 나를 덮쳤다!

낮은 신음이 들렸다. 나를 덮친 그것은 브레이든 남작의 몸이었다!

엄청난 무게였지만 쓰러지지 않고 남작을 붙잡았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내려놓는 동안, 놈은 골목 어귀로 몸을 틀고 사라졌다!


“잡았나?!”


경감님과 스코로비 경위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작을 부탁합니다!”


나는 치마를 북 찢고 녀석이 사라진 골목으로 뛰었다. 복잡한 골목이었지만, 금세 따라붙었다.


“서라!”


복잡한 골목을 엄폐물 삼아 놈은 재빠르게 몸을 틀었다. 쉽게 발포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곧 골목도 끝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환한 대로변이 나올 터였다!


옅은 가로등 빛에 비친 놈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어두워서 머리색은 보이진 않았지만, 밝은 색은 아니었을 것이다.

녀석이 골목 사이로 등을 내보이는 순간, 뛰면서 발포했다.


탕!


“큭!”


옅은 신음과 함께 피가 흩뿌려졌다.

그러나 어깨를 맞고도 녀석은 도망갔다!

하지만 이제 대로변이다. 쉽게 도망갈 수는……!


히힝!


골목 끝에 말이 멈춰 섰다.

그러더니 허름한 마차에 놈이 몸을 던지며 올라탔다.


“젠장!”


죽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말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유리병을 꺼내어 마차를 향해 던졌다. 깨진 유리병에서 타르가 흘러나왔다. 마차는 진득한 타르가 묻은 채 검은 흔적을 남겼다.


“헉, 허억, 헉…….”


넘어갈 것 같은 숨을 헐떡이며 남작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순경들이 등불을 들고 주위를 비추었다.

스코로비 경위는 벽에 눕힌 거대한 남작의 몸을 살펴보고 있었다. 경감님이 내게 물었다.


“붙잡았나?”

“아니오.”


절로 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골목 끝에 미리 마차를 세워두었더군요. 놓쳤습니다. 하지만 마차에 타르를 발라두었으니 쫓아갈 수 있을 겁니다.”

“수고했네.”

“남작은 어떻게 됐습니까?”


경감님이 고개를 저었다.


“치명상을 입었어.”


순경이 등불로 밝힌 현장을 살펴보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격렬한 격투가 있었는지 벽은 온통 피칠갑이었다. 그동안 한 방에 피해자를 처리한 살인범도 이번에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작의 몸은 이곳저곳에 찔려 온통 피투성이였다.


“이미 심장이 멈췄네.”


이미 늦었나.

내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살았을 텐데.


죄책감에 고개를 떨군 순간, 바닥에 무언가가 보였다.


“이건 뭐죠?”

“범인의 외투인 것 같군.”


외투 조각이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다. 어찌나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는지 왼쪽 솔기가 통째로 나가 있었다.

옷 조각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 밑에 작은 종이가 하나 깔려 있었다.


종이를 뒤집어 나온 글씨를 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브레이든 남작, 안리데르 가 클럽으로 유인


어떻게 보아도 이건 살인 지령이었다.

그리고 종이 하단에 적힌 이 문구.


- 엠페르테아 체스 클럽.


화려한 필기체가 검푸른 잉크로 적혀 있었다.


“즉사하진 않았군요.”


머릿속에서 맴돌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차라리 즉사하는 편이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말입니다.”


노란 등불이 비춘 단정한 얼굴선.

밤처럼 새까만 검은 머리카락.

웃음기가 배어 있는 황금빛 눈동자.


라펠르넌 백작.

그의 등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인 현장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 웃음.

그러나 그보다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건, 그의 가슴에 한가득 안겨 있는.


“엘로테.”


붉은 장미 다발이었다.

6. 살인 현장에서 청혼이라니요



완벽한 정장에 화사한 꽃다발.

단서가 가리킨 남자의 등장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게다가 저 단정하게 넘긴 흑발은 대체……. 살인 현장에 데이트라도 하러 나온 건가?

하지만 내 손에 결정적 증거가 들려 있는 한,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라펠르넌 백작.”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들었다.


“당신을 연쇄 살인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합니다.”

“뭐?”


경감님과 스코로비 경위가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백작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


“저를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체포하신다고요.”


손을 살짝 물린 백작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치안청으로 동행해 진술을 듣겠습니다.”

“진술은 거부하겠습니다.”


등불에 어룽거리는 금빛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 빛났다. 큰 키의 백작이 내 귓가에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하지만 저와 결혼하신 후에는 당신에게만 진술해 드리죠.”


백작을 손으로 밀쳤다. 순순히 고개를 든 백작은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정신 나간 소리는 듣지 않겠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니, 얌전히 치안청으로 동행해 주시죠.”

“결정적인 증거라.”


한쪽 팔에 꽃다발을 옮긴 백작이 품에서 작은 향수병을 꺼냈다. 능숙하게 그것을 손목에 뿌린 그가 가볍게 손을 비볐다.

피비린내 속에 상큼한 향이 살짝 감돌았다.


“제시해 주시죠. 제가 연쇄 살인을 주도했다는 증거를.”


방금 주운 종이를 들이댔다.


“범인이 남긴 쪽지입니다. 당신이 브레이든 남작을 이리로 유인하라는 지시를 보낸 게 틀림없습니다.”


백작이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엠페르테아 체스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클럽장인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커다란 손바닥이 종이를 쓰다듬듯이 싸악 훑었다.


그런데.

마법처럼 글자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 흔적도 없었다는 듯이.


“모르겠군요.”


백작은 깨끗해진 종이를 들어 보였다.


“경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일부러 앞뒤를 돌려가며 그가 종이를 보여주었다. 단숨에 그것을 빼앗은 나는 불빛에 종이를 비춰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멀쩡한 잉크가 사라지다니.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전생에 들어본 적이 있다. 지워지는 잉크가 있다는걸. 공기 중에 있는 약한 탄산과 반응하면 저절로 지워지는 잉크가 존재한다.

산도가 있는 물체와 접촉하면 지워지는 원리였다. 방금 백작이 사용한 상큼한 향의 향수. 레몬이나 식초 따위가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불빛에 비추면 뭐라도 드러날까 했지만 헛수고였다. 등불에 비춘 종이에는 한껏 레몬 물이 묻은 백작의 손이 쓸고 간 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대체 무슨 증거를 발견한 건가, 경위?”


경감님이 다가와서 종이를 살펴봤다. 하지만 경감님 눈에 비친 건 빈 종이뿐이었다. 스코로비 경위까지 다가와서 종이를 살펴봤다.


“뭘 보고 저 사람이 범인이라는 거야? 헛것이라도 봤어?”


이렇게 증거를 인멸하다니……!

분한 표정으로 백작을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경위께선 제게 관심이 지대하신 모양입니다.”


그가 내 앞으로 한 발 더 다가왔다. 피투성이 시체가 놓여 있는 곳 바로 옆으로.


“이토록 저를 붙잡고 싶어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였다. 그가 작은 상자를 열어 보이자, 믿기지 않는 것이 나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그러지 않으셔도 이미 전 당신께 붙잡힐 생각인데 말이죠.”


그가 내 발밑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결혼해 주십시오, 엘로테.”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이런 식으로도 멈출 수 있구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이렇게도 멈출 수 있는 거였어.

머리가 펑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간신히 할 말을 찾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백작이 싱긋 웃었다.


“청혼하는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시체가 누워있는 피투성이 살인 현장에서 하냐고요!


“제 아내가 되어 주십시오. 엘로테.”


장미 다발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민 백작이 정말 기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더 미친놈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거절할게요.”


아무렇게나 찢어버린 치마를 입은 건 둘째 치고, 너처럼 수상한 놈이랑 덥석 결혼하겠냐!

그것도 태연하게 증거 인멸까지 한 범죄자랑! 살인 현장에서!

내가 사이코패스라도 되는 줄 알아?!


백작은 여전히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거절할 수 없으실 텐데요.”


방긋 웃는 얼굴 속에 서늘함이 숨겨져 있었다.


“사건의 진상이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반지를 내민 손을 거두지도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저를 체포하고 싶으신 줄 알았는데.”

“그게 결혼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제정신이세요? 이런 곳에서 제가 덥석 반지를 받고 울면서 승낙할 줄 아셨나요?!”

“아.”


그제야 백작이 웃으며 반지를 거둬들였다.


“바쁘신데 제가 실례를 했나 보군요.”


아뇨, 시체!

시체가 있다고요!

포인트가 다르잖아, 이 사이코패스야!


무릎을 펴고 내 앞에 선 백작이 사랑스럽다는 듯 내 뺨을 쓰다듬었다. 소름이 쫙 끼쳐서 굳어 있는 찰나, 그가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나와 결혼해야 한다는 건 잊지 않았겠죠?”


흠칫하는 내게 그가 덧붙였다.


“거절은 용납하지 않아요.”


이내 몸을 바로 세운 그가 빙긋 웃었다.


“나는 이 결혼을 해야겠으니까.”


넋을 놓은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필트로 경감님이 고개를 저었다.


“수사관 노릇을 20년이나 했는데, 아직도 처음 보는 일이 일어나는군.”


경감님은 중절모를 살짝 들어 올리고서 내게 물었다.


“라펠르넌 백작님이라 하셨던가? 다른 증거가 없으면 체포할 수 없네. 에르바이저 경위, 추가로 발견한 증거가 있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작님은 이제 보내드리도록 하지. 지금은 범인을 쫓는 게 우선이니.”


스코로비 경위가 백작에게 말했다.


“수사 중이니 프로포즈는 나중에 하시고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현장을 어지럽히시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백작은 사람 좋게 웃었다. 나를 바라본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캔스벨 가에는 범죄자들이 자주 드나들죠.”


황금빛 눈동자가 조용히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그곳에 비스쿠르라는 여관이 있는데, 종종 범죄자의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백작은 날카로운 빛을 눈에서 지운 다음,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가로등이 불을 밝힌 대로변을 향해,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


타르 자국은 로디움의 복잡한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길을 꺾었다. 추격을 따돌리려 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끝에 도달한 곳은.

거리를 가리키는 팻말에 따르면.


캔스벨 가였다.


“그 백작, 이걸 예상했던 건가?”


경감님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게 틀림없습니다. 저번 살인 사건에서 취조했을 때부터 이상했습니다. 백작은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증거 없이 억측하지 마, 에르바이저.”


스코로비 경위가 비꼬듯 말했다.


“심증밖에 없으면서 백작을 체포했다가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물론 후작 영애께서는 무사하시겠지만, 평민 경관들에겐 불똥이 튄다고.”

“놈을 따라가면 알게 되겠지.”


경감님이 앞장서서 타르 자국을 따라갔다. 그러나 마차는 이곳에 멈춰 선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군요. 마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간 것 같습니다.”

“탐문해 보자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골목을 수색했다. 허름한 빈민가의 냄새.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 가로등조차 설치되지 않은 거리는 판잣집에서 나온 희미한 빛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지하수의 썩은 냄새를 따라 거리를 헤쳐나갔다. 머지않아 여관 표시가 그려진 간판이 하나 보였다.


<비스쿠르>


“경감님.”


내가 눈짓하자 경감님도 곧장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카운터에 들어서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치안청 수사관입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십시오.”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흔한 일이라 이제 놀랍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쇼?”

“혹시 이런 남자가 여기 묵고 있습니까?”


이전에 그려둔 몽타주를 내밀었다. 남자는 등불에 비친 얼굴을 살펴보더니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


“104호실로 가보쇼.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협조 감사합니다.”


우리는 104호실로 곧장 달려갔다. 이미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거칠게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수사관이다! 당장 나오도록!”


하지만 역시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경감님과 스코로비 경위가 몸에 무게를 싣고 힘껏 문에 부딪쳤다.

허름한 방문이 단번에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방안은 어두웠다.

빛 하나 스며들지 않는 공간에 곰팡내가 쏟아졌다. 불길한 침묵이 퀴퀴한 냄새와 함께 우리를 감쌌다.

혹시 범인이 숨어 있을 것을 대비해 권총을 꺼내 장전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스등의 불을 키워 들어 올린 순간.


허공에 매달린 두 다리가 정면에 보였다.

7. 사건의 결말은



구두를 신은 남성의 다리였다.

등불을 들어보니 피투성이가 된 바짓단이 보였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고 경계한 후,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창문이 하나 달린 허름한 방이었다. 등불을 최대한 키우고, 방 안의 촛불을 모두 켰다.


시신의 발밑에는 의자가 하나 쓰러져 있었다. 고개를 떨군 남자의 얼굴은 몽타주와 닮아 있었다.


“시신을 내려보지.”


경감님이 말하자 스코로비 경위가 의자를 바로 세웠다. 마감이 되지 않은 천장에는 들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경위는 들보에 매달린 밧줄을 끌어냈다. 나와 경감님이 밑에서 시신을 받아 내렸다.

비좁은 바닥에 시신을 내려놓고 목에 남은 흔적을 살펴보았다.


“목이 졸린 부분이 너무 깔끔한데.”


경감님이 시신의 목을 젖혀 보였다.


“자살이라면 발버둥을 쳤을 테니, 이렇게 깔끔하게 흔적이 남진 않았을텐데.”


스코로비 경위가 거들었다.


“타살이군요. 기절시키거나 이미 살해한 후에 목을 매단 게 틀림없습니다. 저항한 흔적이 없으니 이미 의식을 잃었거나 면식범이겠군요.”

“그리고 매우 주도면밀한 자겠죠.”


나는 의자에 손을 올렸다.


“자살로 꾸미면서 일부러 의자까지 쓰러뜨려 놓았으니까요.”

“그렇다는 건…….”


경감님이 굵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자살 현장에 익숙하거나, 현장 조작에 능숙하단 이야기겠군.”

“네. 보통 사람이 이 정도로 철저히 현장을 조작하진 않으니까요.”


등불을 들고 방을 더 둘러보았다.

푹 꺼진 침대 위에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 부랑자들이 입을 법한 허름한 옷가지와 찢어진 고급 외투였다.

옷가지를 뒤집어 보니 안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다음, 혈흔을 숨기기 위해 이 옷으로 갈아입었군요.”

“목격자 증언과 일치하군.”


찢어진 고급 외투도 살펴보았다.


“이건 겉감에도 피가 묻어 있군요. 아까 현장에 있던 그 외투 같은데요.”


경감님이 챙겼던 옷 조각을 꺼내 맞춰보았다.


“그렇군. 찢어진 부위도 일치하고, 피도 많이 튀어 있어.”


침대 위의 외투를 만져 보았다. 안주머니에 무언가 만져졌다.


“이게 흉기군요.”


커다란 목공용 끌이 안주머니에서 나왔다. 깊이 찔렀는지 반 이상이 피에 젖어 있었다.


“다른 사건의 피해자 상흔과도 일치합니다.”

“흉기인 건 확실하군. 이 자가 연쇄 살인범인 건 맞는 모양인데…….”


스코로비 경위가 물었다.


“왜 살해당했을까요?”

“입막음을 하려 했겠죠.”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고급 브랜디 병을 살펴보며 말했다.


“마부를 미리 준비한 것도 그렇고, 투자자들 정보를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살인 지령을 내린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단독 범행이 아니니 배후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체포되는 걸 막으려 했겠죠.”


브랜디 병에서 소독약 같은 낯선 향이 섞여 있었다. 병을 흔들어 찌꺼기가 생긴 정도를 확인했다.


“고급 브랜디를 습관적으로 마신 걸로 봐선, 연쇄 살인범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이군요. 살인범을 죽인 자는 이 브랜디에 마취제를 넣어 기절 시킨 모양입니다.”


스코로비 경위는 창문을 살펴보았다.


“창틀에 흙이 묻어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도망친 게 틀림없군요.”

“창밖에 발자국 같은 건 없나?”

“마른 바닥이라 발자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쫓아갈 수는 없겠군요.”

“흐음……. 여기서 단서를 더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군.”


브랜디가 놓여 있는 책상에는 얇은 서랍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열어보았다. 등불로 비춰보니 작게 잘린 종이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경감님과 스코로비 경위가 다가와서 그것을 꺼내 보았다.


“아까 현장에 있던 종이와 같은 크기군. 그런데 전부 빈 종이인데? 이걸 왜 가지고 있는 거지?”


내가 말했다.


“지워지는 잉크입니다.”


분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경감님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지워지는 잉크라고?”

“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잉크입니다. 레몬이나 식초 같은 것에 닿으면 사라지기도 하고요.”

“그런 게 있다고?”


스코로비 경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라펠르넌 백작도 향수를 뿌리는 척하면서 글씨를 지운 겁니다.”

“그러면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건가?”

“한번 확인해 봅시다.”


책상 위에는 메모지와 연필이 구비되어 있었다. 연필을 꺼내 부드럽게 빈 종이를 문질러 보았다.


- 처리 대상

제이 제트만

리아 트리펜

앨런 매트리너

베르너 네펜로스

데니스 브레이든


“모두 피해자 이름이군!”


필트로 경감님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나머지 종이들도……!”


스코로비 경위가 다른 연필로 나머지 종이들을 문질러 보았다.


- 제이 제트만, 오후 6시 기차역 마차 대기실

- 리아 트리펜, 첼트리 가 로실리아 의상실로 유인

- 앨런 매트리너, 오후 4시 30분 우체국

- 베르너 네펜로스, 오전 8시 이겐베르 가 클럽


“이건 살인 지령 아닙니까?”


경위가 끔찍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경감님은 품속에서 방금 전 현장에서 주웠던 종이를 꺼냈다.


“이것도 같은 방식으로 지운 종이라는 거지?”


스코로비 경위가 그걸 받아 연필로 문질렀다. 그러자 아까 내가 봤던 글씨가 드러났다.


- 브레이든 남작, 안리데르 가 클럽으로 유인


그런데.

마지막 문구는 일부러 펜으로 그은 듯 엉망이 되어 분별할 수 없었다.


“이게 전부가 아닌데…….”


내가 짓씹듯 내뱉자, 경감님이 물었다.


“이 부분에도 무언가 쓰여 있었나?”

“네. ‘엠페르테아 체스 클럽’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뭐?”


경감님이 손을 턱에 가져갔다.


“그렇다는 건, 라펠르넌 백작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말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건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 그걸 노리고 이렇게 펜으로 난도질한 게 틀림없어.”


스코로비가 경위가 연필로 그은 종이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로 저 사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저 녀석을 조사하려면 정확한 신원이 필요할 텐데 말입니다.”

“숙박부에 녀석의 이름이 있겠지만, 가명이겠지.”

“잠시만요.”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려 촛불에 살살 비춰보았다.


“희미하지만 눌린 자국이 있습니다.”


지령 위에 옅게 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봉투를 봉하면서 겉봉에 이름을 쓰다 남은 자국 같은데요.”


돋보기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니 이름이 드러났다.


- 제임스 체르티스 본인 외 개봉 금지


“범인의 이름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제임스 체르티스라는 인물을 찾아봐야겠군. 단서는 이게 전부인가?”


우리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 번 더 샅샅이 뒤져보았다.


“더 없는 것 같습니다.”


스코로비 경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잠시만요.”


서랍을 뒤지던 내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서랍 윗부분에 종이 감촉이 느껴졌다.


“뭔가 있습니다.”


종이를 뜯어내서 꺼내보니 하얀 봉투가 나왔다. 경감님과 경위가 내 곁에서 그것을 살펴보았다.

봉투를 열어보니 거액의 수표가 나왔다.


“50만 에르크! 집 다섯 채는 살 수 있겠군!”


스코로비 경위가 놀란 소리를 냈다.

경감님과 나는 그 밑에 서명된 이름을 확인했다.


“엔로트레 백작 이름으로 서명되어 있군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에르바이저 경위, 들어 본 적 있는가?”

“아뇨.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아무래도 가명인 것 같군요.”


어쩌면 라펠르넌 백작의 또 다른 가명일 수도 있고.


“좋아. 더 찾을 수 있는 건 없어 보이는군. 범인이 죽어버렸으니 연쇄 살인도 끝나버린 모양이고.”


경감님이 바닥에 눕힌 사체를 허탈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건은 끝나지 않았군요.”


저절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체르티스라는 이 인물을 도주시킨 마부, 수표에 쓰인 엔로트레 백작. 분명 조직적인 배후가 있는 게 틀림없으니까요.”


***


너덜너덜한 치맛단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하인이 먼저 내 귀가를 알렸는지, 1층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미카엘과 어머니가 뛰쳐나왔다.


“누님! 왜 이렇게 늦었어! 꼴은 왜 이 모양인데!”

“범인 쫓느라 그랬어.”

“아니, 후작 영애로 편히 살면 되지 왜 이 꼴을 하고 다녀!”


미카엘이 엉망이 된 내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나는 기운 없이 놓으라고 손짓했다.


“엘로테. 너무 늦어서 연락을 해보려던 참이란다. 위험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수사관 일은 원래 위험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어머니가 가슴을 팡팡 치며 말했다.


“그게 더 걱정된다는 걸 모르니? 정말 못 말리겠구나.”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게 보여주셨다.


“아무튼 물어볼 게 있단다. 너 혹시 사귀는 남자가 있니?”

“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지.

나는 봉투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꽃과 창살 무늬가 그려진 고급스러운 봉투였다.

겉봉에 쓰인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라펠르넌 백작이랑 이미 얘기가 된 거니? 갑자기 결혼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니?”


한숨을 내쉬며 봉투를 열었다.

질 좋은 종이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내용은.

기가 차서 찢어 버리고 싶었다.

8.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냅니다



“라펠르넌 백작이면 그 사람 아니니? 전에 다과회에서 들으니 동부 시골에 영지가 있다고 하던데. 로디움에 올라온 지는 얼마 안 됐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어지간히 걱정스러우신 모양이었다.


“이전에 얼핏 보니 상당히 잘 생기긴 했더구나. 체격도 좋고, 매너도 좋고, 이제 막 수도로 올라온 것 같지 않게 차림새도 무척 세련되었고. 하지만 결혼은…….”

“어디 봐.”


미카엘이 내 손에 있던 편지를 빼앗았다.


“청혼서? 하, 이것 봐라?”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미카엘이 내용을 읽었다.


“에르바이저 후작 내외께. 이미 엘로테 영애께서 말씀드렸을 것으로 사료되어 펜을 듭니다. 영애와 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드리는 바입니다?”


나는 편지를 다시 빼앗았다. 미카엘이 소리쳤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난 승낙한 적 없어!”


미카엘은 그래도 잔뜩 흥분한 채로 말했다.


“그러면 정신 나간 놈이네! 승낙한 적도 없는 결혼을 하겠다고 지금 청혼서를 보낸 거야?”


설명하자니 복잡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새를 참지 못하고 미카엘이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설마 진짜 얼굴에 넘어가서 승낙한 건 아니지? 이 미친 자식이 혼자 망상에 빠진 거잖아! 그렇다고 말해!”

“아, 생각 좀 하자!”


내가 소리치자 그제야 미카엘이 입을 다물었다.


“수사하다 만났을 뿐이에요. 백작이 결혼하자고 하긴 했는데 승낙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만나서 거절할 테니 그냥 두세요.”


후작가에서 정식으로 거절했다간, 수상한 백작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조금 더 신중히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직접 만나서 거절할 게 뭐 있어! 얼굴도 보여주지 마. 이런 놈은 만나주면 더 기어오른단 말이야!”

“나도 안 보고 싶은데 수사는 해야 하잖아! 어차피 마주칠 수밖에 없어!”

“그놈의 수사관 그만두면 안 돼? 위험한 것도 모자라서 이상한 놈까지 꼬이잖아!”


나는 미카엘을 진지하게 노려보았다.


“그만둘 생각 없어. 내가 알아서 한다면 알아서 하는 줄 알아!”


미카엘이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만들 싸우렴, 얘들아.”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엘로테. 너는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란다.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미남이랑 얽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후작 부인다운 침착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말했다.


“네 혼사를 생각해서라도 백작의 청혼은 분명하게 거절해야 한단다.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온 만큼, 정식으로 거절하는 것도 그리 예의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잖니.”

“백작은 괜히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침착함을 되찾고 목소리를 낮췄다.


“수사상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백작은 무언가 숨기고 있어요. 그걸 덮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뭐?”


미카엘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 그런 수상한 놈이 다 있어? 얼굴만 번지르르한 놈이랄 때부터 알아봤어.”

“정식으로 거절해도 백작은 저를 귀찮게 할 거예요. 그러니 제가 해결할게요, 어머니.”


어머니가 이마를 짚었다.


“엘로테, 대체 무슨 일에 엮인 거니? 정 그렇다면 우리 집안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단다. 네 아버지께 말씀드려 백작의 뒷조사를 해야겠구나.”

“물론 아버지도 아셔야겠지만, 그리 쉽게 정체를 밝힐 순 없을 거예요. 위험할 테고요.”

“그렇다 해도 네 혼사가 걸린 일이란다. 네 아버지가 조심해서 잘 처리하실 거야.”

“그러실 거라 믿어요. 하지만…….”

“그놈의 혼사.”


질끈 입술을 깨문 미카엘이 분한 듯 짓씹었다.


“그렇게 결혼이 중요해? 하여튼 황태자든 미친놈이든 전부 마음에 안 들어.”

“미카엘, 네 누나가 좋은 남편을 만나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엘로테도 행복해지고 가문도 탄탄해지는 거란다.”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누님은 여태껏 행복했잖아.”

“얘가 철딱서니 없이!”


어머니가 뭐라고 하기 전에 미카엘이 먼저 등을 돌렸다.


“총이나 손질해 둬야겠어. 사냥 대회도 코앞이니까.”


그러더니 짓씹듯 한 마디 내뱉었다.


“하여튼 내 눈앞에서 누님한테 껄떡거리는 놈들은 다 쏴 버릴 거야.”

“미카엘!”


어머니가 등 뒤로 소리쳤지만,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 애는 방으로 들어갔다.


“에휴. 저 녀석도 덩치만 커져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소후작이 되었으면 이제 철이 들 만도 하건만…….”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침실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무튼 엘로테. 이번 사냥대회는 황태자 전하께서 주도하시는 거니,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우아하게 앉아 있거라.”


그건 너무 지루하겠는데…….

하지만 그동안 어머니께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다. 미카엘 녀석도 말대꾸만 늘고.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용히 참석할게요.”

“그래, 잘 해보자꾸나. 오랜만에 우리 가족이 모두 참석하는 행사이기도 하니까.”


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 간만에 효도 좀 해야지. 수사관이 된 것도 어렵게 허락해 주셨는데.


거기에 황태자와 결혼 같은 거 안 하겠다고 말씀드리면……아무래도 졸도하실지도 모르니까.


***


제임스 체르티스.

주중에는 그 이름을 조사하며 보냈다.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는 3년 전 전쟁에 참전했다. 황실의 정예부대로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제대 후에는 목공소에서 일을 했다.

본래도 목수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 본업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목공소를 그만두었다.


목공소 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약혼녀가 있었다. 약혼녀는 그가 어느 날, 군인 연금이 나왔다며 큰 집으로 이사하자고 했단다.

군인 연금이 그렇게 많이 지급되었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체르티스는 자신이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약혼녀는 그 말에 납득했고, 둘은 큰 집에서 하녀까지 두고 살았다.


하녀는 체르티스에게 매일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편지의 주된 발신인은 엔로트레 백작이었다.

당연히 귀족 연감에서 엔로트레라는 성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몇 년 치 연감을 뒤져 보아도 엔로트레라는 귀족은 없었다.


즉, 가명이란 이야기였다.


치안청은 일단 이 연쇄 살인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발표하고, 배후의 세력에 대해서는 더 조사해 보기로 했다.


역시 1 황자의 또 다른 가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미카엘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좋은 총이긴 한데 이젠 정말 고물이란 말이지…….”


사냥 대회에 참석한 우리는 천막 아래에 앉아 대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나는 우아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은백색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고, 미카엘은 푸른 사냥복을 입은 채 총을 손질했다.


“조심해. 아버지가 주신 총이잖아.”

“알아. 그런데 이젠 정말 구식이야. 총신도 살짝 뒤틀린 것 같고, 방아쇠도 절걱거려.”

“내가 볼까?”

“됐어. 곱게 치장한 영애가 총 손질하는 거 어머니가 보시면 기겁하셔.”


그 모습이 부러워서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하, 나도 총이나 쏘고 싶다. 1등 할 수 있는데.”

“1등을 원하면 내가 선물해 줄 수 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와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부신 금발에 황금빛 눈동자.

황태자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네.”


부드럽게 미소 지은 황태자가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그보다 영애가 사냥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누님이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있긴 하죠.”


잘한다, 내 동생!

왜 내 결혼을 그토록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한 방은 좋았어!


하지만 황태자는 아무 타격도 없는 듯 피식 웃었다.


“사이 좋은 동생을 두었군, 영애.”


그가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사냥에 참가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내가 영애를 위해 1등을 한다면 받아줄 텐가?”


아, 손수건을 달라는 건가.

사냥을 하기 전에는 영애들이 자신의 연인에게 손수건을 선물하기도 하니까.


“영애가 받아준다면 반드시 1등을 할 테니.”


어쩌지.

진짜로 손수건을 주면 연인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슬쩍 미카엘에게 눈치를 주었다.

미카엘에게 이미 손수건을 줬다고 하면 될 테니까. 미카엘이 내 눈짓을 보고 나서려는 찰나.


“영애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습니다.”


저벅.

검은색 부츠가 잔디를 밟았다.


밤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흐트러지며, 황금빛 눈동자가 달빛처럼 빛났다.


“그러니 영애께서 1등의 영광을 원하신다면 제가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목소리를 쳐다본 이들이 모두 놀랐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랐고, 미카엘은 조각보다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놀라면서도 금세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황태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영애께 정식으로 청혼한 건, 저니까요.”


1 황자, 아니 라펠르넌 백작은 태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사교적이고 호감이 넘치는 얼굴로.


“뭐?”


황태자의 미간이 거칠게 구겨졌다.


“네가, 에르바이저 영애에게 청혼을 했다고?”


백작이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런, 모르셨나 보군요.”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와 영애는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전하.”

9. 왜 당신의 이름은



황태자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

단순한 질투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분명한 혐오였다.

그러나 백작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내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 맞추었다.


“아닙니까? 엘로테.”


온화하던 황태자의 얼굴이 처음 보는 험악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엘로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백작은 내 손을 내려놓았다.


“감히 너 따위가……!”


증오에 가까운 표정을 짓던 황태자는 순간 내 시선을 느끼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에르바이저 후작가가 너 같은 인간과 결혼을 허락할 리가 없을 텐데. 후작이 황실과의 결혼을 마다하고 네 놈과의 결혼을 허락했다고?”

“중요한 건 영애의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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