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왕국 유일의 신녀가 되어 희생되는 호구 여주 니베이아 에르베르에 빙의되었다. 가문을 위해 장녀로서 희생하고, 라이벌인 친구에게 약혼자를 빼앗기고, 왕국을 위해 신녀로서 목숨마저 바쳤지만…… 결국엔 새드 엔딩.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잖아. 희생 따위 엿 먹으라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데드 플래그를 쳐부수고 최종 보스인 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운명을 바꿀 활시위를 당긴다! “내가 내 목숨 지키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 결국 나쁜 짓이라고?”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난 악녀가 되겠어.”
1화
“니베이아 에르베르.”
“네.”
이름이 호명되자 붉은 노을과도 같은 머리 색을 가진 소녀가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엄중한 침묵이 내려있는 탓에 작은 발소리에도 그레이트 홀 내부가 울렸다.
그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방금 전까지 눈물 젖은 호소를 하고 있던 또 다른 소녀 로사나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니, 훔치는 척하며 얇은 손수건 뒤로 조소했다.
니베이아 에르베르. 네깟 게 뭐라고 나를 감히 모욕해.
“니베이아. 너는 에르베르 가문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꾸짖는 목소리였다.
나이가 지긋한 대신관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와 같은 눈빛이었다. 모두 수군거렸다.
또 무구한 로사나를 울리고 괴롭혔어?
니베이아 에르베르는 생각했다. 내가 또 뭘 잘못했더라?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 봐도 딱히 잘못한 건 없었다.
“너는 신의 부름을 받을 성스러운 신녀 후보로서, 같은 후보자인 로사나 파르비즈에게 해선 안 될 몹쓸 짓을 했다.”
“그게 뭐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니베이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그게 뭐라니? 설마, 그걸 죄라고도 생각지 않는 것이냐?”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니베이아! 정말 파렴치하구나. 바로 어젯밤, 로사나를 네 방으로 불러 폭언과 폭력을 가하지 않았느냐!”
대신관이 바닥에 짚고 있는 지팡이가 파르르 떨렸다.
분노를 견뎌내고 있는 그의 턱살처럼 말이다.
니베이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웃어? 니베이아, 지금 상황이 네게는 웃긴가 보구나?”
대신관의 눈에는 짙은 혐오마저 서려 있었다.
아아, 어젯밤이라.
그래. 그랬지. 저기 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쪼개고 있는 로사나 파르비즈의 샛노란 머리털을 휘어잡았지.
“대신관님.”
“네 죄를 그만 인정해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로사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진심으로 사죄해라.”
니베이아는 코웃음을 쳤다.
너무하네,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싫다면요?”
“……뭐라?”
당황한 건 대신관뿐만이 아니었다. 로사나도 웃음기가 싹 가셨다.
니베이아 에르베르. 로사나가 알고 있는 니베이아는, 절대로 대신관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비록 진심은 아닐지라도 용서를 구하고, 억울해하면서도 싫은 소리는 하지도 못하고.
그러나 그렇게 나왔어야 할 니베이아 에르베르가 지금 뭐라고 했나? 싫다면요?
니베이아는 언제 웃었냐는 듯 입가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싸늘하기 그지없는 녹색 눈으로 대신관을 직시했다.
“싫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 제가 로사나를 부른 게 아니라, 부른 적도 없는데 로사나가 제 발로 기어들어 온 겁니다.”
평소처럼 시비 털려고요.
“누가 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방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다! 네가 벌인…….”
“저기요, 할아버지.”
“하, 할아버지……?”
대신관의 눈에 당혹감을 넘어 황당함이 서렸다. 제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니베이아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대신관을 아래위로 훑은 뒤, 친절히 손가락을 치켜들어 그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네, 할아버지. 저 혼자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죠. 아, 뭐 진짜 그랬으면 사과도 벌써 했지.”
니베이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요, 저 혼자 때린 게 아니라서요. 먼저 내 뺨 갈긴 건 쟨데, 왜 나 혼자 폭력 가해자가 되어있죠?”
“……뭐라?”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선빵 갈겼지.”
“서, 선빵……?”
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에 그레이트 홀 내에 있는 모두가 당황했다.
아니, 이런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조용했던 실내에 소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니베이아 에르베르. 보통 호구가 아닌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꾹 참았겠지.
왕권만큼 강력한 권세를 누릴 수 있다는, 신권을 가진 신녀가 되기 위해서 말이지.
그리고 또…… 그깟 되먹지도 않은 약혼자 때문에.
하지만 이 몸이, 이 모든 인생이 이제 제 손에 달린 만큼 그녀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니베이아에게 모든 걸 참고 살 만큼 중요했던 신녀의 자격이나, 혹은 그 공작인지 뭔지 하는 새끼 같은 건 제게 코딱지만큼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쟤가 내 약혼자가 사실 자기를 좋아한다니 어쩐다니 하면서 개소리를 하더라고요.”
니베이아는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런 개새끼 너나 가지라고 했더니 내 뺨을 갈겼고, 나도 처맞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방어 차원에서 손이 나간 것뿐이에요.”
좌중들과 대신관은 입이 떡 벌어진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로사나 또한 당연히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는지 얼어붙어서는 파리한 안색으로 표정 관리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청중들을 보며 니베이아는 나풀거리는 신녀복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웨딩드레스도 아니고 치렁치렁하다 못해 소변 누러 갈 때마다 귀찮아 죽을 뻔했네.’
신녀로서의 순결과 신비로움을 상징한다는 나풀거리는 흰색 비단에 금색 실로 수놓아진 신녀복.
니베이아는 제게 꽂힌 시선들을 하나씩 마주 보며 단숨에 옷을 풀어헤쳤다.
“히익!”
니베이아는 놀라서 입을 가리는 사람들을 보며 여상하게 웃고는 신녀복을 힘껏 위로 던졌다.
팔랑팔랑하며 떨어진 신녀복이 공교롭게도 대신관의 벗겨진 머리 위에 척 올랐다.
“믿든 말든 맘대로 하시고요. 왜냐면 나 신녀 같은 거 안 할 거거든. 그럼 안녕, 할부지. 치매 조심하세요.”
평생을 호구로 살아왔던 니베이아 에르베르의 몸에 빙의된, 전직 양궁 챔피언은 거침없이 홀을 가로질러 출구로 향했다.
이런 답답하고 고지식한 곳에서 3년이나 버텼다니.
그래, 니베이아 에르베르. 끈기 하나는 인정.
2025.11.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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