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농민 출신의 용사. 성녀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제 1황녀 이리나의 첩이 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희생만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선택한 '자신의 의지' 결과는 파멸뿐이었다. '복수해라' 마왕의 본체와 계약을 맺고, 황국, 황녀, 세상에 복수하는 것.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를 따른 두번째 일.
몸에 칼날이 한 치만 들어와도, 사람은 죽는다. 피가 30퍼센트 이상 빠져나와도, 죽을 확률이 절반 이상.
나는 수십번의 창칼을 맞고, 욕조를 가득 채울 만큼의 피를 몇 번이고 흘렸었다.
계속해서 희생해오고, 죽을 고비를 겪은 용사라는 이름의 여자. 그게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은.
“죄인 아슬란은 용사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왕을 토벌하지 못하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실책을 저질렀으며, 성녀를 유혹해 함께 도망쳤다.”
이리나. 이리나는 괜찮을까? 그래. 괜찮겠지. 그녀는 성녀니까, 황실에서도 쉽게 죽일 수 없을 것이다. 탑에 유폐되어 평생을 안에서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죽는 것보다 낫다. 부디 그녀가 내 죽음을 잊을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이에 황실은, 죄를 물어 죄인 아슬란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처형은 지금 진행될 것이며,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흉흉한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 그래. 검도 아니고 도끼인가. 내게 더 이상의 명예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원래 명예가 없었던 나에게는 그저 그렇구나- 싶을 뿐이지, 분노나 배신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멀리서 시선이 느껴진다. 제 1황녀 트리아.
예전, 용사 즉위식 때 만났던 게 그녀와의 첫만남이었다. 땀냄새와 거름냄새가 나는 농민이라고, 내게 향수를 마구 뿌린 다음, 머리 위로 와인을 들이부었다.
수치스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때 나는 용사가 아니라, 막 농민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으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은 것이 교단의 성녀, 이리나.
날 대신해 화내줄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깊고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였다.
그녀는, 농민이었던 나를 ‘사람’으로써 봐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성녀와 함께, 마족의 시체를 밟고 진군했다. 동료를 여럿 잃고, 혀에서 맛이 느껴지지 않으며,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지 않고, 몇가지 색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리나가 준 건빵은 고소하면서도 달콤했다, 땀을 많이 흘려 어지러움을 느끼기 전, 이리나가 휴식을 취하자고 먼저 말해줬다.
빛바랜 세계, 색을 잃은 내 시야에도 그녀는 여전히 찬란한 백금빛 광채를 갖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괴물과 마족을 죽이는 것만 할 줄 아는 나와, 뭐든지 잘 하는 그녀. 나 혼자서만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원정 중, 큰 용기를 내어 바보같은 일을 저질렀다. 그것이 내 첫번째 의지
“제가. 잘하는 건 없지만...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성녀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재주가 있다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말하고 나서도 후회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은 고백을 해 버린거지? 내가 뭐라도 되나? 가만히 있었으면, 좋은 친구로 남지 않았을까?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제가 하나하나 당신에게 행복을 가르쳐줄게요. 그러니까 성녀님이 아니라... 이리나라고 불러주세요.”
가볍게 웃는 그녀를 보고, 나는 반드시 성녀님, 아니. 이리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맹세했다.
마지막 싸움에서 마왕이 도망쳤다.
빈사 상태의 마왕이 대마법을 시행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차원의 균열을 열고, 그 틈으로 넘어갔다.
우리가 추적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토벌은 실패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마왕을, 우리는 평생 기다리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황실 파티 도중, 트리아에게, 본인의 첩이 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내가 가졌어야 하는 부와 명예를 안겨주겠다고 말한다.
비틀린 웃음, 아마 ‘용사를 첩으로 삼은’ 타이틀을 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거다. 그저 트로피 하나를 얻고 싶은 느낌이었겠지.
내 의지로 상대를 거부했다.
과분한 영예를 안겨줄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이후로,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소문. 내가 용사로써 왕을 대신할 존재라는 신탁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성도에 퍼졌다.
밤에 습격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암살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했다.
성도를 떠나게 되었다. 한적하고 척박한 북부의 외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나는 나와 함께 떠났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행복함을 느꼈다.
내가 간과한 것은, 나는 명예를 모르고 살았기에 명예가 더럽혀졌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황실에서 평생을 떠받들여지고, 항상 얻고싶은 것을 전부 얻을 수 있었던 황녀에게는, 명예를 잃는다는 것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몰랐다.
결국 토벌령이 내려왔다. 이리나와 함께 계속해서 도망쳤다.
도망치고, 계속 도망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잡혔다.
이리나. 이리나는 괜찮을까.
“용사... 미안하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리나...아니 성녀님은 괜찮으신가요?”
“...정말로 미안하네.”
불길하다. 마왕을 앞에 뒀을 때에도, 이런 불길함은 찾아온 적이 없다. 정수리를 송곳으로 푹- 찌르는 것과 같은 공포심이 솟는다.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다. 만약 이리나가 잘못된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상상하기도 싫은 망상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나는 그것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멀쩡하게 있어줘. 나보다 먼저 죽지 말아줘. 안전하게 있어줘.
“그리하여, 전 성녀. 이리나에 이어 용사의 사형을 실행하겠다.”
이어? 잇는다고? 무엇을? 처형을? 누구를? 어째서?
절망스러운 눈으로 황녀를 바라봤다. 떨리는 시야 속에서 황녀의 비틀린 웃음이 보인다.
황녀는 손을 들어올린다. 손에 손수건이 감겨있다. 하얀색 실크, 자수는 내가 이리나와 함께 배우며 서로에게 새겨준 것.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겠다며, 하나하나 바늘을 잡는 방법부터 시작해 예쁜 모양의 자수를 생각하는 것까지 알려주었지만, 결과물은 삐뚤빼뚤한 하트와 어설픈 사람 모양의 자수.
내가 새긴 자수다.
내가 이리나의 손수건에 새겨준 자수다.
2025.11.14 09:41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