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그날 정오까지는 운수가 좋았다. 가난한 약초 채집 꾼이 귀한 산삼을 발견했는데 설명이 더 필요할까? "아, 매일 지금 같았으면 좋겠다." 그저 찾아온 행운에 기뻐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비극의 서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뜻밖의 횡재에 신이 나서 산에서 내려가던 길, 영문도 모른 채 천사의 얼굴을 한 낯선 남자에게 살해당하고, 바로 직전의 순간으로 회귀한다. 매일이 '지금' 같길 바랐던 그 순간으로. 앞으로 지겹게 보게 될 산삼 앞으로. 그때부터 내 삶은 살아서 겪는 지옥이었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나를 죽였고, 나는 어김없이 산삼 앞에서 되살아났다. 더군다나 그 시점은 나고 자란 마을이 몰살당하고, 부모님이 죽은 이후였다. 수십 번을 죽고 되살아나며, 절망에 빠져 있던 중에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무한한 회귀가 어쩌면 복수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독하게 마음을 먹고 복수를 다짐한 나는, 지난 삶에서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그 남자에게서 간신히 벗어나 영주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주인 백작에게 마을 학살 사건의 비극을 밝히며 도움을 청하려던 그 순간, 난데없이 내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다. "네 머리카락 '더티 화이트'는, 네가 백작가의 피에 흐르는 치유력을 타고났다는 증거이다." 있는 줄도 몰랐던 치유력 덕에 갑자기 백작 영애가 된 나는, 졸지에 불구가 된 공작가 후계자의 약혼녀로 팔려 가게 된다.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나를 죽이던 남자를 약혼자로 만났다. 원수가 다리도 못 쓰고 눈도 안 보이는 상태로 나타나다니. 하늘이 내 복수를 위해 내려준 기회가 아닐까. 그런데 그 남자의 상태가 이상했다. "베일리, 당신은 마치 펠리컨 같아요.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집어삼켰죠."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잔혹하게 나를 죽이던 기억 속의 그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천사 같은 얼굴로 맹목적으로 나를 따르는 온순한 남자만이 앞에 있었다. "제가 죽길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스스로 내게 목을 바친 원수. 이제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며칠 안으로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의사가 진료 가방을 챙기며 일어서자, 그를 거들던 사용인들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반신을 모두 붕대로 덮을 정도로 깊은 부상 때문일까? 옅은 숨을 내쉬는 남자의 얼굴은 혈색 없이 파리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화려한 장식의 창틀을 스쳐 들이치는 석양빛이 병상에 누운 남자의 얼굴에 날카로운 그늘을 만들었다.
웃지 않으면 저토록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한때는 표정이라는 것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표정 없는 그가 낯설기만 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저 남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인 내 부모처럼 그 역시 공평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내가 얼마나 간절히, 또 부지런하게 기원했는지는, 나를 지켜보던 신이 있다면 증언해 줄 것이다. 이 성안 구석구석 그를 죽일 방법을 고민해 보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이토록 안도감이 드는 걸까. 마치 그를 용서하기라도 할 것처럼.
2025.11.15 00:06
2025.11.1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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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5 00:04
2025.11.1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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