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6년 전 삼중 추돌 사고. 칠흑 같은 어둠 속 폭풍우가 퍼붓던 밤. 세리는 흰 연기가 풀풀 나는 검은 차량의 뒷좌석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조심스럽게 그의 까만 머리칼을 눈 위로 걷는 순간 천천히 그의 입이 열렸다. “윽, 시X.” 남자의 갑작스러운 욕지기에 주춤한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세리는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반응이 없어서 더 세게 후려쳤다. 그러자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신이면.” “네?” 퍼붓는 빗소리에 뭐라 중얼거리는지 알 수가 없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세리는 제 귀를 남자의 입술에 바짝 붙였다. “저기…. 잘 안 들려요. 다시 말해봐요." “.......” ‘죽어가는 건가?’ 세리는 남자의 상반신을 살폈다. 그의 흰 셔츠의 목 언저리가 온통 피바다다. “사, 살려 줘요. 제발….” 남자의 옆자리 바닥에 잔뜩 웅크린 여자가 온몸을 덜덜 떨었다. 피범벅이 된 다른 남자는 고개가 핸들 위에 처박혀있다. 미동조차 없다.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둘은 죽어가고 있었다. 밭은 숨을 내쉬던 뒷좌석의 남자는 좀 전보단 조금 더 큰 목소리를 냈다. “귀신이면 꺼져.” 그때 그 사건. 기획자와 범인은 누구인가. 대령도 반장 자리를 넘기고 싶은 기세리, 동네 주민들의 도장이 필요한 도치열 상무. 그리고 엄마 잃은 다섯 살 도고맹. 계약으로 얽힌 그들이 대령도에서 펼치는 복수극과 로맨스 조직암흑물 # 재회# 복수# 계약# 계략 # 로코# 약피폐
‘아우….’
이것은 보름달 뜬 밤 외로이 짝을 찾다 지쳐 숲 한쪽에 풀썩 쓰러진 늑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아니다. 한 많은 작가 기세리가 작은 카페를 열기 전 기지개를 켜다 생긴 어깻죽지의 통증에 절로 난 곡소리다.
충청도 변령군 대령리 대령섬. 해안가가 바로 보이는 이층집. 하얀 페인트칠이 조금 벗겨진 따스한 베란다에서 갈매기 소리를 알람으로 삼는 하루의 시작.
느지막이 일어나 꽃차 찬 잔을 마시고 매일 미네랄이 듬뿍 담긴 상큼한 바닷바람을 가로지르면서 근거리 출근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 여기까진 늘 꿈꾸던 작가의 세계로 완벽했다. 이번 달 저조한 가게 정산서와 귀여운 인세 입금액을 보기 전까지는.
하아-
뿔테안경을 치켜올린 세리의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숨소리가 작은 가게 저 끝까지 퍼졌다. 이래서야 여기서 1년 이내에 서울살이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겠나. 이곳 대령도와 다리 하나로 이어진 소열도. 언젠가부터 두 섬은 다 누가 곧 무인도 리스트에 먼저 오르나 경쟁하듯 거주 인원이 줄어들었다. 떠나는 이유는 각기 다양했다.
대학 입학, 구직, 갑작스러운 병원행. 저마다 이 섬에서 줄 수 없는 것을 찾아 떠나야 했기에 잡을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세리는 팔자에도 없는 이 동네 반장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재스민차를 우려 마시던 세리는 어제 미리 적어둔 오늘의 계획을 살폈다. 한쪽은 섬의 일지. 한쪽은 개인 일지.
'오늘 해야 할 일이 뭐더라.’
가게 한 달 쓸 생필품이 오는 날이고, 바닷가에 놀고 있을 미취학 애들 간식도 챙겨줘야 하고. 점검한 메모를 죽 내려보던 세리의 연필이 한곳에 머물렀다.
편지. 지난주 갑자기 쓰러져 병원선에 실려 간 서울댁이라 불리는 아주머니. 도고맹의 엄마가 미리 남기고 간 편지를 다시 펼쳐 보던 세리의 코끝이 금세 빨개졌다. 눈가를 얼른 닦은 세리는 다시 다이어리에 표시했다. 여름 휴가철도 이제 끝물이라 관광객이 이전처럼 많지 않고 출판계도 이전과는 다른 온도 차를 보인다.
이게 다 작년 작가 사인회 때 생긴 그 일 때문인 것 같아서 세리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첫 동화가 생각보다 히트하고 서점 한쪽에서 어린이 팬들에게 작은 사인회를 하고 있던 감격스러운 날에 건물 기둥을 스치고 지나간 낯익은 그림자.
‘아빠?’
사인을 해주다 말고 달려가 등산 모자를 쓴 중년 남자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놓치고 말았다. 분명 아빠였는데. 다시 제 자리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던 세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일부러 웃긴 상상을 하려 애썼다.
‘자까닝... 우더요?’
‘히잉, 자까닝 우지마요. 도깨비가 때려쪄요?’
자신을 빙 둘러싸며 토닥이는 어린이들의 말에 바보처럼 더 펑펑 울고 말았다.
이런.
'행복한 도깨비 섬에 오세요.’를 쓴 작가가 사인회에서 중대 실수하다니. 출판사 측에서 어찌어찌 수습해서 잘 넘어가긴 했지만. 차기작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건 그날 어렵게 만난 아빠를 다시 잃어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일지도.
아동문학으로 유명한 태령출판사 대표 최태한. 동창인 그 녀석은 완고를 달라고 성화를 부리다 지쳐서 아예 담당 피디님까지 이 섬에 보냈건만. 도통 글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요즘 세리의 상상력을 갉아먹는 다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개똥 뺑소니범. 솔직히 줄어드는 통장 잔액만큼이나 범인이 신경 쓰였다.
부쩍 자주 보이는 흔적. 이런 큰 분비물을 방치하고 사라지는 파렴치범이 이 섬에 살고 있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번엔 큰 맘 먹고 새로 장만한 새하얀 운동화까지 버려서 보름도 넘게 햇볕에 말렸다.
내 올해는 기필코 잡고 말리라 그 범인을. 세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닫은 가게 문에 슈퍼 연락처를 적은 팻말을 걸어두었다. 아 맞다 편지. 대충 사과 모양으로 머리를 묶고 나가다 다시 들어온 그녀의 손엔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
“좀 늦었네. 휴가철도 끝나가는디, 뭐 하다 이제 온 겨?”
“이거 가져오느라고요.”
슈퍼 앞 평상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아무래도 고맹이 일 상담에는 할머니가 적임자 같아서.
포동포동한 얼굴, 아픈 엄마 앞에서 가끔 보여주는 의젓함까지 가진 아이. 도고맹은 이 동네에서 가장 귀염을 받는 다섯 살 꼬마다.
“애 엄마는 다 알고 있었나벼... 이렇게 부탁한다고 써 놓은 거 보믄.”
편지를 읽은 할머니는 좀 전의 세리처럼 눈시울이 빨개졌다.
“앞으로 크게 바쁠 일은 없고 저를 잘 따르지만. 한 달 지나면 애도 눈치가 빤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잠 한숨 못 잤어요.”
“우리 고맹이 불쌍해서 어뜨켜.”
“그래도 할머니가 계셔서 다행이에요. 적지만 친구도 있고.”
“내가 뭘. 고맹이가 맨날 찾는 이는 우리 기 반장이제.”
솥뚜껑 할머니는 다시 뽑은 티슈로 눈가를 닦으며 세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게 열기 전에 새참 갖고 가. 옥수수랑 감자 삶은 거. 새우장도 갖고 가서 저녁에 먹고.”
투명한 유리 반찬 통에 든 대하 새우장을 본 세리는 침을 꼴딱 삼켰다.
“이 귀한걸요?”
“오늘은 예약도 없으니께 개얀혀. 고맹이랑 노나먹어. 이?”
새우장을 아이스 가방에 꼼꼼하게 챙기던 솥뚜껑 할머니는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짝 쳤다.
“참! 오늘 유 선장이 시내 갔다 오는 날 아녀?”
“아까 뱃고동 소리 들리는 거 같던데. 도착했나 같이 가봐요.”
“내 정신 좀 봐. 오늘 돼지고기랑 쇠주 다섯 짝 받아야제.”
빠른 놀림으로 평상에서 내려와 수레를 끌고 오는 할머니 모습에 세리도 미리 챙겨온 이동식 수레를 꺼내 들었다. 대형 유람선은 어쩌다 성수기 때 출동하니 새우잡이 배 유 선장이 육지 시장에 경매 나갈 때마다 도움을 받는데. 오늘이 그날. 부탁한 생필품이 오는 날이라 섬 주민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다.
2025.11.15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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