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 네가 한평생 처참해지길 간절히 바래. " 오래 전에 절연했던 친구. 회귀한 그가 갈아낸 복수의 칼 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근데... 그 회귀에 나도 같이 돌아온 모양인데...? " 너, 나랑 절친하자. " 할 수 없지 그럼. 최선을 다해 이 복수를 피하는 수밖에.
“ 너는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나질 말았어야 했어. “
핏발 선 증오가 내 목을 조여온다.
“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너를 진창에 처박아버리고 싶다고 말한다면, 넌 이 말을 믿을래? “
지금 내 전신을 옥죄어오고 있는 건, 단지 눈 앞 상대의 격폭하는 감정뿐만이 아니었다. 달빛이나 겨우 새어들 정도로 이 곳을 침식한 짙은 어둠이라든가, 이 자의 모든 말마디를 천둥처럼 키워 내 고막에 친히 내리꽂아주는 광활한 정전正殿의 적막, 혹은 아까부터 내 얼굴 위로 계속 쉴새없이 떨어지는 이 새빨간 누군가의 피 같은게, 나를 이리 꼼짝도 못하게 만든다. 눈을 살짝 왼편으로 굴려 당장의 시야에 닿는 것에 집중했다. -저 천장 한 가운데에 새겨진 태극문양만 아니었으면 이게 어느 나라의 궁인지도 모르겠네. 꽤 웃기다. 나는 때에 안 맞게 퇴색한 조국의 정체성이나 한 번 비웃었는데, 목 끝에 날카로운 칼을 댄 채 살해 협박이나 듣는 상황에서 할만한 생각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이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가짜 태평함이라도 필요했던 것뿐이다. 마치 허덕대는 운동선수가 힘겹게 들이키는 한 줌의 산소처럼.
“ 하? 이 지경에 와서도 넌 딴 생각을 하네? 지금 사람이 묻잖아…. 너를 분쇄기에 갈아 하수구에 처넣고 싶은 내 심정을 믿냐고. “
“ …어 믿어. 나를 무슨 형태로든 아작내고 싶다는 너의 그 분노를 믿어. “
“ 분노라고 하지마. 분노라는 시시한 두 글자조차 아까우니까. “
“ 그럼 뭐라고 해줄까, 역겨움? “
“ 말로는 절대 못 담아. “
“ 그거 유감이네. “
하하하ㅡ! 뱉은 말과는 달리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무표정으로 뚝하게 대답하니 상대방은 마침내 실성한 듯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정말 미쳐버린 사람처럼. 그에 맞춰 내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가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한기가 들어찬 이 대리석 바닥 위에 나는 발목의 근육이 전부 잘린 채 널브러져 있었고, 놈은 완전히 무력화 된 이 몸 위에 올라타 자신 안에 깊숙이 새긴 살의나 혐오 같은 걸 내 안면에 아낌없이 퍼붓는 중이었다. 그 강렬한 증오의 감정들은 끈적히 흐르는 피가 되어 이 피부 위로 떨어졌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게 용암보다도 뜨거워서, 너무 뜨거워서 얼굴에 무언가 닿는 매순간마다 화상을 입는 기분이었다. 폐가 아팠다.
“ 하하, 진짜 좆 같은 말만 쏙 골라 잘 한다 너. 그 웃기지도 않은 이름처럼 한결같아. “
“ … “
“ 시발… 왜 대답을 안 하는데. 이젠 내 말에 반응하는 것조차 포기하겠다는 거야? 어차피 내 손에 곧 죽으니까? 그래……, 좋아! 네가 희망을 잃고 체념한 모습도 난 아주 맘에 들어!... 근데 어쩌지 한결아, 난 널 그냥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어. 이미 파리 목숨보다도 무가치해진 네 목을 따봤자 그 손아귀에서 박살난 소망들은 이미 재가 되어 돌아오질 않거든. “
“ … “
한 때 우리가 힘께 꿈을 펼칠 미래라 믿어왔던 이 넓다란 대정전에서 그가 배신, 절망 같은 얘기를 꺼내는 것을 나는 입 닥치고 가만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게 뭔 말을 할까. 뭐 미안하다? 참나……. 장담하건대, 진심을 담보하지도 못할 그 하찮은 세마디에 그가 더 분노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도 숨을 한 번씩 몰아쉴 때마다 번뜩이는 이 백색의 검날은 내 대동맥을 향해 0.1mm씩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전혀 공포스럽지가 않았다. 제례용 환도 따위가 아니라, 정말 살인을 위한 진예도를 들이밀고 있었어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빨리 끝이나 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난 삼십몇년간 나만을 위해 살아온 과거의 나는 뭐라 할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죽음을 멋진 탈출구라 여기고 있으니까. 이 놈 말대로 난 구제불능한 새끼라 속죄는 힘들고 소멸이 빠르다. 책임도 안 지고 비겁하게 도망친다 해도 할 말 없다. 딱히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더 솔직해지자면, 난 이 모든 상황이 별로 유감스럽지도 않았다. 다 자업자득인거지. 난 손에 피가 스밀 정도로 적셨고, 현재 그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었다. 뭐 말한다고 믿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나를 향해 하는 모든 증오의 말들을 나는 진심으로 납득마저 하고 있다. 방금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나야 지금 죽는게 백번 낫지만, 네 입장에서 의미도 없고 아깝긴 할 것 같다. 지금 너에겐 내 의견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겠지만.
“ 있잖아, 널 회유해보는 세상 쓰잘데기 없는 짓은 이제 안 할거야. “
“ 그래. “
“ 그러니 이제 내가 뭘 할지 맞춰봐. 네 번뜩이는 잘난 두뇌로 잘 생각해보라고. “
“ 음… 어쩌냐, 전혀 모르겠는데. 원래부터 네 행동은 늘 내 예상 밖이었어. 너도 알잖아. “
“ 그래, 그랬지. 생각해보니 그랬네. 평소엔 날 꿰뚫어보는 새끼가 항상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날 못 읽었었어… 그게 한 십 년전이었나. “
“ 13년. “
“ ……너 설마 아직도 그 때의 우리를 생각하고 있는거야? “
“ … “
“ 아... 씨발. 너 진짜 답도 없는 개씹쓰레기다. “
이젠 숨마저도 못 쉴만큼 농도가 짙어진 혐오의 열기가 대가리를 꽈악 압박해온다. 내가 그 시절을 기억한다는 그 말이 그를 더 동요하게 만들었다. 윽, 반사적으로 입에서 새어나온 고통의 신음이 다시 내 귀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청각마저 고장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목의 피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줄줄. 바닥을 타고 내 상체를 지나 발목께에 흐르던 피웅덩이와도 마주한 모양이다. 젖기 시작한 바지와 손금이 그걸 알려준다. 나도 아는데, 자꾸 붉어보이는 것들이 내게 죽음을 상기시켜주었다.
“ 어? 안되지. 넌 아직 죽으면 안돼. 눈 떠. 내가 뭘 할지는 알아야 네가 더 비참하게 죽지. “
누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귀에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드문드문 알아들은 단어들로 겨우 이해한 그의 말이 더 고통받으라는 종용뿐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그냥 순순히 따라주기 위해 그나마 조금 움직여지는 눈썹근이나마 애써 꿈틀댔다. 그는 여전히 이가 다 드러날 만큼 입꼬리를 기괴할 정도로 뒤로 당겨 씨익 웃고 있었다. 아… 역시 뭘 닮았는데, 조커였나. 이마에서 흐르던 피에 가려져 아까는 안 보였던 그의 눈물을 언뜻 발견하자마자 나는 학생 때 본 고전영화 속 주인공이 떠올랐다. 둘은 닮아있었다. 모든게.
“ 나 회귀할거야. 너랑 처음 만났던 그 때로. “
“ … “
“ 분명 개소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알아 안 믿길거라는 거. 게다가 넌 옛날부터 지독히도 현실적인 새끼였으니까. 근데 있지. 등신같던 그 시절과는 다르게 지금의 나는 네 믿음 같은 거 좆도 신경 안 써,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앞으로 네가 오늘보다도 훨씬 더 처참하게 망가질거라는 사실뿐이야. “
“ … “
이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자꾸 귀에 대고 뭐라 지껄이는데, 회귀, 믿음 같은 단편적인 명사들만 얼핏 들은 것 같다고 말하는 한 줄기의 감각을 부여잡고 나는 눈을 아주 느리게 감았다, 떴다. 여전히 눈 앞엔 눈물 문신을 양 쪽에 새긴 조커가 비참히 웃고 있었다.
“ 나 모든 걸 다시 시작할거야. 너 같이 상종못할 쓰레기들은 제대로 처단해가면서, 그렇게 나와 내 사람들을 위해 미래를 개척해나갈거라고. 알아들어? 여기서 너가 낄 수 있는 자리는 응징당하는 자의 좋은 예시가 되어 수작 부리려는 개새끼들 마음에 공포를 심어주는 것 외에 없어. 어차피 기억도 못하겠지만... 니가 앞으로 받게 될 고통을 함께 곱씹고 새겨가며 죽어보라고 이렇게 친절히 얘기해주는 거야. 난 네가 잊게 될 기억조차 비관으로 절이고 싶거든. “
“ ... “
“ ……야. “
“ ... “
“ 야 이한결. “
“ ... “
“ …죽은거야……? “
“ ... “
“ …하. 씨발 진짜 끝까지 사람 기분 뭣같게 만들네……. “
문도안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발 밑에 깔린 이 자의 비참한 말로를 그토록 소원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너무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빨리 회귀하고 싶었다. 1분의 지체도 없이 당장. 지금 바로 당장.
오늘까지 겪어왔던 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고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다면……
달그락, 달그락, 철컥.
인간의 언어를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던 귀가 내게 인생 최후의 소리를 들려줬다. 뭔가 여는 것 같기도 하고 잠그는 것 같기도 한… 그 묘한 금속 소리에 얼마 남지 않은 의식이 예리하게 귀를 기울인다. 저승문이 열리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평생 사후세계를 안 믿었지만 워낙 주변에 독실한 불자들이 많았던지라 꺼져가던 사고가 염라와 화염 등을 의식에 새겼던 건 의지와는 상관없는 신체의 반응이었다. 불. 용암. 복수. 뜨거운 것들로 머리가 가득찬다. 난생처음 겪은 죽음은 온통 붉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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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3 11:47
2025.11.1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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