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그 말로 누군가는 더욱 비참해지고 초라해진다.
마치, 지금 이 결과를 만든 건 그런 선택을 내린 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엘렉트라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감을 생각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수십 분이 지나 있었다.
길게 늘어진 청록색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정돈하며, 널브러져 있는 종이들을 눈으로 훑었다. 호박색 금안이 흐리멍텅한 모습을 하고선, 만년필로 적힌 글귀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때, 문이 덜컥 열리더니 늘 보아 왔던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딱딱하고 상투적인 그 표정은 반복되는 나날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엘렉트라. 대장이 부르신다."
이미 저 남자에게 노크를 바라는 것은 포기했다. 이곳은 그리 격식 있는 곳도, 그녀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주는 곳도 아니었으니까.
남자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엘렉트라는 대장이라 불린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방 안은 이제 권태로운 일상의 일부였다.
"부르셨나요. 칼릭스 님."
칼릭스라 불린 그는 만년필을 내려두고 그 진녹색 눈동자를 굴려 엘렉트라를 올려다보았다. 그 느긋한 움직임과, 꿰뚫는 듯한 시선에 그녀 역시 일순 흠칫해버리고 말았다.
"요즘 웨스테리아 쪽에 있는 놈들이 신경 쓰여."
"이유는요."
"그다지 없어. 감이니까."
칼릭스가 턱을 괴며 한 손으로 머리를 넘겼다. 검푸른 비단실같은 그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웨스테리아라면 몇 달 전에 들어온 놈들이 임무를 하고 있는 곳 아닌가요."
"맞아. 하지만 그곳에서 뭔가 삐걱거리기 시작했어. 우리 테일로스는 인력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는 구조라,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대단히 이상한 건 아니지만, 뭔가 쎄해서."
그는 건조하게 말하며 시가를 집어들었다.
"필요하시다면 알아보겠습니다."
"역시 넌 대화가 빨라서 좋아."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저 남자의 표정이 늘 비릿하게 보이는 것은 기분탓일까.
"그래서, 엘렉트라."
엘렉트라가 움찔했다.
"나를 죽일 거라고 하지 않았나? 늘 기다리고 있는데."
"...언젠가는 죽일 겁니다."
"좋네. 그렇게 가족이 엮여 있을 때 유독 멍청해지는 게 어느정도 보기 좋거든."
"본인 손으로 다 부숴 놓으시고는 태연하십니다."
"나도 그놈의 딸인 널 살려놓을 거라고 상상은 못 했어."
그렇다면 자신을 왜 살려뒀는가? 왜 끌고 와 이곳에 살게 했느냔 말이다.
'더 대화할 가치가 없어.'
"하실 말씀이 더 남아 있지 않으시다면 가보겠습니다."
엘렉트라는 곧장 칼릭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무슨 감정이 섞인 것일지 모를 한숨을 뱉어냈다.
웨스테리아, 웨스테리아라.
마침 오늘 그쪽에 있던 조직원들이 본부로 돌아와 재정비를 한다. 그래서 그가 엘렉트라에게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할 일을 빨리 해버릴 수 있다는 건 엘렉트라에게도 환영이었다.
***
웨스테리아에 있는 정부 기관과 연락하는 것은 꽤나 순조로웠다. 이 제국의 가장 위험한 범죄 카르텔인 테일로스. 이곳에 잠입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던 터라, 일을 진전시키지도 못하고 처리당할까 마음을 내내 졸였는데 말이다.
루이스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조각 같은 얼굴을 간지럽히는 백발과, 그에 어우러지는 푸른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정부의 개니 뭐니 하며 황실 소속의 경찰들을 험담했던 웨스테리아에서의 동료들은 알까. 사실은 그 주인공이 자신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루이스라는 것을.
'스파이 생활이라는 게 쉽진 않네.'
어느 정도 경찰의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서 만만하게 보고 하겠다고 한 것인데,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을 한 듯하다.
욕실에서 나온 루이스는 담배를 챙겨 밖으로 향했다. 가을밤의 시원한 공기가 그를 반겼다.
이 짓거리도 거의 한두 달쯤 했나.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황실로 복귀하고 싶었으나, 이대로 돌아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터였다. 나름 능력 있다고 인정받은 자신의 이미지가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2025.11.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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