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시절, 이름만 들어도 복도가 조용해지던 남자. 이태건. 싸움, 정학, 불량한 무리, 선생님도 포기했다는 소문까지. 민서는 3년 내내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무사히 졸업한 줄 알았다. 같은 대학, 같은 캠퍼스에서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다시 만난 태건은 여전히 위험했다. 무심한 눈빛, 낮은 목소리, 사람을 밀어내는 태도. 하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그의 품에는 작은 아이가 있었다. 문제는 그 아이가, 수많은 사람 중 하필 민서만 보면 웃는다는 것. 울다가도 민서가 안으면 울음을 그치고, 낯선 사람을 싫어한다면서도 민서의 손만 꼭 잡는다. 태건은 아이를 핑계로 자꾸 민서의 주변을 맴돈다. “우리 애가 너를 골랐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게 만들면 되잖아.” 피해야 할 남자였다. 그런데 자꾸 눈에 밟힌다. 무섭기만 했던 남자가 아이 앞에서 무너지는 얼굴도, 자존심 다 버리고 도움을 구하는 손도, 민서만 보면 이상하게 낮아지는 목소리도. 처음엔 아이 때문에 엮였다. 그다음엔 그 남자의 사정 때문에 흔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보다 그 남자가 더 위험해졌다.
나는 대학교에 오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다.
고등학교 때처럼 등교할 때마다 복도 분위기를 살필 필요도 없고, 누가 누구랑 싸웠는지, 오늘은 또 어느 반 앞이 시끄러운지,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
딱 그 정도의 평화를 바랐다.
거창한 꿈은 없었다.
새내기답게 동아리도 들어가고, 공강 시간엔 카페에서 과제도 하고, 마음 맞는 친구 한둘쯤 사귀고.
누가 봐도 평범해서 기억에도 잘 안 남는 대학생.
그게 내가 바라던 전부였다.
“유민서?”
출석을 부르는 조교의 목소리에 나는 손을 들었다.
“네.”
낮고 조용하게 대답하자, 조교는 별다른 관심 없이 명단에 체크했다.
다행이었다.
눈에 띄지 않았다.
첫 강의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낯선 얼굴들, 아직 어색한 웃음, 새내기 특유의 들뜬 공기가 얇게 깔려 있었다. 누군가는 벌써 옆자리 사람과 인스타를 교환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교재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서 한 칸 앞, 창가 쪽 자리를 골랐다.
너무 앞도 아니고, 너무 뒤도 아닌 자리.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교수님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을 때 의심받지 않을 정도의 자리.
중간.
나는 늘 중간이 좋았다.
“너 혹시 신입생이야?”
옆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동글동글한 인상의 여학생이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벌써 형광펜 세 개와 귀여운 캐릭터 필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응. 너도?”
“응! 나 윤하린. 같은 과 맞지? 아까 단톡에서 이름 본 것 같아서.”
“유민서야.”
“아, 맞다. 유민서. 이름 예쁘다.”
말투가 참 쉽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애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
“너 혹시 동아리 정했어? 오늘 점심시간에 부스 구경 갈 건데 같이 갈래?”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럼 같이 가자. 나 혼자 가면 이상한 데 가입할 것 같아.”
하린은 처음 만난 사람답지 않게 말을 잘했다.
정확히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고, 내가 고개만 끄덕여도 대화가 굴러가는 타입이었다.
그 덕분에 첫 강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문제는 두 번째 강의가 끝난 뒤였다.
“민서야, 우리 바로 밥 먹으러 갈까? 학식 맛없다는데 그래도 새내기니까 한 번은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
하린이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나는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강의까지는 두 시간 반.
점심을 먹고 도서관 위치만 확인하면 딱 좋을 시간이었다.
“응, 가자.”
그렇게 대답하고 강의실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복도 끝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대학 건물 복도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날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했다.
“으아앙……!”
하린도 걸음을 멈췄다.
“어? 애기 울음소리 아니야?”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모인 곳은 계단 근처였다.
작은 아이 하나가 벽에 기대선 채 울고 있었다.
세 살쯤 됐을까.
연한 베이지색 멜빵바지를 입고, 한쪽 운동화 끈이 풀린 채였다. 작은 손에는 자동차 장난감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주변 학생들은 당황해서 서로 눈치만 봤다.
“뭐야, 누구 애야?”
“교수님 애 아니야?”
“미아 아니야?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
“아, 어떡해. 근데 나 애기 달랠 줄 모르는데.”
말은 많았지만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이는 점점 더 크게 울었다.
목이 다 쉬어가는 소리였다.
나도 처음엔 그냥 서 있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더 복잡해질까 봐.
누군가 보호자를 찾겠지.
누군가 조교를 부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울면서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순간, 발이 먼저 움직였다.
“민서야?”
하린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이미 아이 앞에 쪼그려 앉고 있었다.
“안녕.”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나를 봤다.
눈가가 빨갰고, 코끝도 빨갰다. 얼마나 울었는지 작은 어깨가 계속 들썩였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말했다.
“누구랑 왔어?”
“…….”
“아빠? 엄마? 선생님?”
아이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아…….”
작게 새어 나온 말에 주변이 술렁였다.
나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 조금 더 몸을 낮췄다.
“아빠 찾고 있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이름 알아?”
아이는 훌쩍이며 장난감을 더 꼭 쥐었다.
“아빠…… 태…….”
말끝이 울음에 묻혔다.
나는 아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울 때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빨리 대답하라고 몰아붙이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딱히 육아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릴 때의 내가 그랬다.
울고 있는데 자꾸 왜 우냐고 물으면, 더 울고 싶어졌다.
“괜찮아. 천천히 말해도 돼.”
나는 가방 옆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냈다.
“코 닦을래?”
아이는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휴지를 작게 접어 아이 코끝에 대 주었다. 아이가 어설프게 흥,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잘했어.”
그 말 한마디에 아이가 울음을 멈췄다.
정말로, 뚝.
주변에 있던 학생들까지 조용해졌다.
마치 다 같이 숨을 참은 것처럼.
아이는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내 손가락 하나를 꼭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어…….”
나는 당황해서 손을 빼지도 못하고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내 손을 잡은 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던 애가 맞나 싶을 만큼 얌전해졌다.
하린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입을 벌렸다.
“헐. 민서야, 너 뭐야? 애기 마스터야?”
“아니야. 나도 처음이야.”
“근데 왜 너한테만 진정해?”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고 묻고 싶었다.
그때 아이가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누나.”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
“응?”
“가지 마.”
딱 세 글자였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약해졌다.
주변에서 몇몇 여학생들이 작게 탄성을 냈다.
“아…… 어떡해.”
“너무 귀엽다.”
“보호자 빨리 찾아야 하는 거 아냐?”
맞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보호자를 찾아야 했다.
나는 아이 손을 잡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일단 경비실이나 학과 사무실에—”
그때였다.
복도 끝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었다.
아이 울음이 멈춰서 생긴 조용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등장 때문에 공기가 눌리는 느낌.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계단 아래쪽에서 한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검은 후드 집업.
짧게 정리된 검은 머리.
무심하게 내려앉은 눈매.
손에는 작은 파란색 아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걸음은 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한 걸음씩 올라올 때마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비켜섰다.
마치 몸이 먼저 알아보는 것처럼.
나는 그 얼굴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잊을 리 없었다.
이태건.
고등학교 3년 내내, 이름만으로도 교실 분위기를 바꿔놓던 남자.
정학을 몇 번 당했다더라.
교문 밖에서 다른 학교 애들이랑 싸웠다더라.
선생님이 부모님을 불러도 아무도 안 왔다더라.
밤에는 더 위험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더라.
그에 관한 소문은 늘 흉흉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어도 충분히 무서웠다.
키가 크고, 눈빛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애.
한 번 화나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애.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내내 그와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그런데 왜.
왜 하필.
이 대학에서, 이 복도에서, 이 아이 손을 잡은 채로.
“도윤아.”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빠!”
아빠.
그 말에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태건이 아빠라고?
복도에 있던 학생들도 동시에 술렁였다.
“뭐야, 아빠래.”
“저 선배 애 있어?”
“이태건 아니야?”
“미친, 이태건 애 아빠였어?”
귓가로 속삭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태건은 주변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곧장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기억 속의 이태건과 지금의 이태건이 겹쳐졌다.
고등학교 때보다 어깨가 넓어졌고, 얼굴선은 더 날카로워졌다.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시선이 아이에게 닿는 순간 아주 짧게 흔들렸다는 것.
“어디 갔었어.”
그는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아이 어깨를 살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아빠 없어져써…….”
“네가 없어진 거야.”
“아빠가 없어져써.”
“그래. 내가 없어졌다 치자.”
태건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이상했다.
소문 속 이태건은 누구에게도 져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는 세 살짜리 아이에게 지고 있었다.
아이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태건의 시선이 그제야 내 손으로 내려왔다.
2026.07.1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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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가님. GoodNovel 한국팀 Lexie 에디터입니다. 작품을 즐겁게 읽고 연재 제안과 관련해 연락드리고 싶었습니다. 따로 연락드릴 방법을 찾지 못해 댓글로 먼저 인사드립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제 프로필을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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