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만남. 서로 다른 세 개의 얼굴을 가진 남자와 냉정한 검사의 위험한 로맨스. 사랑일까, 사건일까. 진실을 파헤칠수록 두 사람은 더 깊이 얽혀든다. 대대로 쌍둥이를 낳는다는 재벌가. 그 집안의 선산 깊은 곳에는 수십 년째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래된 사찰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비밀이 존재한다. 죽은 사람과 사라진 사람들. 뒤바뀐 아이들의 운명. 끊임없이 이어지는 쌍둥이의 탄생. 모든 것은 하나의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세광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 서준혁. 그는 피 묻은 잠옷을 입고 있었지만 정작 살인 당시의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이하진 검사는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서준혁에게는 서로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 차갑고 냉정한 남자. 아이처럼 순수한 남자. 그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남자.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모두 하진에게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여자. 상처를 숨긴 채 혼자 살아가는 데 익숙했던 하진에게 서준혁은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남자가 된다. 하지만 서준혁을 알아갈수록 하진은 깨닫게 된다. 그의 다중인격은 단순한 증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서씨 집안의 오래된 비밀이 죽음과 탄생, 욕망과 집착이 뒤엉킨 재벌가의 비밀. 그 안에서 서로의 결핍을 알아본 두 사람은 과연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깜깜한 밤하늘에서 거대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큰 번개가 한 번씩 어둠을 집어삼켰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저택 전체를 뒤흔들었고,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밤이었다.
잠옷 차림의 서준혁이 비틀거리며 어두운 잔디밭으로 뛰쳐나왔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그의 희고 창백한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의 온몸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쏟아지는 비바람에도 잠옷에 밴 붉은 핏빛은 좀처럼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저택이 우뚝 서 있었다.
활짝 열려있는 현관문.
그리고 저택 안쪽에서부터 이어진 서준혁의 피 묻은 발자국.
하나.
둘.
셋.
우르릉—!
번개가 내리쳤다.
피 묻은 발자국 끝에는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가슴과 배 주변은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긴 검집과 함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검이 떨어져 있었다.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다.
쓰러진 남자의 오른쪽 벽에는 바닥에 떨어진 것과 똑같은 검이 검집에 꽂힌 채 걸려 있었다.
* * *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저택 주변에는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었다.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아직도 진득한 피가 고여 있었다.
국립 과학수사연구원 감식팀이 현장을 샅샅이 훑고 있었고, 형사들은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 진술을 받고 있었다.
“어제 회장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입니까?”
“저녁 식사 때가 마지막이었어요.”
“누구와 함께 식사했습니까? 시간은요?”
“7시쯤이요. 항상 그 시간에 식사하시니까. 어제저녁은 회장님과 첫째 도련님, 둘째 도련님 이렇게 세 분이 함께하셨어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네. 전혀요. 평소와 똑같았어요.”
“벽에 걸린 저 검은 언제부터 있던 겁니까?”
살인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검과 똑같은 검이었다.
“제가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어요. 저 검은 저희는 만지지도 않아요.”
평소 식사를 준비하던 상주 가사도우미의 말이었다.
엄 형사가 다가와 이 형사에게 다급히 말했다.
“이 형사님 CCTV에 찍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뭐? CCTV 가 이렇게 많은데?”
“누군가 살해 후 CCTV 저장 데이터를 모두 없앤 거 같습니다.”
“삭제된 거야?”
“여긴 중앙 통제 시스템이라, 통제실에 있는 하드디스크째로 가져갔습니다.”
“하드를 통째로?”
“네. 그냥 저것들은 빈껍데기들이죠.”
엄 형사가 여기저기 달려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세광그룹이면 재계 5위안에 드는 기업인데 보안이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이 직접 통제하기 좋게 그렇게 했다는데요.”
엄 형사가 답했다.
“그럼, 집 근처 CCTV라도 빠짐없이 조사해. 근처 차량 블랙박스도 함께.”
“넵.”
“저 사람은 누구죠?”
이하진 검사가 가리킨 곳에는 한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거실 한쪽 구석에서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붉은 입술과 날카롭게 뻗은 콧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저절로 그에게 향했다.
하진은 지금껏 실제로 만나 본 사람 중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인 것 같았다.
“피해자의 둘째 아들 서준혁이라고 합니다.”
엄 형사가 이하진 검사의 옆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제 이 집에는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회장님과 저 사람, 단둘뿐이었습니다.”
그는 어제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멍하니 바닥만 내려 볼 뿐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저쪽 별채에서 생활 한다고 합니다.”
그는 잔디밭 건너 별채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 범인일까요?”
서준혁 쪽을 보며 하진이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엄 형사가 서준혁을 바라보았다.
“CCTV는 누군가 없애 버렸는데, 정작 본인은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한쪽 구석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서준혁을 바라보며 엄 형사가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모르죠.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을 수도요.”
말을 마친 이하진 검사가 서준혁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옆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가이드가 이하진 검사를 막아섰다.
그는 가이드들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하진 검사입니다.”
“…….”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준혁 역시 눈빛조차 주지 않고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을 뿐이다.
젖은 잠옷에는 잡초들과 흙들 그리고 피 얼룩이 슬며시 보였다.
“계속 이렇게 진술 거부하시면 불리할 수 있어요.”
이하진이 그에게 소리쳤다.
“…….”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엄 형사가 이 형사에게 말했다.
“세상 불공평한데요. 재벌인 것도 부러운데 저렇게 잘생기기까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사진이라도 우선 찍어.”
이 형사의 말에 국과수 사람들이 와서 앉아 있는 서준혁을 사진에 담았다.
가이드들이 사진 찍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이 형사, 엄 형사, 이하진 검사가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봤다.
순간 이하진 검사와 정성우가 눈이 마주쳤다.
정성우가 잠깐 멈칫하다 말고 그들 앞에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법무법인 네모세모
변호사 정성우’
“저희 의뢰인은 제가 입회하기 전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을 겁니다. 저와 먼저 이야기하시죠.”
정성우 옆에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남자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이하진 검사와 이 형사, 엄 형사는 서준혁과 서준재를 번갈아 보았다.
“저는 서준혁의 쌍둥이 형 서준재라고 합니다.”
“와, 정말 똑같이 생기셨네요.”
“네 저희는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이 형사가 서준재에게 형식적인 질문들을 했다.
“어제저녁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는 여기 같이 살지 않습니다. 저의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사람이 없다는 말이군요.”
“…….”
정성우가 하진에게 다가와 말했다.
“오랜만이야. 이 검사.”
능글맞게 웃는 정성우를 보고 하진의 표정이 굳었다.
“네. 선배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이씨, 왜 하필 저 인간이 여기에 있을 게 뭐람.’
같은 법조계에서 일하다 보면 언제가는 마주칠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두 분은 아시는 사이셨나 봅니다.”
“이 업계가 생각보다 좁아서요.”
이형사의 물음에 정성우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그 웃음이 짜증이 난 하진이 다소 사무적인 말투로 서준혁을 가리키며 정성우에게 말했다.
“옷에 피가 묻어 있네요. 증거물로 확보해야 합니다.”
“아 물론,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바로 벗어 주셔야겠습니다. 증거물이 오염될 수도 있잖아요.”
“…….”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 동생은 범인이 아닙니다.”
서준재가 말을 끊었다.
2026.09.26 18:45
2026.09.25 18:43
2026.09.24 18:42
2026.09.23 18:40
2026.09.22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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