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바 첫날, 신부가 죽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음료를 건넨 사람은 나였다.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끌려온 취조실. 수갑 찬 두 손을 움켜쥐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짙고 푸른빛이 감도는 서늘한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숨이 턱 막혔다. 잊을 리 없는 얼굴. 다신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 6년 전, 내가 지옥 속에 홀로 남겨두고 도망쳤던 첫사랑. 차한결이었다. 불과 어젯밤이었다. 기적처럼, 혹은 저주처럼 다시 만나 미움과 원망이 뒤엉킨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또다시 도망쳐 온 나였다. 배신감에 눈이 뒤집혔을 그는, 강력계 형사가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를 훑어보는 그의 표정은 잔혹하리만치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젯밤 내 품 안에서 떨던 그 손으로, 오늘 낮에 사람을 죽였다고?” 나는 꾹 다문 입술을 끝내 열 수 없었다. 내가 품고 있는 이 오랜 비밀을 뱉어내는 순간, 지금까지 아등바등 버텨 온 모든 삶이 무너져 내릴 테니까. “이번엔 합법적으로 가둬 줄게.” 그가 한 걸음 다가와 내 벼랑 끝 숨통을 옥죄었다. “또 도망쳐 봐, 미로야. 진짜 지옥이 뭔지 보여 줄 테니까.” 살인 사건의 잔혹한 진실과 과거의 악연이 얽혀드는 가운데, 멈춰 있던 두 사람의 감정이 다시 위험하게 얽혀든다.
미로는 아슬아슬하게 단추가 채워진 홀복 셔츠의 깃을 매만졌다. 친구의 부탁으로 급히 달려온 대타 자리인데,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 20만 원 준댔으니까. 이제 퇴근까지 30분이야. 조금만 참자….’
재즈 음악이 흐르는 고급 회원제 바. VIP 회원들만 예약제로 이용한다는 이곳은 한눈에 보아도 비싼 옷을 걸친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앉아 여유롭게 술과 음악을 즐기는 곳이었다.
미로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얼음이 든 셰이커에 칵테일을 담아 흔들었다. 이내 잔에 술을 따라내고, 오렌지를 꺼내 얇게 깎아 껍질을 비틀자, 향긋한 향이 잔 위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손님, 코스모폴리탄 드릴게요. 달지 않고, 손님 이미지에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추천해 드려요.”
처음 보는 손님에게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미로는 칵테일을 내려놓았다. 오렌지 향이 감도는 핑크빛 잔이 테이블 위에 사뿐히 놓였다.
“어머, 색도 예쁜 데 정말 맛있네요!”
“하하. 안 달고 괜찮죠? 그래도 조심하세요, 은근 도수가 있는 놈이거든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참 센스가 있네요. 명함 하나 줘요. 다음에 예약하고 오게.”
“아, 아쉽지만 저는 오늘 대타로 나온 거라서요.”
“아쉬워라. 요즘 이렇게 센스 있는 바텐더 찾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손님을 향해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인 그 순간이었다. 셰이커를 잡고 있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바 테이블 너머 구석 한 켠, 원형 테이블 자리에 앉은 커플로 보이는 남녀. 진득한 시선을 보내며 여자의 손을 쓰다듬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미로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붙잡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딘가 낯익은 선명한 윤곽, 멀리서 보아도 뚜렷한 이목구비…. 오뚝하다 못해 날카로운 콧날과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감각을 안기는 백사의 눈이었다.
‘저,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절대로 마주치지 말아야 할 남자의 얼굴이었다. 미로는 급히 몸을 돌려 얼굴을 숨겼다.
6년 전, 스스로 도망치기를 선택했던 첫사랑. 차한결이었다.
그는 VIP석 깊숙한 곳에서 낯선 여자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그는 단단한 손가락으로 상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고, 나머지 손으로는 여자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넘겨주고 있었다.
잠입 수사의 정체가 탄로 날 위기의 순간. 한결과 그의 동료가 긴장한 채 연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로가 알 리 없었다.
대규모 마약 거래 현장을 적발하기 위해 한 달 넘게 잠복하며 '던지기' 조직부터 차근차근 추적해 올라온 끝에, 오늘 이 바에서 VIP 고객들의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정보까지 입수한 터였다.
12시 10분. 첩보원에게 전달받은 거래 시각인 12시는 이미 지났지만,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현장 덮치기가 눈앞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는 듯했다. 옆 테이블에 밍크 조끼를 걸친 여성은 5분 전부터 한결과 곽 형사 쪽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검증된 소수의 회원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정보에 따라 한결의 주변 인맥을 동원해 간신히 출입증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져야 했을 거래는 누군가를 경계하듯 상황만 살필 뿐 좀처럼 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 밍크. 맞는 것 같은데 냄새 맡은 것 같아. 뭐라도 해봐, 차 형사.]
인이어 안으로 들려오는 박 팀장의 지시에 한결이 곽 형사의 손을 잡고 있던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었다. 미리 맞추어 놓은 사인이었다.
곽혜원은 한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촉촉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이내 가까이 다가갔다. 혜원의 얼굴이 다가오자, 한결이 그녀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살짝 꺾었다.
계속 흘끔거리던 옆 테이블 여성의 시선이 민망한 듯 거두어졌다. 미묘하게 튼 각도가 두 사람이 격하게 입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결은 혜원의 턱은 붙잡은 손으로 두 입술 사이에 엄지를 대고 있었다.
[오, 대박. 진짜 하는 거 아니지 차 형사. 연기 맞아, 이거?]
민 경사로 추정되는 이의 짓궂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곽 형사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살짝 뒤로 뺐다.
하지만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로는 숨이 턱 막혔다. 잊고 있던 감정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집요하게 여자의 목을 감싸고 달려드는 한결의 옆얼굴은 미로가 알고 있던 것보다 한층 성숙하고 남성미 넘치는 모습이었다.
‘왜, 하필 여기서…….’
심장에 누군가 망치질을 하다못해 잘게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해일에, 미로는 도망치듯 가게 뒷골목으로 뛰쳐나갔다.
긴 숨을 들이마셔 한겨울의 차가운 밤공기가 온몸에 퍼지는 중에도 가슴 한가운데 홧홧한 불길은 쉽사리 진화되지 않았다.
2026.09.2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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