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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하신 폐하와 아니 고운 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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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희
103화무료 4화

자유 연재 | 글링

조회수 154좋아요 0댓글 1

“폐하, 약 드실 시간입니다.” 나는 일개 시녀이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은 이 나라 지존의 건강이다. “안 된다고 했잖아.” “안 된다고 하신 것에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폐하는 약 먹기를 극도로 싫어하신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 “오늘도 약을 잘 드시면 점심 후에 푸딩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뭐? 내가 그런 거에 넘어갈 거 같아?” 응, 그럴 거 같아.


1화

0. 프롤로그

아침 해가 밝았다. 출근을 할 시간이란 뜻이다. 나는 눈을 감기 전과 별다를 것 없는 작은 방을 바라보다 폭 한숨을 쉬었다.

이 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꼬박꼬박 출근해서 열심히 일한 대가로 돈을 벌어야 한다.

언젠가, 예쁜 집을 하나 사서 한량처럼 지내리라.

상상만 해도 즐거운 꿈을 생각하니 기분이 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대충 눈곱만 떼고 쪽방의 문을 열었다.

슬쩍 문을 열자, 오늘도 휘황찬란한 황성의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있는 장식물을 떼어다 팔아도 돈이 참 될 텐데.

군데군데 서 있는 병사들만 없었어도 진작에 그랬을 거다.

쪽방의 문을 닫자, 내가 나온 곳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나 같은 하급 시녀나, 하녀들이 지내고 있는 쪽방은 대부분 이런 구조였다.

방이 있되, 없는 것처럼. 마치 황실에서 아랫것들이 지켜야 할 수칙을 형상화한 듯한 모양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복도. 그 가장자리를 살금살금 걸으면서 나는 폐하의 주치의인 플랑드르 남작에게로 갔다.

워낙 아침잠이 많은 플랑드르 남작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 비몽사몽의 꼴을 한 채로 약을 건네주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아…….”

다만 나와 다른 점을 꼽자면, 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눈에 띄는 미모를 자랑했다.

플랑드르 남작은 단 하나뿐인 제국의 지존을 전담하는 의사였지만 그는 의술보다는 화려한 외모로 더 이름이 높았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장미 같은 붉은 머리칼과 수렁보다 더 깊어 보이는 헤이즐색 눈동자, 그리고 호리호리한 체격은 남녀를 불문하고 홀리는 마력이 있었다.

“남작님이야말로, 고생이 많으세요.”

“으……응. 로제는 안 피곤해? 이따 와서 좀 자고 가.”

본인 또한 남녀 안 가리고 꼬시는 취향이기도 했고.

“예. 시간이 나면요.”

나는 플랑드르 남작의 추파에 적당히 대꾸해 주고는 뒤돌아섰다. 매일같이 있는 일이라서 심장이 덜컹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 저 양반도 침대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면 나한테 무슨 말을 했었는지 까먹을 터다.

나는 플랑드르 남작에게 받은 쟁반을 들고 다시 복도를 걸었다. 아까보다는 당당한 걸음으로, 조금은 중앙에 가깝게.

나는 일개 시녀이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은 이 나라 지존의 건강이 달려 있는 소중한 약이므로, 조금은 우쭐하면서 걸어도 누가 뭐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폐하의 약시중이었고, 폐하께서 약을 드시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과였다.

이때만큼은 폐하의 건강이 나에게 달려 있는데 누가 나를 막 대하겠나. 내가 중앙 근처가 아니라 복도의 한가운데를 걷는다 하여도, 어지간한 귀족들이 나를 피해 가야 마땅했다.

덕분에 폐하께 약을 가져다드리는 이 시간은 내 하급 시녀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즐거운 때이기도 했다.

지금만큼은 나를 벽에 걸린 명화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던 병사들은 물론, 폐하의 침실을 지키는 기사마저 나를 눈여겨본다.

정확히는 폐하께서 드실 약을 보는 거겠지만.

플랑드르 남작의 침실부터 폐하의 침실까지, 촘촘히 서 있는 병사들은 나를 포함한 누군가 약에 무슨 짓을 할까 두렵다는 듯, 눈을 떼질 못했다.

이럴 거면 신임받는 플랑드르 남작이 직접 가져다주는 것이 맞지 않나 싶지만, 그는 아침잠이 너무 많았다.

처음 몇 번, 플랑드르 남작은 약을 직접 가지고 폐하의 침실로 가다가 넘어졌고, 비몽사몽간에 약을 조제하다 실수를 연발해서 귀한 약재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가 비교적 쌩쌩한 저녁에 아침 약까지 폐하께 드리자는 의견도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약을 원체 싫어하시는 폐하께서 밤새 몰래 약을 버리다 발각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결국 아침마다 내가 약을 받아다가 폐하께 드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잘된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실직자가 되어서 황성 밖을 떠돌고 있었을 거다. 약 투정이 심한 폐하와 아침잠이 많은 플랑드르 남작이 변함없이 고고하게 자신의 체질을 지켜 나가길.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폐하의 침실 문 앞에 도착했다.

힐긋, 눈길을 보내자 폐하의 침실을 지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과 달리 비교적 가벼운 차림새를 한 그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아주 잘생긴 남자라 얼핏 보면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륙에 몇 없다는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대충 굉장히 세다는 뜻으로, 별다른 조치 없이 그를 문 앞에 세워 두는 것으로 충분히 폐하의 경호가 된다는 점에서 그 대단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 이름이 뭐더라…….

“폐하께서는 기침하셨습니다.”

“세계 서열 0위……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예.”

그는 일개 시녀의 헛소리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지, 내 아무 말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가 준 고급 정보를 소중하게 간직한 채 나는 문을 두드렸다.

“폐하, 약 드실 시간입니다.”

“…….”

“폐하, 약 드실 시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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