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난 남편에게 이혼하자 했다 목이 졸려 죽고 말았다. 그걸로 고통스럽던 인생은 끝인 줄 알았는데. “내가, 어려……?” 다시 눈을 떴을 때 열두 살의 힘 없고 말 못하던 백작 영애로 돌아와 있었다. 호시탐탐 백작가를 집어삼키려 드는 작은 아버지에. 가정부는 자기가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안하무인! 심지어 시중하녀는 어머니의 유품까지 도둑질해? ‘두 번은 그렇게 안 살아, 못 살아!’ 이용당하고 고생만 하다 허무하게 죽는 삶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내 인생을 괴롭힌 그것들 모두. ‘전부 삭제해 버리겠어.’
01.
“아…….”
목구멍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깡마른 소녀는 거울을 보며 입을 한껏 벌렸다.
‘얼른, 얼른 말할 수 있어야 해.’
안 그랬다가는 다 놓치고 말 것이다.
부모님의 유품도, 자신의 재산도 작위도 모두!
거울을 보며 소녀, 안토니아 세르히는 필사적으로 목을 쥐어짰다.
2년 가까이 쓰지 않았던 목소리는 제 뜻대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답답했다.
‘하필 돌아와도 이때로 돌아올 게 뭐람.’
안토니아는 거울을 보며 투덜거렸다. 12살의 안토니아 세르히 백작 영애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덕분에 일주일 전, 자신이 죽어 16년 전으로 돌아왔단 것에 슬퍼할 여유도 사라져버렸다.
* * *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안토니아 세르히는 28살이었다.
제멋대로인 남편과 결혼해 10년이나 비위 맞추고 홀로 가문을 지탱하며 살았다.
설마 바람기에 항의한 걸로 남편 손에 죽는 끝을 맞이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말이다.
다시 눈 떴을 때는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 줄로만 알았다.
설마 저런 어이없는 이유로 정말 죽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시야에 비친 방이 확연히 달랐다. 우중충한 태피스트리와 곳곳에 놓인 유품들.
모두 하나같이 어릴 적 쓰던 방의 풍경과 똑같았다.
안토니아는 놀라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나타난 건 10년 전, 쫓겨난 시중하녀 도라였다.
‘도라?’
안토니아는 두 번째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뱉으려던 말은 소리가 되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산산이 흩어져버렸으니까.
입술도 버석하게 말라 부자연스레 움직였으나, 목소리는 아예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안토니아의 모습을 보며 도라가 멍청하다는 듯 피식 비웃었다.
“물 달라는 거지요? 제가 계속 말했잖아요, 물은 늘 여기에 둘 테니 알아서 좀 드시라고.”
도라는 투덜거리며 안토니아의 앞에 컵과 주전자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말 못하는 것뿐이지 다른 데는 다 멀쩡하잖아요?”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안토니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이제 볼일 끝났지요? 제발 저 좀 쉬게 해 주세요, 매번 왔다 갔다 하려니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도라는 짜증을 팍 내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안토니아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 집 하녀가 저렇게 군단 말인가.
‘저 정도로 건방졌었다고?’
현실감 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는 곧 정신 차리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꿈, 꿈일 거야.’
애초에 도라는 10년 전에 쫓겨났고, 만약 돌아왔다고 해도 저렇게 앳된 모습일 리가 없었다.
저 모습은 아무리 잘 봐줘 봐야 열네다섯 가량이지 않은가.
안토니아는 물을 마셔 건조한 목을 축이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자기가 자는 사이 어디 얻어맞기라도 한 걸까.
‘어제 몇 마디 따졌다고 날 두들겨 때리고 나쁜 장난을 친 게 분명해.’
고약한 남편에 대해 그런 쪽으로 확고한 신뢰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거울 앞에 선 순간 안토니아는 비명을 질렀다.
“……!”
비록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막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한 백금발이 어깨를 넘어 내려와 있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것인지 마르고 수척한 티가 났으나 물빛 눈은 영롱했다.
피부가 우윳빛으로 뽀얗고 두 뺨 위로는 옅게나마 붉은 기도 돌았다.
‘나도 어리잖아……?’
매일같이 뼈 빠지게 일하느라 피로에 찌든 스물여덟 살의 모습이 아니었다.
눈 밑도 퀭하지 않고 습관처럼 찌푸리던 미간의 주름도 보이지 않았다.
키도 평소보다 한 뼘 반쯤은 더 작게 느껴졌다.
아니,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정말 작았다. 어떻게 봐도 지금 거울에 비친 건.
‘어릴 때 나라고?! 그것도……. 가장.’
자신이 가장 답답하게 살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바쁘게 하루하루 사느라 묻어뒀던 나쁜 옛 기억들이 확 튀어 올랐다.
어린 시절, 안토니아는 평범한 귀족 영애답게 애지중지 사랑받으며 자랐다.
특히나 세르히 백작 부부는 느지막이 얻은 아이를 더 귀하게 대했다.
그런 부모님을 겨우 열 살에 마차 사고로 동시에 잃었으니 상처가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이때야!’
차라리 돌려줄 거면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때로 돌려주지. 정말 현실이라면 너무나도 잔인했다.
아마도 열두 살쯤, 하필 한참 상실감에 빠져 말도 못하고 모두 다 내려놓은 채 세월만 흘려보내던 때였다.
‘……이걸 인생 한번 기구하다고 해야 하나.’
안토니아는 거울을 꽉 붙잡았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한기가 꿈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정말로 남편 손에 죽은 게 인생의 끝이 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나……. 정말로 죽었던 거구나.’
한숨이 폭 나왔다. 당황이 잦아들자 설움과 분노, 원망 같은 감정이 복잡하게 그 자리를 메웠다.
지난 삶, 스물여덟의 나이로 죽기까지 그녀는 뭐 하나 제 뜻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이용당했고, 늘 빼앗겼으며, 제 것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릴 때는 말을 잃어 작은아버지에게 모두 빼앗겼으며, 커서는 남편과 시댁에 모두 빼앗겼다.
솔직히 괴롭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었다.
‘안 울어. 왜 울어!’
울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안토니아는 습관처럼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했다.
정말 자신이 12살의 안토니아 세르히였다면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남의 편에게 죽어 돌아왔더니 또 힘들었을 때냐면서 말이다.
‘남편이 날 죽인 것도, 뭐…….’
생각보다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애초에 사랑한 것도, 제 뜻대로 한 결혼도 아니었으니까.
분명 큰일이었다. 남편에게 죽었다니 억울하고 분통해서 통곡할 일이었다.
그러나 말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약했던 어린 날의 자신으로 줄곧 살았다면, 진흙탕 같던 이전 삶에서 스물여덟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작 그딴 놈에 대한 원망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돌아온 거라면 더더욱.
제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으니까.
‘똑같은 인생을 또 반복하려고? 그렇게 되면 내가 바보인 거지.’
안토니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어려진 몸 탓일까, 울렁거리며 뜨거워지려는 콧잔등을 애써 식혔다.
터트리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으나 하나가, 딱 하나의 생각이 자신을 지탱했다.
‘돌아온 거라면 두 번은 그렇게 안 살아, 못 살아!’
지난 삶, 자신이 뭔가 해 보려 했을 땐 이미 모든 게 제 손안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과 몸은 어려졌으나 머리는 온갖 일을 다 겪은 스물여덟의 안토니아였다.
‘모두 다 되찾을 수 있어.’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것들에게 다 갚아줄 수도 있어.’
자신을 이용하고 닥닥 긁어 상처만 주던 모든 사람에게.
절망을 깊숙이 묻어버리며 안토니아는 앞을 보았다.
거울 속 소녀의 표정엔 미동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 * *
“아휴, 저도 너어무 불쌍하지 않아요? 벌써 열두 살이면 알아서 좀 챙겨서 지내실 것이지.”
도라는 안토니아의 옷들을 건성으로 정리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시중하녀 도라는 안토니아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시건방졌다.
그녀는 불러도 제때 오지 않기 일쑤였으며, 낮잠도 멋대로 자곤 했다.
‘내가 말도 못하고 표정도 없으니 아무도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안토니아는 지난 2주간 열심히 목소리 내는 연습을 하며 저택 상황을 파악했다.
사실 그녀는 회귀 사실을 받아들이며 걱정도 했다.
이미 저택이 자신이 손 쓸 수 없는 무렵이면 어떡하나 하고.
그러나 다행히 아직 그 도둑놈 같던 작은아버지가 저택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때였다.
2024.08.1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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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 당돌한 매력...
24.12.13

순수악이라 뭐라 할 수 도 없고ㅋㅋㅋ
24.12.01

여주 말 시원하게 잘하네
24.12.01

계속 말을 못 해서 몇 화 동안 고구마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바로 말하네
24.12.01
여주가 용기 내는 거 멋져요!
2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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