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한 서자로 환생한 군주. 그런데 눈앞에 다른 사람의 전생이 보인다.
양을 몰고 강가에서 물을 먹이던 아슬라프는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주인의 아들인 티론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그가 타고 있는 말처럼 씩씩거리는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야, 너!”
아슬라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티론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채찍을 휘둘렀다.
짝 소리와 함께 매서운 가죽 채찍이 아슬라프의 가슴을 때렸다.
“윽!”
채찍에 아슬라프의 옷이 찢겨져 나가며 가슴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남겼다.
“네가 훔쳤지?”
말에서 내린 티론은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아슬라프의 멱살을 잡았다.
“어렵게 구한 명검인데, 그걸 감히 네가 훔쳐?”
“검이요? 제가요?”
아슬라프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지만,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 시골 영지에서는 귀족이 쓸만한 고급 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티론은 며칠 전에 이곳에 들른 상인에게서 보검을 상당히 비싼 값에 샀다. 바탕카라는 검의 명장이 만든 칼이라며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에 덜컥 사들인 것이다.
그런데 훔쳤다는 의심을 하는 걸 보면, 그 검이 사라진 모양이다.
“그래. 네놈 짓이지?”
티론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채찍을 치켜들었다. 평소에도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한 티론인데, 새로 산 검이 없어지자 잔뜩 화가 나서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도련님의 칼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아슬라프는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하지만, 티론은 듣지 않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거짓말! 넌 전에도 내 검에 관심을 보였어. 내 허락 없이 몰래 칼을 뽑아서 만져봤잖아. 검을 갖고 싶어서 내 걸 훔친 거잖아!”
몇 년 전 어렸을 적에 검술을 연마하는 티론을 보고, 호기심에 방에 있는 칼을 뽑아서 살펴본 적이 있었다. 양을 잡을 때 쓰는 칼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본능적으로 검을 잡아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어서 뭔가에 이끌리듯이 검을 뽑아서 잡아봤던 적이 있다.
티론에게 들키는 바람에 다시는 주인의 물건에 허락 없이 손대지 말라고 얻어맞고 창고에 감금당한 채 사흘을 굶었지만, 검을 잡았을 때의 묘한 기분을 잊을 수 없었다. 마치 예전부터 검을 숱하게 잡았던 것처럼, 숟가락을 잡은 듯 익숙한 느낌이었다.
“저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아슬라프는 15살 소년답지 않게 단호하게 입을 다물며 주인의 아들인 티론을 마주 보았다.
부인하는 것밖에 아슬라프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훔쳤다는 증거가 있냐고 따져 묻는 건, 오히려 티론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채찍질을 오래 하게 만들 뿐이다.
“어쭈? 이게 감히 어딜 눈을 치켜떠?”
티론은 아슬라프의 얼굴에 채찍을 내리쳤다. 휘릭 소리와 함께 채찍이 아슬라프의 눈으로 날아왔다.
“앗!”
아슬라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을 들어서 눈에 채찍을 맞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채찍에 맞은 손은 벌건 자국과 함께 부어올랐다. 그러나 눈에 맞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실명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저번에 반지도 네가 훔쳤지? 요즘 툭하면 물건이 없어지는 게 다 네놈 짓이야.”
“아닙니다. 그건 제가 아니라…….”
아슬라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티론의 하인 후안. 그는 티론의 방을 언제나 의심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자였다.
티론의 검이 없어졌던 어제도 아슬라프는 우연히 정원에서 그와 마주쳤다. 보통 그는 아슬라프에게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거나 이유 없이 기분 나쁘게 툭툭 때리며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 후안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아슬라프의 시선을 피하며 말없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분명히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하지만, 후안이 수상하다는 말을 해봐야 소용없다. 후안은 티론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 엉뚱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운다며 욕만 먹을 테니까.
후안이 들킬지도 모르는 자신의 방에다 검을 숨겨둘 리도 없으니, 후안의 방을 뒤져보라는 말도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천한 놈 주제에. 난 처음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티론은 분을 이기지 못하며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짝- 짝- 짝-
채찍질이 거듭될 때마다 아슬라프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딜 도망가!”
“윽!”
채찍질에 부풀어 오른 살갗이 터져서 빨간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티론의 채찍을 피해서 뒷걸음질 치던 아슬라프는 강 속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런데 어제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나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어엇!”
채찍을 피하느라 미끄러운 강바닥의 돌을 헛디딘 아슬라프는 그대로 차가운 강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세찬 물줄기가 넘어진 그를 덮쳤다. 순식간에 깊은 곳으로 휩쓸려 내려갔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우웁!”
숨을 쉬려고 허우적거렸지만, 평소보다 몇 배나 빨라진 유속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았고, 거센 물살에 몸을 똑바로 가눌 수 없었다. 코와 입으로 진흙 섞인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슬라프는 그 순간에도 놀랍도록 침착하게 생각했다. 마치 죽음의 위기를 맞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아직은 아니야.’
흐릿한 흙탕물 속에서 정신이 희미해져 가면서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물을 헤치며 헤엄을 쳤다.
한참을 떠내려가던 끝에 간신히 물 위로 헤엄쳐 올라갔다. 하얀 섬광이 빛나는 수면이 점점 가까워졌다.
일단 수면 위로 올라가서 숨을 쉬어야 했다.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헤엄쳐서 강변으로 기어 올라갔다. 헐떡이며 숨을 쉬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물을 마셔서 폐가 물로 꽉 차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없었다.
‘정신 차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탈진한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죽는 건가.’
그때, 어지러운 가운데 눈앞에 환영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광경이 주위에 펼쳐졌다.
그곳은 전장이었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서 벌판에는 신음하는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찢어진 깃발과 부러진 창이 땅에 나뒹굴었다.
주인을 잃은 말들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독수리 떼가 피 냄새를 맡고 시체를 뜯어먹으려고 하늘을 빙빙 돌며 몰려들었다.
아슬라프는 귀족의 문장이 박힌 갑옷을 입고 싸우고 있었다. 갑옷은 처절한 전투를 치른 듯이 피에 물들어 있었고, 주위에는 마지막까지 그를 지키다가 쓰러진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뭐야? 내가 왜 싸우고 있어?’
2025.05.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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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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