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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내리는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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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이네
25화무료 25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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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네 기억속에서라도 영원히 남아있을래.

#로맨스#현대#피폐물#친구>연인#학생#상처녀#무심녀#집착남

여름을 좋아한다. 몸 전체를 바싹 익히듯 내리쬐는 햇살도,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매미 울음소리도. 하다못해 습한 공기도 좋아한다. 마치 거대한 수조 안에서 헤엄치는 것 같다. 나는 매 여름, 한 마리 잉어가 되어 작은 어항을 휘젓고 다녔다.

여름을 좋아한다. 이 아름다운 계절이 가진 강렬한 색채감을 사랑한다. 선명한 자연의 색도, 특유의 정감 가는 이 작은 동네의 분위기도. 여름은 찬란하게 빛을 내뿜으며 언제나 사람의 마음에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여름을 좋아한다. 방학을 맞아 거리를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가끔 불어와 몸을 끈적하게 감싸 안는 바람도.

여름을 좋아했다. 비가 오는 여름을 좋아했다. 긴 장마 동안 수국이 만발한 옆집 정원을 지나치는 것도, 어린 날 장화를 신고 찰박이며 걸어 다녔던 것도.

여름이 싫어졌다. 진득하게 찾아온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끝났다.

────여름이 싫다. 오랫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것이 나를 괴롭혔다. 이내 정신을 망가트리고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여 죽였다.

나는 여름이 싫다.

여름이 정말 싫다.

채주현이 자살했다.

*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201X년 7월 21일. 이날은 말 그대로 장대비가 쏟아졌던 걸로 기억한다. 며칠 전에 장마를 대비해 편의점에서 사놨던 싸구려 비닐우산이 망가졌다. 결국 근처 상가 건물로 들어와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툭툭. 하얀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어내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효과는 없었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도피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1년. 지금 지내고 있는 임시 거처로 돌아가려면 좀 더 걸어가 버스를 타고 다시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그렇다고 우산을 하나 더 사기에는 돈을 아껴야 하는 상태. 계획에 없던 일로 비상금을 낭비할 수는 없다. 어차피 비만 잠깐 맞으면 되는 일인데.

고민은 짧았다. 겉옷을 벗어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곧 기다렸다는 듯이 앞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반소매 반바지 차림의 팔다리에 빗방울이 사납게 달려든다. 아플 정도로 시리게 피부를 두드리는 빗방울로 인해 으슬으슬 한기가 돌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버티자. 그렇게 달리기 시작한 지 5분여쯤, 저만치 정류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이다. 머리 위로 덮은 겉옷을 다시 제대로 고쳐 썼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지막 뜀박질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시야를 반쯤 가린 겉옷 탓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탓일까. 지나가던 행인과 부딪혔다. 하마터면 충격으로 인해 같이 쓰러질 뻔했다. 상대가 돌진한 내 어깨를 붙잡고 뒤로 물러서 충격을 흡수해주지 않았더라면, 서로 엉망인 꼴로 뒤엉켜 넘어질 수도 있었다.

“…. …?”

슬림한 체격에 키가 큰 남자였다. 비에 푹 젖어 머리 위를 덮어버린 겉옷이 시야를 가린데다, 아직 상대가 붙잡은 어깨를 놓아주지 않아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힘들었다. 낯선 이의 품에 어정쩡하게 얼굴을 묻고 있는 당혹스러운 상태. 그때, 버스 정류장에 기다리던 버스가 정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헉, 저, 죄송합니다! 저 버스를 꼭 타야 해서, 실례하겠습니다…!”

빠르게 부딪힌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 정류장 쪽으로 뛰었다. ────뛰어가려고 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손이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조금 불쾌해진 나는 무례한 사람인가 싶어 뿌리치듯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커다란 손은 여전히 내게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든 어떠한 예감.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피가 빠르게 식었다. 등골을 타고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오싹해진다.

“아….”

“권여루.”

언뜻 나른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성. 그는 내 이름을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로, 자연스러운 태도로 불렀다. 그게 너무 소름이 끼쳤다. 나는 바르작대며 외쳤다.

“이거 놔! 미친놈아, 좀 놓으라고! 경찰… 경찰 부를 거야. ─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여루야, 잠깐만. 나 할 말이 있어.”

지나가던 행인이. 우연히 부딪힌 낯선 이가 아니었다. 채주현이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색 장 우산이 내 몸부림에 바닥에 떨어졌다. 곧 그가 입은 여름용 트렌치코트가 비에 젖어 들면서 색이 짙어졌다. ──너에게서는 늘 무겁고 청량한 향이 났다.

향은 사람의 기억을 자극한다. 과거 채주현과 함께했던 과거가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건 내가 잊지 못할, 기억 속에 새겨져 내게 내려진 형벌과도 같은 것. 계속해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발버둥 쳤다.

“싫어, 살려주세요… 흑!”

“여루야. …권여루.”

사람이…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아예 온 세상 모두가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그리고 너와 나만 남겨진 것처럼. ──우리 이외에 그 누구도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쿠르릉. 잿빛으로 물든 하늘 속 먹구름이 낮게 운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머리와 얼굴이 엉망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가슴이 절로 들썩이고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비로 인한 저체온증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장마기간이었다. 숨이 막혔다. 끔찍했던 트라우마와 몸에 새겨진 경험이 반추되며 몸이 굳어간다. 나는 패닉 상태에 빠진 것도 모른 채 벌벌 떨며 헐떡였다. 머리 위를 덮고 있던 겉옷은 어느새 아스팔트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물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비에 젖는 건 채주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를 품에 단단히 가두듯 재차 끌어안고 상체를 바짝 밀착시켰다. 쿵쿵─ 두 개분의 심장 소리가 엇박자를 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진정하라는 듯 내 등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경황이 없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조금 정신이 돌아온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심호흡하자 떨림이 멎어 들며 몸이 진정되어간다. 사고력이 회복되자 찾아온 건 자괴감이었다. 비참함이 심장을 죄어온다. 채주현은, 이 개자식은 어떻게 해야 나를 진정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게 너무 분하고 끔찍해서, 결국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마도 빗물일 것이다. 설령 눈물이더라도 모르지 않을까. 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던 모양이다. 채주현은 계속해서 내 등을 천천히 쓸며 토닥였다. 몸이 완전히 진정되자 희뿌옇던 머릿속이 조금씩 개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채주현이 조용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여루야. 할 말 있다고 했지. 다시 데려가려고 온 거 아니니까 진정하고 내 말 들어.”

“…….”

네 품에서는, 늘, 청량한 향이 났다. 특유의 향수 냄새가 후각을 저릿하게 자극했다. 그리고 네 청량함이, 지금은 심장의 미세혈관마저 모조리 얼려버릴 듯한 냉기가 되어 온몸을 잠식해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또 발버둥 치면 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나는 네 본성을 알고 있으니까.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채주현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 평소와 같은 얼굴.

“….”

너무 춥다. 여름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기가 돌 수 있는 걸까. 마치 입김이 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로. 몸이 조금씩 다시 떨리기 시작한다. 제발, 제발 누가 나 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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