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아, 출근하기 싫다. 누가 나 좀 납치해 줬으면.” 입이 방정이다. 출근하기 싫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납치당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것도 이세계로 말이다. 죽기 살기로 도착한 2층 안전지대. 현생에서도 일하는 노예였는데 이세계에서도 먹고 살려면 노동은 필수였다. [<구인 공고>인력 사무소 아르바이트 모집]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을 기대하며 지원했건만, 농작물 수확 업무에 배정됐다. “수확!” 파바바박. “연화 좀 봐. 이렇게 수확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일당백이군!” 내 열정에 시스템도 감동한 걸까. [<시스템>스킬 ‘수확’이 스킬 ‘수확(히든)’ 으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킬, 사용 범위가 범상치 않다. [<시스템>‘수확(히든)’ 스킬로 특수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늪지대의 녹색 고블린’ 위쪽으로 ‘영혼의 끈’이 생성됩니다.] 농작물이 아니라, 죽은 몬스터에게 사용하라고? [<시스템>첫 권속에게 이름을 지어 주세요.] ...아무래도 나, 네크로맨서(라고 쓰고 수확자라 읽는다.)가 된 것 같다. *** 어쩌다 내 작업실이 네임드 둘의 입씨름 장소가 된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누구랑 간다는 건데? 나랑 가. 잘해줄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나가게 해 줄 수 있어.” 탑 공식 1위 길드, 흑사의 길드장 데제가 말했다. “100층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아니, 탑 밖까지요. 제 목숨보다도 연화를 우선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가만있을 노아가 아니다. 규격 외 랭커다운 자신만만한 발언이었다. “나랑 간다고 말해.” “같이 가주세요.” “저놈이야, 나야?” “저를 선택하신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악. 이 끝없는 싸움을 계속 보고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다. “그만!” 나는 양 팔을 쫙 펴고 소리쳤다. “OPEN 팻말 못 봤어요? 이제 영업시간이라고요! 다 끝나고 다시 오세요! 그러니까 둘 다 나가!”
시련의 탑 2층에선 아침마다 진풍경이 벌어졌다.
“비켜. 내가 먼저 왔어.”
“무슨 소리야! 난 어제 저녁부터 여기서 텐트치고 기다렸다고!”
투덜거림이 고함이 되고, 고함이 주먹다짐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또 시작이군.”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곤 쯧쯧, 혀를 찼다.
오픈런 줄이 맞은편까지 늘어서 있으니 기다리다 지친 모험가끼리 싸움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모두가 목 빼고 오픈을 기다리는 이곳은 소문난 식당도, 희귀한 아이템을 파는 명품 상점도 아니었다.
이곳은 바로….
“엇, 아홉 시다!”
그때 누군가가 시계탑을 가리켰다.
굳게 닫혀 있던 문에서 뼈만 있는 손이 쑥 삐져나오더니 <CLOSE>라 적혀 있던 팻말을 돌렸다.
<OPEN>
“열렸다! 얼른 들어가! 오늘은 꼭 용병을 받아야 해!”
“너만 급하냐, 얀마! 나도 급하다!”
줄이 흐트러지고, 질서를 내던진 손놈들이 안으로 들이닥치려던 순간이었다.
따닥. 따다닥.
문 안쪽에서 해골 부대가 쏟아져 나왔다.
“헉. 해골 병정이다. 저거 30층에서야 잡을 수 있는 몬스터지?”
“야야, 줄 서, 줄 서. 해골이 사람들 집어 던진다.”
해골 부대는 뼈로 된 손으로 줄을 이탈한 사람을 잡아챘다.
휙-
삼십 층 몬스터 앞에서 웬만한 모험가는 미물일 뿐이었다.
가벼운 손짓에도 손놈들이 줄로 날아가 본래 제가 있었어야 할 자리에 처박혔다.
“헉. 뭐야, 저기? 여긴 안전지대인데 왜 몬스터가 돌아다녀?”
지나가던 초보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오늘 처음 온 모험가인가 보지? 한 달 먼저 온 선배로서 주는 팁인데, 여길 잘 알아 둬.”
줄 서 있던 모험가가 앞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엔 나무로 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칼리만의 인력 사무소?”
“혼자서 탑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고, 파티 구하자니 어떤 놈들 걸릴지 몰라서 무섭잖아. 그럴 때 오는 거지.”
“돈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건가요?”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예전엔 그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모험가는 사람들을 잡아채는 해골을 보며 씩 웃었다.
“몬스터를 빌리러 오는 거지.”
한편 이곳의 부소장, 연화는 인력 사무소 뒤쪽의 작업실에 서 있었다.
“오늘은 좀 늦네.”
작업대 위에는 고기가 될 예정인 고블린 시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그쪽이 아니었다.
고블린은 위로 한 층만 올라가도 잡을 수 있는 하급 몬스터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벌컥.
바로 저거다! 43층 몬스터, 검은 뿔 타우루스!
“무사하냐, 쥐똥.”
열린 문으로 등에 거대한 황소를 맨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뒷세계의 지배자라 불리는 ‘흑사’의 길드장 데제였다.
제 몸집의 수배는 되는 몬스터를 이고서도 그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몬스터를 작업대에 가뿐히 올린 그가 앞쪽에 기대섰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매서웠다.
“무사하겠지. 그러니까 살아서 그딴 놈 제의도 받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흠칫.
“그걸 어떻게….”
“탑에서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해?”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다. 흑사 길드는 공략된 모든 층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흑사의 정보망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놈 따라가서 뭐 하려고. 나랑 가.”
그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왜 안 오나 했다. 데제가 왔으면 ‘그딴 놈(데제의 표현을 빌리자면)’도 와야 하는데.
“선약을 가로채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짓입니다.”
와. 데제 앞에서 상도덕을 찾는 사람이 있다니. 규격 외 랭커는 역시 생각하는 것도 남달랐다.
‘사람이 참 순진하다 해야 하나, 맹하다 해야 하나.’
노아는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내 앞에 와 섰다. 공교롭게도 데제의 맞은편이었다.
“뭐야. 오면서 보지 못했는데.”
“투명화 마법을 쓰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냥 서 있으면 될 걸 굳이 마법까지?”
“제가 새벽부터 기다리는 걸 알면 연화가 기겁할 테니까요.”
…그걸 알면 기다리지 않으면 되잖아.
“그런 걸 뭐라 하는지 알아? 스토커라 해. 알지? 지구에선 범죄라고.”
“매일 여기로 쫓아오는 당신이 할 말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말이 모험가지, 깡패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2025.03.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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