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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였던 여인, 이네바는 왕국의 개망나니로 불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독하게 살아남아 왕국이 다시 재건되고 승전국으로서의 맹위를 떨칠 수 있도록 음지에서 도왔다. 결국 왕으로 즉위한 왕세자로부터 돌아온 것은 배신 그리고 자신의 죽음. 하지만 이네바는 죽지 않고 보이츠레츠 가의 유일한 여섯 살 짜리 딸 ‘기젤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무슨 짓을 해도 사랑 받는, 어여쁜 꽃 같은 팔자의 시작이었다. 이왕 꽃처럼 살게 되었으니, 여느 영애들처럼 고고하고 잔잔하게 인생을 보낼까 했지만 역시 망나니 기질은 버릴 수가 없네. "영애를 지켜보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지." "오늘은 또 누굴 조지러 가나? 같이 가지 그래." 이렇게 살아도 날 좋아해주는 잘생긴 공작도 있다고. 이번 생엔 고고한 망나니로서, 날 건드리는 것들은 말로 친히 조져 주겠다. 단, 그럼에도 계속 기어오르는 것들에게는 신명나게 등에 칼을 꽂아 줄게. 어쩔 수 없이. #망나니여주 #능글남주 #연상인데연하인남주 #알고보면키잡 #빙의 #신분상승 #킹메이커
라투베르크 왕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상단이 있다. 보통 상단의 유명세는 상단이 보유한 재화의 양과 취급하는 품목의 다양성에 따라 결정되지만, 이 상단은 그렇게 평이한 이유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아니다.
까마귀 상단.
실제로 상단의 이름은 정해진 바가 없으나, 상단원들의 손목 안쪽에 새겨진 까마귀 인장이 유독 특징적이었기 때문에 모두 그들을 까마귀 상단이라고 불렀다.
까마귀 상단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고객이 원하는 그 어떤 것이든 구해올 수 있으며, 만약 원하는 것이 물건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가능케 만들어주는 곳.
단,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 까마귀 상단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달리 말하면, 상응하는 대가를 저울추 반대편에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사람 목숨 하나 앗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
그들의 손속엔 자비가 없었으며 계약 이행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까마귀들의 날갯짓에 스러져간 목숨이 수백이고, 그로 인해 흘린 사람들의 피눈물은 다인 강이 되었다는 음유시인의 노래는 과장이 아닐지도 몰랐다.
20여 년 전 첫 발을 내딛은 까마귀 상단은 이제 왕국의 명운을 좌지우지할 만큼 거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증거는 까마귀 상단의 단주 이네바가, 야심한 밤 라투베르크 왕궁에서 단신으로 국왕을 접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클레앙 적장자의 수급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내 너를 양지로 부르리라. 영지를 하사하고, 모든 이들의 칭송을 받는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하리라.”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피비린내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며 모두의 두려움과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던 지난 세월을 대가로, 밝고 찬란한 태양 아래로 걸어 나가는 그 순간.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여아의 몸으로 홀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 30년의 세월이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흉터투성이인 몸뚱이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깊게 패여버린 주름. 검게 그을린 피부와 칠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
그녀는 이제 까마귀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세상의 때와 오물이 묻어도 티가 나지 않는 검은 새. 세상을 보는 눈마저도 검게 물들고, 먹이를 쪼는 부리마저도 새카맣게 타 버린 새.
국왕은 검은 새가 된 여인을 태양 아래 바로 세우는 것을 조건으로, 일반적인 인간이 이행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적국의 황태자를 참살하고 눈앞에 그 수급을 가져오는 것. 또는 결박하여 산 채로 데려와, 황태자를 인질로 써먹어 오클레앙 놈들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게 만드는 것.
일개 상단이 수행하기에는 너무도 정치적이었으며, 너무도 위험한 요구였다.
그러나 이네바는 그걸 해 냈다.
오클레앙 황제의 외동아들, 유일한 혈육인 황태자를 전투 중에 사로잡아 왕 앞에 무릎꿇렸다.
왕위계승자를 빼앗긴 오클레앙은 항복하며 황태자를 송환하는 조건으로 영지를 내놓았고, 라투베르크는 그렇게 전황을 완전히 뒤집어 30년이 넘도록 이어진 지지부진한 전쟁의 승전국이 되었다.
그리고 약속의 날.
이네바에게 작위가 수여되고, 드디어 그녀가 온전히 공적을 인정받고 세상에 나오기로 약속받은 그 날.
국왕과 약속했던 장소였던 라투베르크 도성 중앙광장에는 아직 풋내가 채 빠지지도 않은 어리숙한 왕세자가 병사들과 함께 무장한 채 서 있었다. 도성의 백성들도 이네바의 작위수여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광장을 가득 채웠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감히 천한 네가 아바마마의 존위를 묻는 것이 가당키나 하더냐.”
일국의 왕세자라 하지만 그는 변성기가 이제 막 시작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나 어린 그의 경멸과 혐오가 가득 담긴 비웃음이 이네바의 귓전을 때렸다.
익숙하다. 미움을 받는 것은 이네바의 인생 전부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예. 천한 제 손을 빌려 전쟁을 끝내셨으니 충분히 가당한 줄로 압니다.”
이네바의 대답에 왕세자와 병사들이 모두 낄낄대며 저마다 한 마디씩 이네바를 모욕했다.
“제 손을 빌려? 이 삼십 년 전쟁이 네깟 계집 하나 때문에 끝났다고 생각하느냐. 배운 것이 없으니 분수 또한 모르는 게 분명하구나.”
“더러운 피를 가진 계집이, 제 피만큼이나 더러운 짓만 하며 살아왔음에도 양심이란 게 없는 게지.”
“작위를 준다니 냉큼 오클레앙의 적장자를 데려올 정도면, 패물 하나 내어 주면 제 몸뚱이도 얼씨구나 하고 내어주지 않겠습니까?”
“패물까지 필요 있나. 발에 채이는 자갈 하나 던져 주면 족할 것이네.”
귀족들과 왕세자는 이네바가 분수에 맞지 않은 짓을 한다며 그녀를 조롱했고, 백성들은 그녀의 악명을 수군거리며 헐뜯었다.
“저 여자 때문에 우리 남편이 죽었어요! 저 여자를 죽여주세요!”
노름에 미쳐 가산을 탕진한 남편을 죽여달라 요구했던 아내가 새된 목소리로 울부짖었고.
“내 딸이 까마귀 놈들 손에 잡혀 가, 어디로 팔려갔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얼른 죽이시오!”
혼인 전 남자와 염문이 났다는 이유로 딸을 외국에 보내버린 비정한 아버지가 분노에 가득 차 일갈했다.
“그렇군.”
이네바는 자신을 향한 모든 비난과 조롱을 하나하나 들어 새겼다.
“너희의 원죄를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고 싶었을 뿐인 거지. 그 알량한 양심으로부터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해서.”
이네바의 검은 눈동자가 태양 아래 번뜩이며, 어린 왕세자의 번들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주시했다.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그녀가 두 번째로 물었으나 왕세자는 이네바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죽여라.”
병사들은 저마다 날카로운 병장기들을 꺼내어 이네바에게 쇄도했다. 여인 하나를 잡기 위해 서른의 병사가 달려들었다. 병사들의 지시로 광장에서 빠져나간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창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악명을 떨치던 한 상단의 단주가 천적을 피해 꼴사납게 도망치는 모습을 기꺼이 즐겼다.
이네바가 끝까지 버티며 왕국 병사를 하나씩 하나씩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몸에 생채기가 생길 때마다 광장에서 환호성이 터질 뿐이었다.
마치 옛 왕국의 노예 검투사가 된 것처럼, 모든 이들의 앞에서 맹수들에게 쫓기고 유린당하는 꼴이나 매한가지였다.
“저 질긴 년!”
“까마귀가 시장 쪽으로 도망간다!”
2025.08.1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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