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한 피폐물 소설 속 악역으로 빙의했다. 여주인공을 괴롭히다 사형당하는 공작의 약혼녀, 라벤느 리슈펠트로. 게다가 약혼자는 여주에게 반해 반역을 저지르다 황제한테 참수당할 예정! 나는 너랑 사이좋게 손잡고 참수당할 마음이 없어요! 하루빨리 파혼당하기 위해, 공작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게 여기는 ‘세상 물정 모르는 데다 머릿속에 꽃밭만 들어 있는 로맨스 소설 중독자 영애’를 연기하기로 했다. 더불어 그 청순한 뇌로 가산을 탕진해 볼 생각이다. 그런데 왜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이지? 대체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역시 아가씨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전 아가씨가 정말 어딘가 아프신 게 아닐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다 뜻이 있으셨던 거네요.” 아니야, 그런 뜻 없었어! “영애의 안목이 심히 대단하시군요.” 무슨 헛소리야? 내 눈은 그냥 장식품이라고! 그러는 사이에 공작에게 내 계획을 들킨 것 같다. “내게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꼭 협박이라도 하시는 것 같네요.” “글쎄. 이왕이면 애원이라고 해 두지. 그편이 좀 더 그대의 취향이지 않나?” 대체 왜 이러세요? 우리 얼마 전까지 파혼할 만큼 사이 괜찮았잖아?
1화
“저게 뭐고. 저 봐라, 저. 남자 잘못 만나서 난리다, 난리야.”
어린 시절 할머니는 종종 드라마를 보면서 기구한 여주인공의 인생에 대해 한탄을 하곤 하셨다.
“아이고, 불쌍해서 어째.”
드라마에 관심이 없던 나는 할머니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몰랐다. 그 당시 어린 나의 관심이라고는 그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사탕뿐이었으니까.
할머니 옆에 누워 사탕을 하나씩 까먹고 있으면, 할머니는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하야.”
“응?”
“니는 저런 놈 만나면 안 된다.”
“왜?”
“저런 놈이 여자 인생도 말아먹는 기다. 그러니까 너는 번듯한 남자 만나라. 알았제?”
‘저런 놈’이란 게 대체 무슨 놈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 5살의 내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사는 낙이, 나와 드라마뿐이시던 할머니는 몇 번이고 내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응. 알았어.”
그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머니는 날 끌어안으며, 우리 강아지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쩌면 할머니는 이걸 예상하신 걸지도 모르겠다.
남자를 잘못 만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내 운명을 말이다.
***
‘빙의돼 버렸다. 그것도, 여주를 괴롭히다가 사형당하는 악녀에……!’ 라는 흔하디흔한 로맨스 판타지의 도입부를 스스로 내뱉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왕 내뱉을 거라면 앞으로 내 목표는 돈 많은 백수! 역하렘! 주지육림! 같은 정신이 글러 먹은 어른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거창한 목표를 내뱉고 싶었다.
백작의 여식이라면 모름지기 이 세계의 특권층 아닌가!
아아, ‘특권층’이라니, 이 얼마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단어인지!
평범한 사람이었을 적에는 사회의 부조리를 비난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며 내뱉었을 단어겠지만, 손에 쥐기만 한다면 목숨 바쳐 지킬 소중한 단어였다.
그리고 이 권력을 이용해 방탕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그런 소박한 꿈을 꾸고 싶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내가 좀 더 평범한 백작가의 영애였다면 그랬을 거란 말이다.
“누님께서 이대로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답니다.”
낯선 천장 따위에 놀라지 않는, 로맨스 판타지로 절여진 뇌는 이 상황을 빠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날 누님이라고 부르는 오늘 처음 본 소년은 내 손을 꼭 잡고서 어쩐지 사뭇 과장된 연기로 날 걱정스레 올려 보았다.
왜 연기라고 생각하냐면, 그야 문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 그나마 시집이라도 가서 사람 구실 하나 생각했는데…….’
한겨울 서릿바람보다도 차가운 목소리로 날 비난했던 동생이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자마자 태도를 바꿔 걱정한 척해 봐야, ‘가족물인가?’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제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영향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누님, 안 그래도 공작님께서 걱정하신 모양인지 직접 오셨어요. 빨리 준비하고 내려오세요.”
일어나자마자 공작을 만나라니. 시작부터 하드 모드네.
아직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지만, 로판 세계의 불문율은 알고 있다.
공작은 지위가 높다는 것. 그리고 그런 높으신 분 앞에서 나 같은 일개 귀족은-방을 보아하니 귀족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작은 실수에도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예법이 머릿속에 파바밧 하고 떠오르면 좋으련만, 꿈 주제에 그런 편의는 제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법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데다 옆에는 내게 적대감을 가진 소년까지 주렁주렁 달고서 공작을 만나라고?
나가 봐야 귀찮아질 게 분명했기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몸이…….”
“누님, 지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요?”
“……응?”
어설픈 연기가 들켰나 싶어 소년을 바라보자, 표정이 싹 바뀐 그가 말을 이었다.
“누님을 살리겠다고 의사와 사제를 불렀어요. 들어간 돈만 이미 수십 골드란 말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누님께서는 똑똑하니 이해하시겠죠?”
아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소년의 표정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보통 상대방이 돈을 들먹이며 강압적으로 나올 때는 ‘돈값은 해야지 않겠니?’라는 말이 숨겨져 있었고, 눈칫밥이라면 남 부럽지 않게 먹어 온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25.04.2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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