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사람들은 몰랐다. 성녀가 제물을 위한 존재라는 걸. 그러나 사람들은 알았다. 성녀의 가치가 희생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 자애의 산물이자 희생의 상징. 니니아의 의무는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을 끝으로 명을 달리 했어야 했다. ***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다간 재미없을 뻔했어.” 커다란 손이 니니아의 목덜미를 쥐었다. 오싹한 감각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니니아는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미안해요.” “넌 대공비가 아니라 태엽 인형이라도 되는 건가?” 그는 니니아를 향해 화를 드러냈다. “성녀도 아니고, 몸도 쓸모가 없고.” 붉은 시선이 니니아를 사납게 할퀴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쥔 손은 어느새 뺨을 움켜쥐어 니니아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체 널 어디다 써먹어야 하지?”
#1. 성녀에 대하여
‘성녀는 어떤 존재인가?’
광야의 떠돌이가 성녀의 가치에 관해 물었다.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자 위대한 희생정신을 가진 이 세상 가장 순결한 여인 아닌가.’
그러자 빈 뜰의 목동이 대답했다.
누가 이 위대한 명안에 반박할 수 있으랴.
성인. 성자. 성모.
그 아래 성녀 있으리.
-카네르 순교록 14;1-7 중에서
토톡. 젖은 이슬이 흰 꽃잎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흰 백합은 카네르교의 상징되는 꽃이었다. 그렇기에 신전을 비롯하여 카네르를 믿는 교인이 기거하는 곳에는 언제는 향기로운 백합이 곁을 지켰다. 이 기도실 또한 흰 꽃들로 범벅이었다.
새벽에 꺾어 장식된 꽃들 가운데에는 카네르 여신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이 먼지를 비추는 통에 미물조차 아닌 티끌은 아름다운 금색으로 반짝이며 여신상 곁을 부유했다.
지나치게 고요하여 느리게 흘러가는 볕의 움직임마저 미동으로 보였다. 자애로운 여신의 그림자 아래에는 여인이 무릎 꿇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여인은 오늘도 자신이 믿는 신을 불렀다. 그러나 언제나 다름없었다. 이 지독한 침묵은 어떤 수를 써서든 깨지지 않는 철벽 요새와 같다.
“……안식을 주소서.”
여인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여신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이것뿐이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기도실에서 신에게 맹세한 육체를 멋대로 흩트리고 만 것은 결국 여인이었다. 그녀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베일을 쥐어 당겼다.
여인이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이 금실의 너울처럼 흔들렸다. 여신상을 올려다보던 푸른색 눈동자는 얼핏 바람 부는 들녘의 새파란 하늘처럼 보였다. 그 눈은 금색 타래 같이 긴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가녀린 체구에 백지장처럼 흰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은 유독 희어 주변에 장식된 백합과 다를 것 없을 정도다. 내내 고개를 들고 있던 여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금실을 짜내어 만든 듯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사파이어를 빼닮은 파란색 눈동자. 카네르교의 위대한 4인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어깨보까지.
이 세 가지 증거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명확했다.
‘48대 성녀 니니아.’
달도 없이 새까만 밤, 홀로 빛나는 별 아래에서 첫울음을 터트린 아기. 위대한 희생정신으로 이 땅에 고통받는 존재들을 굽어살피는 성녀가 바로 그녀였다.
바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제는 아니지.’
자애의 산물이자 희생의 상징. 니니아의 의무는 최종장을 끝으로 명을 달리하였다.
카네르교의 성녀들에게는 늘 같은 시작과 같은 마지막이 존재했다.
첫 시작은 성인의 신전이었다.
피에첸 제국 내에는 세상이 혼란하여 빛 한 줌 들지 않았을 때 성전의 횃불을 밝힌 성인이 세운 신전이 있었다. 모든 성녀 후보들은 그곳에서 목적을 완수할 때까지 길러졌다.
‘성녀의 가치란 무엇인가.’
니니아는 신전에서 늘 반복되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녀는 신의 품 아래에서 성황을 비롯한 그녀를 길러 온 다른 신관들에게 순종했다. 성녀로서의 희생은 늘 당연하였으며 모든 것은 신의 뜻이었다. 그녀의 마지막이었어야 할 날도 마찬가지였다.
‘카네르의 날.’
여신이 처음 혼돈 가득한 지상으로 내려온 날을 기리는 성스러운 기념일로, 삼 일간 치러지는 이 축제는 올해로 996번이 되는 해를 맞이하였다. 니니아 또한 성녀로서 무수한 대중 앞에 얼굴을 내보였다.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로 사람들을 축복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 ‘카네르의 날’이었다. 여신이 처음 강림한 날의 자정, 니니아는 신전의 제단 위에 있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성녀가 제물을 위한 존재라는 걸. 그러나 사람들은 알았다. 성녀의 가치가 희생에 있다는 사실을.
2025.05.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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