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현대물 #오메가버스 #할리킹로맨스 #계약결혼 #짝사랑수 #재수생수 #미인공 #입덕부정공 #오컬트 한스푼 권희민. 스물. 열성 오메가로 살아온 우성 오메가. 그는 계약 결혼한 남편을 짝사랑하고 있다. --------------------------------------------- <결혼계약서> 제이그룹 설성식 회장의 아들 설제현(이하 “갑”)과 ㈜호산산업 권일락 대표이사의 아들 권희민(이하 “을”)은 다음과 같이 결혼 계약을 체결하고 상호 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합의한다. 제1조 (계약의 목적) 이 계약은 두 사람의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위하여 상호 준수해야 할 제반 사항을 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계약 기간) ①20○○.2.24 ~ 20○○.2.24 (3년간) ②해당 기간 의무적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만료일 이후에는 계약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중략) --------------------------------------------- 그 외에도 제3조 갑과 을은 서로를 존중하여 대한다, 제4조 갑은 을의 안위를 보살펴야 한다, 이런 조항과 세부 설명도 있었다. 그리고 더 내려가면 희민이 유독 꼼꼼히 읽었던, 껄끄러운 조항 하나가 있었다. --------------------------------------------- 제7조 갑과 을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동침해야 한다. ①이 문서상의 동침이란 갑과 을이 알파와 오메가로서… --------------------------------------------- 희민은 차마 더 읽지 못했다. 아무리 태연한 척을 잘하는 그라도 이 부근에서는 속이 메슥거리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1
1. 졸업
검은 세단을 보았을 때, 희민은 막 가방에서 합격 통지서를 꺼내던 중이었다. 하교하던 길이었다. 1월 말, 살을 에는 공기가 켜켜이 쌓인 주택가 골목. 불길하리만치 번쩍거리는 대형 세단이 집 앞을 길게 가로막고 있었다.
손님이 온 걸까?
아니면 빚쟁이들이 찾아온 걸까.
요 며칠 방까지 날아들던 아버지의 통화 소리를 떠올리다가, 괜한 불안이라 치부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점점 어려워지는 건 확실했지만, 빚쟁이가 집까지 들이닥친 일은 드물었다.
희민은 검은 짐승처럼 웅크린 차 후면을 돌아 대문에 걸린 우편함을 열었다. 우편물 확인은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재혼하여 외국에 살고 계신 어머니가 유일하게 허락한 연락 수단은 편지뿐이었으니까.
말려 들어간 편지가 있나 빈 바닥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 손끝에 붙은 먼지와 함께 실망감도 털어 냈다. 합격 통지서만을 들고,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발을 갑갑하게 죄는 운동화를 벗던 희민이 멈칫했다. 낯선 신발이 놓여 있었다. 검은 세단처럼 잘 관리된, 광택을 머금은 남성 구두 두 켤레.
“엇, 희민아! 왔구나!”
검은 차가 손님을 데려온 게 맞는 모양이다. 희민은 드물게 살가운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실에 계신 아버지와 새어머니 앞에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이 정좌해 있었다. 구두 코끝처럼 윤이 나는 시선이 단번에 희민에게 꽂혀 들었다.
“인사해라. 여기 정 비서님이라고-”
떡 케이크라도 받은 양 싱글벙글하던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들어가.”
새어머니가 말했다. 외풍에 떨리는 창문처럼 진동하는 목소리였다. 들어가라고. 그녀가 다시 한번 날카롭게 말했기에 희민은 꾸벅 인사하고 지나쳤다. 어느새 아버지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웬 손님일까. 게다가 평소엔 본체만체하던 아버지가 자신을 반긴 것도 의문이다.
좁은 복도를 지나 달칵, 등 뒤로 방문을 닫고 나서야 이유 모를 초조함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손에 들린 합격 통지서를 아차, 뒤늦게 인식했다. 오늘 오전 합격자 발표가 나자마자 담임 선생님이 챙겨 준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연락이 안 되셔서. 바쁘신가 보더라. 집에 가서 꼭 보여 드려?’
정말 축하한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되새기자 가슴이 조금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버지도 기뻐할지도 모른다.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희민은 합격 통지서를 낡은 책상 한쪽에 잘 올려 두었다.
다시금 통지서를 집어 든 것은 그 후 한 시간여가 지났을 때였다.
“희민아!”
아버지 목소리였다. 교복을 갈아입고 버릴 문제집 정리에 열중하던 희민이 일어서는데, 새어머니의 새된 소리가 뒤따라왔다.
“-안 돼요! 안 돼! 희채 거라니까요!”
“말이 되는 소릴… 아니, 희채한테는 나중에 연락이 되면 다시 얘기하자니까!”
“안 된다구요……!”
다투는 소리에 멈칫했던 것도 잠시, 얼른 안 나오고 뭐 하는 거야! 아버지의 다그침에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합격 통지서도 챙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민은, 곱게 챙겨 온 합격증을 제 손으로 구겨 버릴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너 결혼 생각 없냐?”
아버지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기 전까지는.
*
스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권희민의 인생은 딱 절반으로 나뉠 수 있었다. 열 살 때까지 어머니와 산 10년, 그 이후 아버지와 산 10년.
희민은 아버지, 권일락의 외도로 태어났다. 열 살 때까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바다가 보이는 소도시에서 꽃집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1년에 한 번씩 자신을 보러 오는 아버지를 한없이 반갑게 여겼을 뿐.
‘엄마. 아빠는 부잔데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아?’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다. 선물로 받는 비싼 장난감, 동네 형들이 감탄하는 외제 차, 종종 희민을 데려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름 별장 등등. 부자인 게 분명한 아버지가 왜 어머니와 자신을 데려가 함께 살지 않는지 궁금했다.
2025.05.1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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