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살수로 살아온 세월만 30년. 한때 황궁 담벼락을 넘나들 정도의 실력자였으나, 천 번의 살수행을 끝으로 은퇴를 약속받은 퇴물 살수 월혼. 월혼은 마지막 의뢰에서 배신당하고, 설상가상으로 그가 몸담고 있던 살각은 괴멸된다. 살각의 복수를 위해 떠난 여로의 끝에서 찾아온 악연이자 기연은 그에게 풍전등화 같은 강호의 영웅이 되라 한다. 정도의 몰락과 신마교의 부활, 변황의 중원 진출까지. 갖은 역경을 이겨낸 월혼이 올라설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1장. 마지막 청부
흐트러진 도포 자락. 볼에 묻은 여인의 입술 자국.
방금까지 기녀의 품에 안겨 극락을 구경한 사내는 아직도 여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돈이 원수구나. 돈만 있었어도……딸꾹.”
밤을 지새울 돈이 부족하자 인사불성이 된 몸으로 기방에서 쫓겨나 귀갓길에 오른 남자.
숨어있던 살수 하나가 비틀거리는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율랑현에 사는 조길, 맞나?”
“딸꾹. 댁은 뉘시우?”
술에 찌든 사내는 자신에게 들이닥칠 비극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조길. 나이 서른다섯. 고질병에 걸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은 놈이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기생의 치마폭에 놀아난 인간 말종.”
“네 이놈! 딸꾹, 누군데 말을 함부로 하느냐? 여태 버리지 않고 같이 살아준 게 어딘데, 인간 말종이라니. 떽! 딸꾹.”
흑의무복 사이로 눈만 드러낸 살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또 이런 놈이다. 이게 벌써 몇 번짼가?’
아이 손에 칼만 쥐여줘도 쉽게 목을 딸 수 있는 쓰레기.
월혼의 구백아흔아홉 번째 살행도 너무나 손쉬운 일감이 배정됐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이번만큼은 각주에게 좀 따져야겠군.’
살각의 율법에 따라 천 번의 살행을 마친 살수는 은퇴를 선택할 수 있다.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하나 월혼이 상상한 은퇴는 술주정뱅이나 치우는 싱거운 의뢰로 숫자나 채우고 마는 이런 식은 아니었다.
“너의 처남이 부탁하더군. 누이를 땅에 묻는 날 매형이 묘소를 지키지 않는다면 최대한 천천히 죽여 달라고.”
조길의 흐릿한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 앞에 선 복면인이 자신을 황천길로 인도할 저승차사임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 이건 모함이요! 어찌 일방의 말만 듣고 이러시는 게요?”
월혼은 이따위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짜증이 났다.
스윽. 싹.
그의 비수가 조길의 발목을 매끄럽게 그어갔다.
“으아악!”
칼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개의 비수가 쉬지 않고 놈의 몸에 상흔을 남겼다.
월혼이 수백 개의 상처를 낼 동안 조길은 비명을 지르고, 혼절하고,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놈의 아혈도 짚지 않았다.
진입로를 통제하고 있는 살각의 동료 화몽을 믿었고, 조길의 비명을 듣고 싶다던 의뢰인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다.
“끄아악! 그, 그만. 으아악!”
피는 얕은 상처를 통해 조금씩 새어 나온다. 고통은 배가 되고 죽음은 더디게 찾아온다.
이대로 일각. 단 일각만 지나면 조길의 심장도 더는 뛰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각에서 지원 나온 화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아직 덜 끝난 거요?”
“다 되어 가네. 아, 방금 죽었군.”
결과가 궁금해진 조길의 처남이 화몽을 앞세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누이를 묻고 오는 길이라 했던가?
청부자는 상복 차림이었다.
칼로 난자당한 매형의 시신을 청부자는 넋 놓고 쳐다본다.
생각이 많을 것이다.
저따위 인간을 살리고자 밤낮없이 뛰어다니다 과로로 죽어간 누이.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왈칵 쏟아진다.
“우린 그만 가지.”
월혼은 화몽의 옷깃을 잡아끌어 자리를 피해주자는 눈치를 보냈다.
결국 시신 곁에 청부자만 홀로 두고 둘은 자리를 벗어났다.
“형님, 일도 일찍 끝났으니 오늘은 저랑 술이나 한잔 하시지요.”
“난 각주를 좀 뵈어야겠다.”
“지금……이 시간에요?”
“살수는 밤이 낮인 거 몰라?”
“그야 잘 알지만 방금 살행을 끝마쳤는데.”
“마지막 청부 건으로 각주와 긴히……, 응?”
“……?”
퍽. 퍽.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처남이 울면서 죽은 매형에게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화몽이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거 참, 쌓인 게 많은가 보네. 저럴 거면 직접 죽이지 왜 청부를 해?”
“아무나 살인을 한다면 우리 같은 살수가 왜 있겠어.”
“하긴. 그 말도 맞습니다.”
화몽은 청부자의 울부짖음에 혀를 찼고, 고개 돌린 월혼은 살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형님, 같이 가요!”
* * *
월혼은 낙양 시전 끝자락에 위치한 한 포목점에 도착했다.
뒷마당을 지나 별채에 다다른 월혼이 안쪽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각주를 뵈옵니다.”
-내실로 들어오게.
안에서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통 살수들은 주렴으로 가려진 내실 밖에서 청부를 기다린다. 각주의 권위와 신변 보호를 위함이다.
내실로 들어오란 말은 월혼에게만 주어진 특혜였다.
“하시던 대로 하시지요.”
-다 아는 얼굴인데 마지막까지 내외할 필요는 또 뭔가?
저리 청하는데 끝까지 마다하는 것도 예가 아니다. 월혼은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벽에 걸린 편액의 한 자락 글귀가 월혼을 반겼다.
[빛이 외면한 어둠에 한줄기 달빛 같은 존재가 되리라.]
살각을 세운 어느 살수의 다짐이자, 월혼의 가명이 된 살각의 정신이다.
“청부를 매듭지었으면 사나흘 푹 쉬다 오지, 왜 벌써 와? 이왕 왔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게.”
다탁에 차려진 찻상에서 모리화 꽃향이 퍼져 나왔다.
월혼은 장포를 벗고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규칙을 이리 허물다간 각주의 권위도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다 망해가는 조직에 권위가 어디 있다고.”
살각주 초류의 뼈만 앙상한 손이 월혼의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일초겁살(一初劫殺) 초류는 살각 5대 각주로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살수 오백을 거느린 거대 살수조직의 수장이었다.
2025.06.1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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