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랑을 자각한 순간부터 나는 영원히 앓을 열병에 걸렸다. 내 안의 모든 감각이 무너지고, 온 몸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머릿속은 멍해지고 이내 웃음만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터 당신이 웃는 것만 보면 나도 따라 웃었고, 당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감정만이 남아 나를 사로잡았다. 사랑이 이렇게 너를 앓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것을 병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나는 지금 그 열병 속을 미친듯이 헤메고 있다.
나에게 세상이란 그저 텅 비어있는 하얀 방이었다. 가끔씩 사람이 지나다니긴 하지만 언어를 몰라 소통하려는 노력조차 해본 적이 없고, 그들도 굳이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내 세상은 아주 고요했다. 그저 감흥 없이 살아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유독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방 안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평소라면 그들끼리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데, 그날은 달랐다. 아무리 잘 들린대도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없긴 하지만, 조금씩 들려오는 말소리는 어린 내 호기심에 잠식되기 충분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유리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다, 나를 보곤 뭐라고 말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반짝이는 별빛조차 길을 잃어 헤매게 만들 법한 검은 머리카락은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한 순간 부터 숨이 터지듯 다른 색을 의식하기 시작한 아이가 느끼는 동경은 아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본 이후부터 내 세상은 방대하게 넓어지고, 소란스러워졌다. 지금이라도 돌이켜보면, 내 세상이 넓어지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 덕분에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던 것들을 배웠지만, 끝내 그것들은 무거운 그림자 속에 아주 작고 미약한 별빛만을 초래했으니. 처음부터 밝은 빛을 몰았더라면 어둠조차 의식하지 못한채 괜찮았을텐데, 빛 덕분에 심해를 알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희망을 깨닫는 법도 배워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내게로만 시선을 고정하며 유리 너머에서 단려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그저 쳐다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내게 말했다. 물론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략 사흘이 더 지나고, 그녀는 내 공간에 발을 들였다. 아주 조용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세상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곤 무언가를 말 했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곤 표정을 조금 굳히곤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날 이후로 내게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대화하는 법 부터 배웠다. 평범한 아이라면 언어를 자주 접해 말을 알아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언어를 접해본 적이 극소수기 때문에 그것부터 시작했다. 그녀에게 언어를 배우고, 세상을 배웠다. 그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말갛게 웃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세상은 고요한 숲이었다. 항상 내게 자신이 보고 싶고, 살고 싶은 세상을 재잘거리며 설명했다. 그녀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은 그때 당시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녀의 옆에 존재하다 보면 나도 그런 세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고 했다. 이름은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만들며,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보통 이름을 가지게된 사람에게 아주 무안하고 깊은 애정을 가진다고도 했다. 자신이 만들어준 이름으로 삶을 살고, 그 이름이 기억을 대표하는 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인지 설명했다. 그리곤 이름을 몇 개 지어 왔는데 괜찮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름을 하나씩 읽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들어도 사람들의 이름은 잘 모르기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느낌이 오는 이름이 없어?"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아는 것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흠... 아무래도 넌 해일이 제일 어울리는 것 같아. 어때?"
아무래도 좋았다. 내 게 무한하고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는 당신이라면, 아무거나 붙여줘도 괜찮았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그녀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나를 안아들었다.
"내 이름은 연주빈이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자, 연주빈은 실없이 웃어보이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자야지. 시간이 좀 늦었네."
연주빈은 내가 소중하다는 듯 나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곤 이불을 덮어줬다. 그리고 내 옆에 누워선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연주빈의 검지 손가락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해일이를 처음 봤을 때의 감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멀리서 봐도 알겠더라. 비록 제 과거의 어릴 때 모습은 본 적이 없었지만, 해일이는 그저 그렇게 닮았었다.
해일이는 하준이의 복제품이었다. 이걸 설명하기 전에, 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대략 15년 전쯤, 세상엔 이상한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귀신이 사람 몸에 들어온 것 같다는 루머. 이 루머는 한 영상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영상은 이러했다. 술을 먹은 친구가 정육점을 발견하자, 그곳으로 홀린 듯 들어가 모든 고기를 먹어 치우기 시작하는 영상이었다. 주변에 같이 있었던 친구들도 영상의 주인공을 말리고, 정육점 주인도 영상의 주인공을 말렸지만, 그는 모두가 달라붙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힘으로 당시 정육점의 고기를 전부 먹어치웠다. 고기 값이 꽤 나오고,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후기가 올라오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영상이 신호탄이라는 듯, 많은 사람들이 생고기만 보면 눈이 돌아가 먹어 치운다는 제보가 곳곳에서 빗발쳤다. 병원을 가도 이상은 없었다는 이상한 이야기도 함께 올라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아 살육을 시작했다. 살육을 시작해 사람의 피를 맛보게 된 사람들은 모습이 아주 기괴하게 변했다. 사람이라고 하긴 애매하고, 괴물이라고 하기엔 아직 사람같은 존재. 이도 저도 아닌 그 존재는 개채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인구의 절반 가량이 죽게되자, 사람들은 그저 벌벌 덜며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는 생활을 시작하게된다. 모든 곳에선 세계가 드디어 멸망하려는 징조라고 떠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을 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최초로 나타났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노야. 고립된 우리 나라의 유일한 희망인 그녀는 홀로 괴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후엔 노야를 중심으로 연구소가 하나 세워졌다. 가든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점점 대중들 사이에 인지도를 높여가며, 무력해진 현 체제 대신에 새로운 체제라며 더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의 정부처럼 권력을 행사하며,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노야같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결국엔 아무도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가든은 괴물에게 딥테인이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간 초월적 능력을 지녔다 해도, 그녀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든이 세워진지 대략 2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딥테인은 끝없이 개체수를 늘려갔지만, 가든은 루네크를 만들 수 없었다.
노야가 세상을 더난 후, 노야의 유전자를 사람에게 복제해 노야가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다른 사람 몸에 안착시키는 실험이 성공하여 만들어진 것이 하준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루네크들이 가든에 존재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그렇게나마 세상엔 적절한 질서가 생겨났다.
나는 해일이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는 방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가든의 정원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정도현."
정도현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얼굴 보기가 힘들다?"
나는 정도현 옆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2025.07.12 00:21
2025.07.02 17:31
2025.06.25 23:45
공모전은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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