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인간계에는 악마와 마녀가 산다. 기억을 지워주는 기억상점에 대해 들어본적 있는가? 아무도 없는 시내거리에서 권 솔은 처음보는 이상한 상점을 마주한다. 불빛이 깜박이는 아래, 권 솔은 그곳에서 마녀 베닛과 거래하게 되고, 그녀의 소개로 악마 소천을 만난다. "제 기억 말고, 다른 사람의 기억도 지워주실 수 있나요?" "안될 건 없지만, 나쁜 목적은 안돼. 우리 마녀들도 윤리관이라는게 있거든~" * "너, 진짜 악마맞아? 악마가 이렇게 애같아도 되나..." "이게 자꾸 날 의심하려드네?" 기억상점을 배경으로 권 솔의 마계와 인간계를 오가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악마남 #인간녀 #계약관계 #판타지
사람은 모두 원하는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
운명은 소리 없는 파도다. 파도가 당신을 덮치고 나서,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헤엄을 치는가, 물속에 잠겨있는가. 운명에 벗어나려 하는가, 운명에 순응하는가?
*
물기를 머금어 축축해진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친다. 잠시 내린 소나기로 축축해진 아스팔트 바닥에 그녀의 신발이 닿자 철퍽였다. 뒤에서는 그녀가 열고 나온 도색이 벗겨진 낡은 철문이 끼익하는 음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권 솔은 늦은 저녁, 가로등 빛 한 점이 겨우 깜박이는 골목길을 울분에 차 달리고 있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겉옷 한 점 걸치지 못했고, 꺾어 신은 낡은 운동화가 벗겨질 듯 불안했다. 권 솔은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뒤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따라왔다.
"이게 감히,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
쨍그랑, 술병이 날아들어 그녀의 그림자 위에서 깨졌다. 반전 없는 그녀의 삼촌이였다. 권 솔은 들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들어가나 봐라. 하며 속으로 집안에서 저를 향해 불같이 화를 내며 술을 들이마실 삼촌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인생의 끝이 있으면 저 낡고 낡아서 퀴퀴한 냄새가 나고, 정리가 안되어 잡초가 드문드문 자라는 작은 마당에, 술병이 가득 쌓여서 마트에 팔면 만원은 족히 받을 법한. 저 붉은 지붕과 오래된 철문이 있는 저 집이 제 인생의 마지막 장소일 것이라고. 그 말은 결국 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아…, 되는게 없네. 갈 곳도 없고.'
그녀는 신발코로 축축한 바닥을 콕콕 찍었다. 밖에서 3시간 정도 버티다 보면, 삼촌은 술을 마시다가 고주망태가 되어 곯아떨어질 것이고 그녀는 그때 들어가서 그가 일어나기 전에 나가면 된다. 그런 식으로 며칠이면, 아마 전부 잊어버릴 것이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권 솔은 집에서 한참 떨어진 가로등 밑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 가로등은 익숙하다.
그녀는 숙인 몸을 일으키며 손을 옆으로 뻗어 가로등을 더듬거렸다. 붙여진 지 오래여서 군데군데 찢어진 감촉. '이사 전문! 빠르게 해드립니다.'라고 적혀있을 빨간 스티커의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 가로등의 앞까지 뛰어오면, 바로 앞에 시내로 나갈 수 있는 골목길의 끝이 있다. 권 솔 혼자만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 앞까지 오거나. 아니면 멈추거나.
더 갈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날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골목길을 나가야 했다. 괜히 불똥 튀기 싫었기에. 권 솔은 추레한 자기 모습을 탁한 물웅덩이 속으로 올려다봤다. 날이 쌀쌀하긴 했지만 떨릴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겉옷 한 벌 걸치지 않은 얇은 옷차림이었다. 물론 추위를 안 타니까 괜찮다는 뜻이긴 하다. 낡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만큼 당당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깜박이는 불빛이 훤했다. 권 솔은 벽에 붙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전적인 시내거리가 보였다. 옷가게, 핸드폰팔이점, 식당같은 것들이 있는 시내.
'어라?'
이상하게 오늘따라 아무도 없었다. 24시 편의점도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창가를 힐끔거리며 살펴봐도 아무도 없다. 기이한 고요함이 적막한 거리를 맴돌았다.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가로등 불빛과 상가 건물들의 간판에서 나오는 누리끼리하고 밝은 불빛뿐이었다. 바닥에 쓰레기가 나뒹굴고는 있었지만 그뿐이다.
그렇지만 마침 잘 되었다. 그녀는 안심했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실, 이러는 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가장 밝은 건물의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깊게 내쉬었다. 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하늘에 별 하나 없다.
그녀는 제 어머니를 생각했다. 몇 년 전, 그녀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는 다신 볼 수 없게 된 그 사람을. 제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형편이 좀 나았다. 또래처럼 멋들어진 장난감 없이도 책 한권이면 행복하던 시기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책을 실감 나게 읽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어머니는 콩나물 반찬을 잘했고, 이상한 괴식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멋쩍은 듯이 고상하게 미소 지으며 실수했네! 라고 했다.
권 솔이 생각하기에도, 제 어머니는 선하고 착하고 베풂을 알았고, 어딘가 모르게 인간을 초월한 듯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다신 보지 못하니 어린 시절의 감상과 제 추억이 더해진 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이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제 어미를 찬양하던 게, 아직 기억에 선하다. 그녀가 그렇게 사라지고 매정하게 돌아선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멀어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것은 잘 안다. 멀어진 것은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 간의 거리뿐만 아니라, 관계까지도. 억지로 쥐고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건 중학생 때 이미 다 뗀 지 오래였다. 이 나이 먹고 궁상떠는 것도 좋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길이 있다면 알려달라는 심정으로 권 솔은 머릿속으로 노래 하나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먼 곳으로 돌아가, 돌아오지 않아도 돼, 넌 바람을 따라 먼 곳으로 왔지. 먼 곳으로 돌아가, 돌아오지 않아도 돼….
*
한참 뒤, 기이한 반짝임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 그 단어뿐이다. 이질적이고 인공적인 반짝거리는 소리, 몽환적으로 흔들리는 소리 따위가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권 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리로 와, 하고 손짓하는 형상이 눈앞에 그려졌다. 무엇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강한 충동이 그녀를 저울질했다. 이 앞에 무엇이 있을까?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아무도 없다. 자신이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무도 자신이 이곳으로 향하는 걸 말려줄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희미하게 웃음이 났다. 그건 평소랑 다를 게 없으니까.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것이 색다르길 바랄 뿐이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걸어가는데 눈 앞에서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보라빛으로 반짝이는 간판의 불빛이.
참, 오늘 간판을 많이 보네.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냥 가게? 그게 다라니. 어이가 없었다. 착각도 유분수지. 눈 앞에 있는게 색다르길 바래?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바보같이. 권 솔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가게인지나 볼까. 이상한거면 돌이라도 던지고 튈까보다. 실행에 옮길 수는 없겠지만. 한참을 빤히 쳐다보는데 도무지 간판의 글씨가 읽히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가?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것 같네.'
권 솔은 인상도 찌푸려보고, 눈도 벅벅 문질러보았지만 글자 자체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야, 이거? 설마 불법매장인가? 수상하게 번쩍이는 간판, 이상한 소리에 홀린듯이 이곳으로 온것도, 게다가 아무도 없는 시간에 영업을 하기까지…. 심지어 이 앞에 오니까 소리도 안 들린다고. 너무나도 의심가는 점이 많았다. 이 앞에 있다가 무슨 범죄에라도 연류되는거 아냐?
권 솔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심각해져선 뒤로 두어발자국 정도 물러섰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힐끔 들어올려 다시 확인해봤는데 뭐가 이상한지 알 수 없을정도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5분 넘게 쳐다봐도 보이지 않던 글자가 기어코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상한게! 도대체 이상한건 이 건물인지, 나인지. 아니, 진짜로 이상했던건…? 권 솔은 부정하고픈 마음으로 글자를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기억… 상점?"
황당해서 헛웃음을 참을수가 없었다. '기억을 팔러오세요!' 친절하게 볼드체로 적힌 그 글자가 어이없었다. 기억을 팔아? 퍽이나 그러겠다. 무슨 괴담이나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이딴걸 믿는 멍청이가 어디있는데? 영화 세트장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믿겠다. 어, 잠시만. 진짜 세트장인걸까? 순간 머릿속에 혼돈이 차올랐다.
아니, 그럼 여기 있으면 안되지 않을까. 불현듯 스친 불안이 현실이 될까, 그녀는 가끔 두려웠다. 다시 돌아가서, 아까 그 자리에 있자. 가서 궁상이라도 떨자. 그게 좋을 것 같았다. 권 솔이 뒤를 돌으려 마음먹는 순간, 아까 전의 반짝거리는 그 소리가 다시금 들리며 문이 열리고 말았다. 마치 초대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뭐야, 안 들어가요. 안가요, 사양할게요. 괜찮습니다…. 권 솔은 기겁하듯 뒤로 물러났다. 안에서는 어둠도 빛도 없이 그저 반짝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걱정마, 들어와도 돼. 또다시 그 목소리와 함께 문고리를 돌리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 형상이 너무 익숙했다.
"…… 어?"
아니겠지, 그런데 너무...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보통 그러면 사라지는데, 여전히 그 앞에, 그자리에 서있다. 온화하고 고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권 솔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기억상점이라느니, 기억을 팔라느니, 이게 사이비든 뭐든, 결과가 어떻든간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 더 나빠질게 있을까? 말도 안되는 허황된 것 같은 그런 것은 믿지 않지만 지금은 그러니까, 그냥… 한번만….
2025.07.31 23:56
2025.07.31 21:32
2025.07.18 00:51
2025.07.15 15:57
시작부터 분위기 너무 좋은데요?? 공모전 작품 중에 유독 눈에 띄어서 들어왔는데, 기대 이상이에요!! 프롤로그만으로도 분위기랑 설정이 강하게 전해져서 몰입감 최고,, 프롤로그만 봤는데 벌써 몰입됐어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응원해용 :3
2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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