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헬조선에서 벗어난 것도 잠시, 눈을 뜬 곳은 진짜 악마들이 사는 헬(Hell)이었다. 거기다 이 몸의 주인은 순수 귀족 악마인 척 하는 인간 혼혈이었다. ‘이제 와서 인간 혼혈이라는 걸 귀족 악마들에게 들키면 끝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성인식 축제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패물 들고 시골로 튀는 것. 그리고 축제의 참여 조건은 홈쇼핑에서 권속을 구매하는 것. 어쩌다 우연히 본 홈쇼핑의 특별 상품으로 권속을 구매하는 데 까지는 성공했는데. “반갑습니다. 당신이 이 방의 청결을 형편없이 담당하는 바로 그 악마로군요.” “제 주인님에게서 다섯 걸음 이상 떨어주시겠습니까? 그 더러운 입냄새가 이 분의 향기로운 체취에 묻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 남자 상상 이상의 아가리 파이터다. 거기다. “주인님께 다른 권속이 생긴다니 말도 안 됩니다. 계약 연장을 추천드리죠 저 만한 권속을 다시 찾기는 불가능할테니까요. 아, 참고로 의견을 물은 건 아닙니다.” 자기 멋대로 계약을 연장하기까지. 원래 권속이라는 게 이렇게 집착이 심한가요, 쇼호스트님? 제가 남긴 문의 글 좀 봐주세요!
1화
새까만 가구, 하얀 침대. 음침한 방 한 가운데에서 왜소한 체형의 시녀는 은빛으로 빛나는 내 머리를 위로 높게 틀어 올려주고, 붉은 눈동자 위 눈꺼풀에 옅은 파우더를 바르고는 완벽한 결과물에 미소를 지었다.
“전 이만 나가볼게요. 성인식 축제 전 마지막으로 함께 할 식사자리이니 부디 잘 준비하시길.”
“응, 알았어. 고마워 에온”
그녀가 나가고 나는 그대로 화장대에 미끄러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게 사실이긴 한 모양이다. 처음 눈을 뜨자마자 나를 깨운 시녀를 보고 천연덕스럽게 귀족 아가씨를 연기했으니까. 솔직히 반 쯤 상황을 파악한 덕분이었다. 빙의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키워드 중 하나이니까. 현실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기절한 후 밀려온 이 몸, 그러니까 소미아 에이다르의 기억 속 상황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으니까. 이 세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악마들이다. 인간은 악마들을 귀족으로 섬기는 종족으로, 이 세계에서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었다.
그 중 에이다르 공작가는 황제 바로 아래에 단 네 개 뿐인 공작 가문 중 하나. 그리고 나는 그와 인간 여자가 만든 악마 혼혈이다. 그리고 혼혈의 대우는 당연히 좋지 않다.
물론 아버지인 공작은 이 사실을 모른다. 소미아의 모친은 자신이 악마인 척 그를 유혹해 하룻밤을 보냈고 나를 낳다가 죽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게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갓 태어난 나를 빌미로 그를 협박했다면 죽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었을 테니.
그렇다면 소미아는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내게 흘러들어온 기억에 따르면 소미아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정신이 깨어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혼혈이라는 걸 들키면 바로 버림받을 것이라는 걸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19년동안 숨겼다.
“무슨, 빙의를 해도 이런 사람, 아니 악마한테 빙의해…. 난 이런 책 읽은 적도 없다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모를까 이제와서 ‘저 사실 인간 혼혈이에요~’라고 말하면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게 뻔하다. 끝까지 순수 악마로 남기 위해서는 성인식 축제 전 권속을 만들어 참가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그게 문제야….”
권속. 다른 말로 서번트(servant).
그들은 주관이 없고, 주인의 말에 충성한다. 이성과 감정은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주인을 향해서만 기능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는 방법은 단 한가지.
“자! 오늘의 특가! 비행형 권속을 단돈 5천 블러드! 혹은 1500이상의 존재감으로 구매 가능합니다!”
홈쇼핑이다.
나는 고양이 머리를 한 쇼호스트가 보여주는 권속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한 미남이었는데 등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분명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안에 생기는 없었다. 당연하다. 지금 저건 텅 빈 시체에 불과하니까.
권속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모른다. 그걸 아는 건 오직 황제와 네 가문의 공작들 뿐이다. 다른 악마들은 황가에서 구식 텔레비전으로 내보내는 홈쇼핑으로 권속을 사는 소비자일 뿐이었다.
“나도 사야 하는데….”
나는 추욱 쳐진 어꺠로 소미아의 보석함을 열었다. 영혼이 담긴 피로 만든 결정인 블러드, 그리고 악마의 존재감이 올라감에 따라 상승하는 시계. 소미아의 블러드는 고작 150개 뿐이었고, 존재감은 0이었다. 이것으로는 인간형 권속은 커녕 곤충형 권속도 사기 힘들다.
“설령 살 수 있다고 해도 말도 안되지. 언니, 오빠들은 초월형 권속들을 가졌는데 하위 악마나 가질법한 곤충형 권속을 가진다는 건.”
소미아가 완전한 악마였다면 그 능력으로 괴수들을 사냥하거나 아카데미에서 활약해서 진작에 비용을 모았겠지만, 그녀는 혼혈이다. 이게 그녀의, 아니 이제 나의 최선이다.
“그 와중에 보석은 예쁘네. 소름끼치게.”
나는 10캐럿짜리 블러드를 들어 전등에 비추어보았다. 타인의 영혼이 담긴 피로 만들어진 블러드는 잘 가공되어 빛났다. 그때, 그만 블러드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아, 안돼!”
나는 데구르르 굴러가는 블러드를 따라 허리를 숙이고 달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책상에 머리를 부딪혔고, 뒤로 나자빠졌다.
“꺄악!”
-우당탕, 빠직!
“그럼 다음…지지직-. 상…품…. 지직-.”
블러드는 겨우 잡았지만, 내가 부딪히는 바람에 책상 위에 놓여있던 텔레비전 안테나가 부딪혔고, 방송에 노이즈가 걸렸다.
“아, 진짜. 환장하겠네!”
그 때, 채널이 흑백으로 바뀌며 서커스 음악과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리센입니다!”
그의 얼굴은 화면 밖으로 나와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는 토끼 가면을 쓴 남녀가 둠칫둠칫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었다. 참 색다른 홈쇼핑이라고 생각했다.
“블러드 얻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존재감을 떨치기는 불가능에 가까워질 정도인 요즘. 권속을 사기 너무 힘들다는 생각 안 하시나요?”
“당연히 하죠….”
나는 블러드를 꼭 쥔 채 중얼거렸다.
“그런 여러분을 위해 나온 상품. 바로 정액제 권속입니다!”
“정액제?”
“저희가 내어 드리는 권속들은 하나같이 초월형의 물건들입니다! 한 달에 100블러드! 단 100블러드로 한 달동안 권속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한 달에 100개?”
소미아는 19년 동안 150개 모았는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너무 비싸다고요? 하하, 제가 이 사실을 말씀 안 드렸군요. 정액제를 구매하시는 악마분들께는 무려 ‘계약서’를 드립니다.”
계약서?
2025.07.15 21:34
2025.07.1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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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5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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