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시작은 ‘여인도’ 그 그림이었다. ‘눈 떠보니 조선… 이게 과학적으로 말이 돼? 그것도 공주라니!’ 그저 평범하던 고3 은하의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하여 ‘조완율’ 조선의 완벽남이라 불리는 율(燏)과 믿을 건 얼굴뿐이라는 가난한 환쟁이 월령(月靈),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파란만장하고도 애절한 로맨스를 그려낼 우리의 여주인공 고은하! 아니, 조선의 공주 영아(朠啊)! 시공간을 초월한 청춘 멜로를 시작합니다.
#01
탁탁탁탁.
무척이나 다급한 발소리가 쓸쓸한 달빛 아래 스산하게 퍼진다.
타닥, 탁탁!
무섭도록 캄캄한 밤, 그저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을 사정없이 달리고 있는 두 개의 인형(人形)이 있다.
그들은 떨고 있었으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손을 꽉 잡고서 잔뜩 가슴 졸이며 빨리, 좀 더 빨리 발걸음을 재촉하는 남녀의 얼굴과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면서도, 기나긴 도피 길에 힘이 빠져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달리고 또 달린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허리 끝까지 닿게 늘어뜨린 머리와 치마를 나부끼며….
긴장감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사내와 여인은 아주 커다란 나무 아래 다다른다. 그 나무는 실로 웅장했으나 꽃송이 하나 없는 초라한 가지가 볼품없었는데, 두 사람이 도착함과 동시에 눈부신 만월(滿月)이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함께 나뭇가지 위로 부서져 내렸다.
나무 아래 선 남녀는 서로를 애절하게도 바라보았다.
밤하늘이 선물한 은빛 꽃잎이 그들에게 쏟아지니 절절함은 배가 되어 더욱이 아련한 공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다 사내가 곧 자신의 소매를 뒤적거렸다. 그가 소중히 꺼내어 내민 것은 옥가락지였다.
여인은 붉은 실로 엮여 있는 가락지를 보며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여인의 볼에 내린 슬픔을 흩어내며 그녀에게 연모의 증표를 손가락에 끼워주려던 찰나.
여인의 뒤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는 진한 암흑의 그림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추고 만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애석하게도 나무에 걸쳐 있던 찬란한 빛들마저 불어가 버린다.
기다란 여인의 머리칼도 날렸다. 머리카락이 한차례 흩어져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어느새 다가와 그를 덮친 그림자에 서서히 모습이 지워지고 있었다.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사라져가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물 줄기가 점차 굵어졌다. 설상가상 남자가 간절히 움켜쥐고 있던 가락지마저 그의 손아귀를 떠나고 만다.
낭랑한 소리를 내며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가락지처럼, 가락지를 묶고 있던 붉은 실이 돌부리에 걸려 끊어지면서 두 개로 나뉘어 영영 이별하게 된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영영…….
“허억!”
벌떡 상체를 들어 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한 번 넘기고 주위를 둘러보는 은하.
“하아, 하.”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급급하게 닦아내는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애가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자냐?”
“어…. 어?”
“수학이 너 깨우라길래 계속 흔들었는데도 꼼짝 않더라.”
“아, 수업 시간이었지 참….”
엎드려 곤히 자는 슬비의 머리를 빗기던 나라. 그녀가 형광 꼬리빗을 내려놓고 은하를 올려다 봤다.
“너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이번엔 그냥 넘어간다 하셨는데, 다음번엔 인정사정 안 봐 주신대.”
“그, 그래.”
“근데 너…… 왜 이렇게 땀을 흘려?”
나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와 은하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열은 안 나는데.”
“별거 아니야 그냥…… 꿈을 꿨거든.”
아직도 정신이 몽롱하다. 깊은 어둠으로 흩뿌려지던 남자가 마지막으로 여인에게 전하던 말이 생생하게 귓바퀴에 맴돈다.
‘다음 생에선 내가 먼저 당신을 알아보겠습니다. 꼭, 당신을 찾아내겠습니다.’
“무슨 꿈인데?”
“그러게, 무슨 꿈인데 이렇게 소름이 돋지?”
은하가 자신의 팔뚝을 비비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찜찜함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곱씹어 보았지만, 딱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심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싱겁기는. 우리도 이제 고3인데 공부 좀 하자, 맨날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잠만 자지 말고.”
“야, 그래서 나도 참고서 샀거든? 나름대로 공부해보려고 과목별로 샀다니까? 볼래?”
가방을 열어 전날 산 문제집들을 하나둘 꺼내 책상에 올렸다. 끝없이 나오는 다양한 두께의 책들을 보는 나라의 인상이 점점 찌그러져 갔다.
“너…. 너무 필요 이상으로 산 거 아니야?”
“그러게나 말이다. 너무 필요 이상으로 산 것 같은데? 미우나 고우나 우리 은하?”
나라의 말에 이어 시비조로 등장한 석호가 은하의 어깨에 턱 하니 팔을 올린다.
은하는 그런 그가 재수 없다는 듯 어깨 위에 건방지게 올려진 팔을 쳐냈다.
“어디 보자, 그래서 얼마나 공부했는데?”
석호가 은하의 책을 살피더니 수학 참고서부터 덥석 집어 휘리릭 넘겨보았다.
“수학은 한 문제도 안 푸셨고요. 국어…… 역시 백지네요? 영어는…… 이것 또한! 새 책이죠.”
이후로 남은 과목들도 훑으며 깨끗한 책의 상태를 꼬투리 잡아 비꼬는 석호를 아니꼽게 노려보았다.
“시비 걸러 온 거면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야.”
“에이, 왜이러실까아? 아무리 우리가 수험생이 되었다지만 은하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지. 설령 이렇게 기출문제집을 산더미처럼 사놨다고 해도 작심삼일, 딱 삼일 공부하고 말 우리 은하 아니겠어?”
“가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꿈자리 때문에 기분도 좋지 않은데, 때맞춰 등장한 녀석이 사람 속을 벅벅 긁기 시작한다.
“아니, 게다가 오늘 수업 시간에는 업어가도 모를 만큼 푹 주무시던데?”
또 석호는 은하의 걸상에 삐딱하니 걸터앉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픽픽 비웃음을 흘린다.
“그게 어디 수험생의 자세냐고…. 사람은 변하지 않아 그렇지? 은하의 20점짜리 시험 점수도 변하지 않……!”
“야!”
아슬아슬하게 한계치에 근접해있던 은하의 인내심이 결국 터져버렸다.
그녀가 아주 박력 있게 자리에서 일어난 덕분에 의자가 교실 바닥에 널브러지며 쾅!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분명히 그만하라고 했지? 어디 오늘 너 죽고 나 살고 한번 해볼까?”
“오오, 이러지 마. 에이…. 사람이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도 안 되는 거거든?”
“이리와 친구, 너희 오늘 나 말리지 마라. 오늘은 기필코 강석호 저 자식이 내 이름 ‘고은하’에 '고'자만 들어도 벌벌 떨게 만들어 줄라니까.”
나라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다리를 꼬고 앉아 혼자 고상한 사람처럼 비죽거렸다.
“은하야, 네가 좀 참아라. 석호 오늘 또 차였단다. 그때 그 후배 기억나지? 걔한테 결국 차였어. 석호 놈이 남자로 안 보인다나 뭐라나.”
“윤 준! 너 내가 쟤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지!”
“뭐 어때, 곧 학교바닥에 쫙 풀릴 얘기 가지고.”
“재수 없어…. 진짜 재수 없어. 아악!”
준의 말을 들은 은하와 나라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푸학!”
“크크큭….”
“야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워 하는 애한테 왜 들이대, 들이대기를.”
“어쩌냐, 석호 올해 들어서만 몇 번째야? 공도 아니고 찔러보는 곳마다 채이고 다니니……. 불쌍해.”
“그런 일이 있어서 심술부리는 거면 내가 또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줘야지 않겠어? 불쌍한 자식, 누나가 이번 한 번만 봐줄 테니까 기회 줄 때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2025.07.1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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