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만약, 자신의 허구가 현실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작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모든 걸 안다고 미소 지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안다고 절망해야 하는가. 삼류 웹소설 작가, '김제현'. 현실에서 외면받던 한 작가가, 자신이 9년간 써온 망한 웹소설 속 세계가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 이야기를 쓰던 자가, 이제 구원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하는 역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를 묻는 자기서사적 아포칼립스 판타지.
멸망한 세계에 구원을 바라지 마라. 네가 구원이 되기 전까지. 구원이 널 바라기 전까지.
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끝이 났다. 심지어 제목 또한 같았다.
[멸망한 세계에 구원을 바라지 마라]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다. 물론 인기는 없다. 1화 때 조회수도 280개로 꽤 나쁘지 않은 기록을 보여주었지만, 2화는 200, 3화 때 150으로 점점 줄어들고 50화 때부터 1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그 1도 1,000화 들어서자마자 사라졌다.
-1,440화 끝. 다음 주 마지막으로 오겠습니다.
나는 타자를 치면서 노트북 화면에 쓰여지고 있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1440. 거의 9년 정도의 내 인생을 바쳐 쓴 양이었다. 인기 수를 보면 헛수고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보니까 또 기분이 이상하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호리호리한 손바닥이 내 이마를 강하게 쳤다. 나는 맞은 부위를 매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도 좀 마른 체형이지만, 그런 나보다 더 마른 편의점 점주였다. 머리카락이 있어야 할 공간에는 푸른 핏줄이 선 채 나를 노려보았다.
“좀 일했다고 해서 편의점에서 노트북을 해? 알바도 엄연한 일이야, 일! 누가 일 하는데 잡일을 해!”
나는 진땀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인기 없는 웹소설 작가인지라, 이렇게 알바라도 뛰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 방도가 없었다. 점주는 그래도 분이 덜 풀렸는지 진열대에 있는 물품을 바닥에 엎어두었다.
“뭐 해? 빨리 원래대로 해!”
그 말과 동시에 점주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물품 컴플레인 들어오면 본인도 피해 있을 텐데.
나는 옅게 한숨을 뱉으며 물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흩뿌려진 간편식품들을 보며, 꼬르륵 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내 뱃소리를 인지했다. 이런 나도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진짜 성공만 하면 알바 바로 때려친다, 진짜.”
사실상 이 말도 오늘로 백 번은 될 것 같다. 직장인들이 로또만 당첨되면 퇴사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회사에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나는 앞의 무언가와 부딪힌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언가에 부딪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앞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
좋아. 나쁘지 않은 사과였다. 이 정도면 대충 투덜거리다 알아서 나가게 될 거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싱긋 들려오는 여성의 웃음소리였다.
비아냥이나 조롱이 아닌, 정말로 따스하게 웃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깔끔한 복장의 새하얀 여자였다. 나는 여자를 보며 밝은 말투로 말했다.
“주아 씨, 오랜만이에요.”
신주아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현 씨도요. 편의점 알바하시는 줄은 몰랐는데.”
“하하…요즘 투잡이 대세잖아요. 저도 트랜드에 맞춰 사는 거죠, 뭐.”
신주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트렌드 맞춰 살면 피곤해요. 그냥 사는 게 편하지.”
“동의합니다.”
그녀는 새햐안 손으로 물품을 집어 제자리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왜 이런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꿈뻑거렸다.
“뭐 해요? 안 할 거예요?”
내가 이래서 이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나와는 달리 세상에 필요한 사람같았다. 어쩌면 내 역할은 신주아같은 사람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가끔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따라 물품을 정리했다.
그래도 두 명이서 해서 그런지, 일은 빠르게 끝이 났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뭘요.”
신주아는 음료수 칸에 캔커피 두 개를 집어들었다. 처음에는 원 플러스 원도 아닌데 두 개를 집는 신주아를 보며 나는 의아했다. 신주아는 카드로 커피를 구매한 후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나는 잠시 커피캔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신주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기인지 아닌지, 정말 악의 하나 없는 순수하게 정을 베풀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안 받으실거에요? 저 슬슬 팔 아픈데.”
신주아가 커피캔을 약간 흔들어 보이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커피캔을 잡았다. 차갑게 맻힌 물방울이 손을 젖혔다.
“감사합니다.”
“뭘요. 앞으로 자주 좀 봐요.”
“노력해 볼게요.”
나는 뚜껑을 따 커피캔에 입을 댔다. 맛은 솔직히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인스턴트 커피답게 조금 밍밍하고, 달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남이 사준 거라 그런가. 나는 신주아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맛있네요.”
“그냥 팔백원 짜리 캔커피인데도요?”
가끔은, 팔백 원이 사람 하나를 위로하기에 충분한 값이 되기도 한다.
“네. 진짜로.”
신주아는 다시 웃어보이고 본인도 캔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홀짝 마시며 반짝이는 흑발을 귀 뒤로 넘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립스틱을 바른 붉은 입술과, 오똑한 코, 그리고 그걸 바쳐주는 주먹만한 얼굴. 신주아가 내 쪽을 힐끗 보자, 나는 흠칫 놀라 안 본 척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설마 보지는 않았겠지...?
캔커피를 홀짝거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주아 쪽을 보니, 장난스럽게 입꼬리가 휘어져있는 신주아가 보였다. 봤네, 봤어. 나는 캔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야, 그녀의 반대쪽 손에 명품 마크가 달린 가방 안에 서류 몇 개가 들어있는 걸 인지했다. 아마 회사 관련한 서류겠지. 신주아는 내 시선을 따라가니, 자신의 가방을 향한다는 것을 느꼈다.
2025.12.22 18:25
2025.12.22 18:24
2025.09.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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