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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지만 메이드입니다.
하늘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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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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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차 단역 배우인 나. 줄거리만 알고 있던 작품에 빙의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장 메이드를 해야만 한다. 젠장.

공모전 참여작#판타지#서양풍#빙의#착각물#치유물#얼굴천재

나는 8년 차 단역 배우다. 말이 좋아 배우지, 실상은 화면 구석 어딘가에 얼굴을 슬쩍 비추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이름 석 자보다 “저기 나왔던 사람”으로 더 많이 불린다. 그래도 아직은 포기하지 않은 무명 배우다.

 

연기에 재능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냥, 어중간한 외모 탓일까?

 

내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타입이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성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지하철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 같은 얼굴’.

게다가 나이 서른을 막 넘기고 나선 점점 ‘관리 소홀한 아저씨’에 가까워지고 있다.

거울을 보면 볼수록 ‘배 나온 신입 사원 역할’ 말고는 떠오르질 않는다. 아하.

내가 무명인 이유, 이제야 알겠다.

나의 연기는 무르익은 나의 외모를 따라와 주지 못하기 때문이군.

갑자기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디션에서 실직한 남성이 가사도우미로 위장 취업하는 내용의 연극에 조연으로 캐스팅됐다.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웃음을 책임지는 코믹한 역할에 약간의 감동까지 있는 꽤 괜찮은 배역이었다.

 

이 배역 하나로 무명 생활이 끝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첫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관객들의 반응은 “어우, 그 조연 진짜 웃기더라” 수준까진 아니고,

“음, 조연 괜찮았어.” 정도의 미지근한 호평이 올라왔다.

그런데, 그런 반응도 나 같은 단역 배우에게는 감지덕지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분명히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따가운 햇살에 눈을 떴다.

 

“8시 50분…?”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보고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멍청했다. 전날 술을 마신 탓에 알람도 못 듣고 그대로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입고 뛰쳐나왔다.

 

내가 사는 동네는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낡은 빌라촌이다.

계단은 가파르고 미끄럽기로 유명하다.

나는 가방을 든 채 계단을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라…?’

 

휘청—

 

콰당.

 

계단에서 발을 헛딛었다.

나는 그대로 계단을 몇 번을 구르고 나서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리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점점 앞이 흐려졌다.

 

“연극… 늦겠네…”

 

그 말이 내 마지막 대사였다.

그렇게, 간절히 바랐지만. 내 첫 번째 인생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 이번 배역으로 무명 배우 신세를 청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리고…….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며 눈꺼풀을 찔렀다.

 

“으으… 뭐야…”

 

나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늘 보이던 도시의 차갑고 높은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나무와 풀 내음이 가득한 숲속이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분명 계단에서 굴렀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 동네는 아니었다.

그러다 호수에 비치는 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흑색의 긴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마치 여자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내가 아니었다.

 

“이게 내 얼굴…?”

 

순간, 흠칫-

……다행히 급히 확인했더니 여자는 아니었다.

다만, 엄청난 미소녀 아니, 미소년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띠링 알림처럼 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황태자, 제왕의 왕관]

소설 속 황태자 발렌시아 이안으로 빙의했습니다.

스토리를 플레이하시겠습니까?

 

‘하…? 제왕의… 뭐?’

 

나는 이 소설을 기억한다.

이 소설은 너튜브 소설 리뷰 채널에서 본 적이 있었다. 최근 크리에이터로 전향한 배우 친구 놈 조회수나 올려줄 생각으로 동영상을 구독했었지. 어찌나 줄거리 요약을 잘해두었는지 마치 웹소설 한 권을 다 읽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그 웹소설 속 주인공 황태자 이안으로 빙의했다고?

 

…근데 잠깐, 스토리를 플레이하면 보상이 있는 건가?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AI 같기도 하고 AI보다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스토리를 끝까지 플레이하지 않으면, 너는 현생으로 돌아간다.

다만, 사지마비 상태로. 친구도, 가족도 없이 평생 침대에 누워 쓸쓸히 죽는다.』

 

…야, 뭐 이런 안내가 있어? 너무 디테일한 거 아닌가.

 

재수 없는 목소리는 또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끝까지 플레이하면 원하는 삶을 살 기회를 줄게.

이달의 “재수 없게 죽은 인간 상위 0.1%“에 뽑힌 기념이야. 감사해라.

선택은 해. 하지만 말 안 해도 네가 뭘 고를지는 안다.』

 

하,…이딴 걸 선택이라고 주냐?

현생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미친놈은 없다.

웹소설에 빙의할 줄 알았으면 너튜브 리뷰 영상만 볼 게 아니라 웹소설을 완독할 것 그랬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지.

아주 알차게 리뷰 영상을 만들어 준 친구 놈에게 일단 감사해야겠다.

그렇다. 현실은 지옥이고, 이곳은… 뭐, 지옥 2호점 정도겠지.

 

“좋아. 황태자 발렌시아 이안으로, 게임 시작하자.”

 

『그럴 줄 알았지~ 넌 언제나 선택지 없는 인생이니까.』

 

그리고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지, 사라지니까 또 좀 서운하네?

 

뭐, 다행이다. 이 재수 없는 음성이 이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들려왔을 상황을 상상하니, 정말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래, 비록 웹소설 리뷰 영상 하나였지만, 어느 정도 큰 줄거리는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이 소설, 클라인 가의 공작 클라인 루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한순간에 황가인 발렌시아를 무너뜨리고, 황태자인 이안은 가족을 모두 잃은 채 도망자 신세가 된다.

5년 후, 무능한 클라인 정권으로 인해 국민은 가난에 시달리고, 이안은 폐가에 숨어 지내다 클라인 루나를 만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클라인에 반하는 인물들이 하나둘 모이고,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황위를 되찾는다. 라는 전형적인 판타지 복수물이다.

 

꽤 멋진 주인공 역할 아닌가.

그런데… 이안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꽤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즉, 내가 이안으로서 무사히 황제가 되기 전까지만 살아남으면 되는 거다.

웹소설에서 이안은 결국 황제가 되니까, 당연히 나도 살아남아 황제가 되는 해피엔딩이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또 그 음성이 들렸다.

 

『웃기고 있네.

그건 소설이고, 여기는 현실이다.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고.』

 

하… 머릿속 그 음성, 아마 앞으로도 나를 비웃을 때마다 나타날 모양이다.

그리고, 현실 속 나는 지금 쫓기는 중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던 중,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상태 창》

 

‘뭐지? 이번엔 상태 창인가?’

 

『상태 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태 창은 타인의 속마음, 감정, 호감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오, 이번엔 꽤 친절한 누님 톤의 안내 음성이다.

머릿속에서 비웃기만 하던 그 재수 없는 놈보다는 백 배는 나았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보너스라고 하니까, 일단 눌러보자.

 

〚확인〛

확인 버튼을 누르자 상태 창은 사라졌다.

그때, 어딘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황태자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숲을 샅샅이 수색해라!”

“예!”

 

내가 빙의한 ‘이안 황태자’를 죽이려는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클라인 루스가 보였다.

 

《클라인 루스》

『상태: 짜증 남』

 

아, 보상이 이거구나, 캐릭터의 감정 상태를 알 수 있는 상태 창이라니 꽤 쓸모가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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