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역대 최강이라 불린 여자 베아트리스는 무병장수한 후 눈을 감는다. 좋은 일 많이 했으니 천국 갔겠구나, 하며 눈을 떴는데 웬걸? 백작가의 망나니 며느리가 되어 버렸다. 파티는 뒤집어엎기 일쑤요, 심심하면 사용인들을 쥐어박고, 도박 빚까지 졌다. 새로운 몸의 본래 주인, 빅토리아는 그야말로 상종 못 할 쓰레기! 이러니 부부관계가 좋을 수 없다. 남편인 데오도르는 그녀를 벌레 보듯 하는데. 평생 칭송만 받아 본 그녀가 이 치욕을 견디며 살 수는 없다. 빅토리아는 자기 자신과 이런 자신을 매번 용서하고 품어주는 시부모님을 위해서 달라지기로 결심한다. 이번 생의 목표는 갱생이다! *** 뜻하지 않은 위기에 봉착했다. 결혼 5년 차인 빅토리아가 아직도 초야를 치르지 못한 것! 이번에도 관계를 거부하면 혼인이 무효가 되게 생겼다. 빚을 갚기도 전인데 허무하게 쫓겨날 수는 없다. 빅토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한다. ‘그깟 것 눈 한 번 딱 감고 끝내지, 뭐.’ 그런데… 그깟 것이라 치부하기엔, 느낌이 너무 이상했다. “흐… 앗, 자, 잠깐만요, 소, 소백작님. 몸이… 으응…!” “어지간히도 애가 타셨나 봅니다. 이리 직접 움직이시고.” 그런데 잠깐. 저게 뭘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헐떡이게 했던 열기가 삭 가셨다. 땀이 식으며 조금 추워진 것도 같았다. 빅토리아는 저도 모르게 침대를 발로 밀었다. ‘미친. 흉기잖아.’ 왜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저놈을 거부했는지 알 것도 같달까. 저런 걸 몸에 넣었다간 죽는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참 열심히 살았지.’
남들은 죽기 전에 후회한다는데, 베아트리스가 떠올린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힘 빠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그간 저의 곁을 지켰던 충직한 심복들이 보였다.
황실의 제1 검이 되어 준 기사단장, 알리스타. 돈 계산에는 영 잼병인 그녀를 대신해 제국의 예산을 책임져 준 재정부 장관, 성격 더러운 그녀 비위 맞추느라 고생한 시종장과 시녀들….
그리고 차기 황제가 될 동생 루퍼트까지.
“이놈들아. 왜 다들 죽상이냐. 이룬 게 많으니 난 분명 천국에 갈 거다. 그곳에서 먼저 기다릴 테니… 너희도 천천히 오라고.”
슬퍼할 것 없는 죽음이다. 그녀의 나이가 여든에 가까웠으니. 제국 평균 수명보다 열 살은 더 살았다. 병도 없었으니 이 정도면 호사다. 손뼉 쳐야 할 지경이라고.
‘그리고 내가 빨리 죽어야 저 불쌍한 동생 놈도 황좌에 앉지.’
본래라면 그녀 대신 황좌에 앉았어야 할 놈이다. 그녀가 너어어무 뛰어나 동생을 가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뭐, 그때는 루퍼트가 너무 어리기도 했고.’
부모님도 참 대단하시지. 그 늙은 나이에 어떻게든 황자를 낳겠답시고 그리 용을 써 결국 성공했으니.
그녀와 남동생의 나이 차가 무려 스물이었다. 막둥이도 이런 막둥이가 따로 없었다. 사실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다 해도 황제는 그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녀는 강했다. 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강했다. 너무나 대단해서 그녀의 재위 이후로 크고 작은 반란이 자취를 감췄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산적조차 없었다. ‘죄 없는 백성이 어디서 어떻게 털렸다더라.’ 하는 소문만 들려와도 그녀가 기사단을 이끌고 쳐들어갔기 때문이다.
과장이 아니라 그녀가 검을 휘두르면 산이 쪼개지고 바다가 갈라졌다. 소드마스터라는 게 이렇게나 멋졌다. 그에 비해 동생은….
‘말을 말자. 생각하면 뒷골만 당기지.’
그래도 유능한 심복들을 남겨두고 가니 통치에 어려움은 없을 거다. 아, 이제 머리가 몽롱해진다. 정말로 죽을 때가 되었나 보다.
“그럼 난 이만….”
마지막 인사치고 참 형편없다. 하지만 진짜로 할 말이 없는 걸 어떡해. 최근 몸 상태가 영 메롱이었던 터라 죽을 준비는 진작 다 해놨단 말이다.
유언장도 완벽하게 써 놔서 더 남길 말이 없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어찌 저희를 두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역대 최강이라 불린 여제, 베아트리스는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랬어야 하는데.
“…가야!”
씨. 목이 잘린 닭도 몇 분은 뛰어다닌다더니,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아직 감각이 살아 있나 보다.
이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말이다.
다만 그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방금 눈꺼풀 움찔하는 거 다 봤다. 눈 좀 떠 보거라, 아가야!”
어떤 미친놈이 여제를 아가라 불러?
‘죽었으니 마음대로 부르겠다, 이거냐? 이놈들을 그냥, 콱.’
안 되겠다. 죽더라도 저놈 머리는 깨고 죽어야지. 그리 생각하며 베아트리스는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아가! 드디어…! 그래, 이래야 우리 아가지! 이러다 영영 눈을 뜨지 않을까 우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품으로 누군가 와락 뛰어들었다.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베아트리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보이는 풍경이 낯설었다.
몰려있는 하녀들. 뭐, 그녀가 가는 곳에 시종이 따르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거야 그렇다 쳐도, 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이 하나같이 허름했다.
단정하기는 한데 좀 오래됐다고 해야 하나. 꼭 어디 변방의 못사는 귀족가에 취업하기라도 한 것처럼.
“차라리 영영 눈을 뜨지 못하는 게 우리 가문에는 좋았을 겁니다.”
그때 문가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아트리스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얘는 참,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네 부인이다. 그런 말을 하고도 부끄럽지 않으냐!”
베아트리스 역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순간, 남자를 확인한 베아트리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황궁에 저리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고?’
그렇다면 제가 눈여겨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남자는 무채색으로 무장한 채였다. 몸에 존재하는 색이라곤 검은색과 흰색밖에 없다. 머리카락과 눈이 새까만 탓인지 하얀 피부가 더 돋보였다.
자신보다도 더 뽀얀 주제에, 근육이 상당했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검을 잡는 몸이다. 오늘도 훈련을 빼놓지 않았는지 근육이 잔뜩 성나 있었다.
문제는 남자의 표정이었다. 그는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경하다. 저 잘난 외모로도 용서되지 않을 만큼.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녀가 막 호통치려던 순간, 남자가 뒤돌았다.
2025.08.2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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