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사랑의 끝은 이혼이었다. 팔론가의 막내딸, 르노엘라. 해적의 불길이 휩쓴 남부에서 그녀는 작은 손길로 무너진 마을을 다시 일으킨다. 하지만― 끝없는 조롱과 시기, 질투가 뒤따랐다. 그 순간, 조용히 곁을 지켜온 사내가 있었다. 당신만 바라봤습니다. 버림받은 이혼녀와, 그녀를 붙잡은 제독. ----------------------- jiolli@daum.net
1화. 제발 이혼해줘
금빛으로 채색된 벽화가 천장 너머에서 쏟아졌다.
수천 개의 크리스털을 품은 샹들리에는 물결처럼 흔들렸고,
떨리는 음악의 울림이 공기마저 반짝이게 했다.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사내는 오늘 승전 무도회의 주인공, 레온하르트 벨모어였다.
제국 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벨모어 가문은 4년 전, 이카테 왕국의 침략으로 전쟁의 첫 불씨가 됐다. 당시 변경백이던 레온하르트의 부친은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잃었다. 북부의 땅은 금세 적의 손아귀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레온하르트가 전세를 뒤집었다.
황태자가 시찰 중 납치되었을 때, 스스로 첩자를 자처해 적의 심장부로 잠입하여 황태자를 무사히 구출했다. 그 경험을 발판으로 적국 내부의 균열을 집요하게 키웠고, 결국 이카테 왕국은 쿠데타로 왕이 교체되며 항복했다, 전쟁은 종결되었고, 제국은 막대한 배상금까지 받아냈다.
그 모든 승전의 중심에 있던 이름이 지금 황제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이제, 북부의 전쟁을 끝낸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르겠다. 레온하르트 벨모어, 그대의 가문은 제국의 검이자 방패. 공작의 지위를 내리노라.”
우레 같은 박수와 함께 꽃잎이 흩날렸다. 황궁의 무도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썩해졌다. 다리가 불편한 부친을 대신해 아들이 황제의 잔을 받는 순간, 레온하르트는 ‘벨모어 소공작’이 되었다.
“벨모어 소공작님, 제 아들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소공작님 덕분에 북부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밀려드는 인사에 레온하르트는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응대했다. 정중한 그의 미소 뒤에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절제와 거리감을 마음 깊숙이 동경했다.
칠흑 같은 머리칼, 살짝 그을린 피부. 매서운 눈매 속 황금빛 동공. 굳게 다문 입술이 강인한 윤곽을 만들었고, 단단한 어깨와 한 뼘 더 큰 체구가 그를 한층 도드라지게 했다.
그때 에드리안 팔론이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벨모어 소공작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제국 최대의 무역 상단을 거느린 팔론 공작가는 배상금 협상장에서 그와 스친 인연이 있었다. 에드리안은 곁에 선 이들을 소개했다.
“제 부인, 그리고… 제 누이입니다.”
“세레나 팔론 입니다. 소공작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감사합니다, 부인.”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그 뒤의 여인에게 닿았다. 굵게 흐르는 밤갈색 곱슬이 어깨를 넘었고, 장식은 최소로 억눌러 하얀 얼굴과 선명한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했다. 바다처럼 짙은 파란 눈동자가 내려가며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고요히 들어 올려 인사했다. 손끝마저 질서정연했다.
“르노엘라 팔론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일로 자작부인이 아니라, 팔론.
달라진 호칭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혼했다더니 사실이었군.’
레온하르트는 시종에게서 샴페인 잔을 받아 먼저 세레나에게 건넸다. 매끈한 동작에는 흠잡을 데가 없어, 세레나는 나직이 감사를 올리며 긴장을 감췄다. 뒤이어 내민 잔이 르노엘라의 손에 닿을 때, 시선이 아주 짧게 엉켰다. 그 찰나에 집요한 빛이 스쳤고, 르노엘라는 실례인 줄도 모르고 그 눈을 내려 피했다.
툭, 레온하르트가 말을 던졌다.
“헤데온 상단에서 보내주신 약재들, 크게 썼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르노엘라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이 그 움직임에 고정됐다.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예상보다 담담한 목소리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아주 옅게 숙였다.
“은혜를 갚고 싶군요.”
“...헤데온 상단은 이제 하일로 가문의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관계가 없답니다.”
“로나.”
에드리안이 낮게 불렀다. 그러나 르노엘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은혜는 하일로 가문에 갚으시는 게 맞겠습니다.”
고집스레 다물려진 입술, 살짝 좁아진 미간.
짧은 침묵이 지나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얕게 올랐다.
“팔론 양. 곤란하게 하려던 뜻은 아니었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에드리안이 시치미를 떼듯 숨을 들이켰다.
“소공작님,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세레나가 눈치 빠르게 르노엘라를 이끌고 자리를 비켰고, 에드리안이 뒤이어 덧붙였다.
“본래 밝고 상냥한 누이입니다. 최근 힘든 일이 겹쳐 오늘 같은 자리가 불편했나 봅니다. 누이 대신 사과드립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레온하르트가 잔을 들며 말했다. 잔의 곡선 위로 서늘한 황금빛 눈이 미세하게 웃었다. 너무 완벽한 미소여서, 에드리안은 잠깐 말문을 잃고 어색한 헛기침으로 그 자리를 떴다.
그들이 물러나자 낮은 잡음이 물결처럼 되돌아왔다. 어딘가에서 던져진 말 한 토막이 레온하르트의 귓속에 닿았다.
“하일로 자작부–아니,팔론 양은 올 줄 몰랐는데.”
“헤데온 상단의 주인 말이오?”
2025.09.0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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