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헤어져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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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그마보이
1화무료 1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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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버스 #미남공 #미인수 #연상공 #연하수 #로코 공(차이경) : 187cm, 이 시대의 차도남, 이지만, 노빠꾸 직진공 수(이우연) : 172cm, 이 시대의 미인수, 이지만 조빱수 "고객을 가, 족같이. 어서오세요, 모두의 우연 입니다." 애인 대행, 불륜 상대, 모두 대신 해주는 '모두의 우연' 대표 '이우연' 천애고아인 우연에게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우연은 절대 지지 않지. 우연의 단 하나의 목표는, 돈을 모아서 뉴질랜드로 떠나는 것! 그곳에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 "이우연씨가, 내 애인이 되어줘야 겠어요." 그런 우연의 앞에 등장한 한 남자. 그 남자 때문에 우연의 앞 날은 180도 뒤집히고 마는데...

#BL#현대#동거#오메가버스#로코물#달달물#개그물#계약관계#얼굴천재#사업가/경영인#능글공#미남공#재벌공#집착공#미인수

“하아...하...제발…”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골목 안을 가득 메웠다. 폐부까지 들어차는 공기에 숨 쉬기조차 버거웠지만 우연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잠시라도 발걸음을 멈췄다간 뻗어 나온 검은 손에 금세 어둠으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우연이 가쁜 숨을 내쉬며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을 뒤쫓는 검은 양복 무리가 보였다. 누군가 도와줄 이를 찾아 급한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짙은 어둠이 내려 깔린 고요한 골목 안은 부유하는 먼지 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우연씨!!”

“오지마!!!”

“멈추세요!!”

자신을 뒤쫓던 검은 양복 무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목숨을 위협 받고 있는데 당신 같으면 멈추겠냐고. 이미 지친 다리는 이제 감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자신이 꿈 꿔왔던 삶이 이뤄지는 날이 코 앞에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는 없었다. 우연은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분명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러한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은 맡은 일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인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데. 물론 눈에 띄게 선행을 해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이렇다 할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아닌가,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일이 어쩌면 악행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흐른 건지. 우연의 눈앞에 그동안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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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을 가,족 같이. 어서오세요, 모두의 우연입니다."

쌍 욕은 기본, 물세례부터 따귀까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우연은 대신 헤어져 주는 '모두의 우연' 대표였다. 애인 대행, 불륜 대행 등 다양한 역할을 자처했으나, 하는 일은 간단했다. 주로 의뢰인의 상대방에게 이별을 선물하는 것.

‘나쁜 새끼....흑…어떻게….사랑이 변하니?’

‘이 좆 같은 새끼들아. 쓰레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봐 어디한번.’

여러가지 방법 중 가장 확실하게 헤어질 수 있는 방법은 단연코 상대의 외도, 바람이었다. 우연은 대부분 의뢰인의 바람난 상대가 되었는데,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통보 당한 연인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울거나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가하거나. 우연의 입장에서는 전자보다 차라리 후자가 마음이 편했다. 이런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양심 없는 행동이긴 했으나, 면전에 대놓고 상대방의 상처 받은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우연의 입장에서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우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없는 양심에 털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돈 없고 백 없는, 심지어 가방 끈도 짧은 자신 같은 남성 오메가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양심 좀 없으면 어떠밥심으로 버티면 되는 것을.

“그 쪽이 이우연?”

“네, 고객님. 이 쪽으로 앉으시죠.”

서울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4층짜리 건물의 4층에 위치한 10평 남짓의 사무실. 지어진 지 20년도 더 된 허름한 건물에 엘리베이터 따위는 없었다. 척 보기에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자랐을 것 같은 도련님은 4층 건물을 오르느라 이미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하얀 얼굴에 곱슬거리는 금발이 인상적인 남자는 우연의 안내에도 움직임 없이 입구에 그대로 굳어 선 채였다. 삐딱하게 기운 남자의 고개 위로 남자의 귀에 걸린 은색 귀걸이가 반짝였다. 남자가 느린 시선으로 우연을 훑었다.

"...되려나."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진짜 이런 곳에서 장사가 돼요?"

"아유, 고객님. 장사는 사무실이 아니라 제 몸으로 하는 건데요, 뭐."

"...흐음.."

못마땅한 표정의 남자는 그제서야 사무실 안으로 한 발자국 걸어 들어왔다. 허름하게 빛이 바랜 흰색 벽지나 가장자리가 닳은 가죽 소파 등을 훑는 눈은 불쾌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고객님.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남자의 못 마땅한 시선에도 우연은 아무렇지 않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던데 서비스업 5년차인 우연은 이미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겪을 만큼 겪었기에 새로운 의뢰인의 까칠함 따위야 타격감이 일도 없었다. 얼굴도 갖추고 재력도 갖추느라 인성은 갖추지 못한 것 같았지만 뭐 어때, 눈 앞의 하얀 남자는 우연의 밥 줄이었다. 그것도 아주 비싼.

“차는 됐고.”

끝내 소파에 앉을 생각이 없는 것인지 남자는 자리에 선 채로 자신의 가죽 자켓 안 주머니를 뒤적여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말한 것처럼 내가 정한 장소에 가서 이 남자한테 제 애인인 척 해주면 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객님.”

남자가 우연에게 사진을 건넸다. 사진을 건네어 받은 우연의 눈이 사진 속의 남자에게 향했다. 깔끔하게 올라간 검은 머리, 그 밑으로 짙은 눈썹과 단단한 이목구비까지. 연예인 인가. 절대 흔한 얼굴이 아님에도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우연은 사진 속의 남자를 보며 이런 남자도 차일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가졌다. 하긴 자신이 지금까지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을 때 외모와 헤어짐의 문제는 좀 다른 영역인 것 같기는 했다.

"...이래도 질투 안하나 보자고, 차이경."

남자가 중얼거리는 말이 우연의 귓가에 들어왔다. 엥? 이게 다 질투 작전이라고?

'질투가 아니라 정 떨어질 것 같은데.'

우연이 남자 몰래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아니다.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어떠한 이유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됐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사업을 자처하는 우연 자신이 제일 비정상적일지도.

"...."

우연이 손에 든 사진을 다시 물끄러미 내려봤다. 자신의 연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잘생긴 눈썹이 구겨진 채 어떤 말을 내뱉을 까. 우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일단 선금은 이 정도. 일 잘 마무리되면 나머지 반 입금하는 걸로, 어때요?”

“고객님.”

우연의 상념을 깬 것은 눈 앞의 남자였다. 남자는 우연에게 수표 몇 장을 건넸다. 수표 위에 적힌 0의 개수를 빠른 눈으로 훑은 우연이 곤란하다는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

“왜요, 적어요?”

남자의 물음에 우연이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객을 가족같이. 책임지고 확실하게 헤어져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건넨 금액은 예상보다 큰 금액이었다. 덕분에 우연은 이 의뢰를 마지막으로 그토록 꿈 꿔왔던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생겼다. 지난 10년 동안 꿈꿔왔던 뉴질랜드 에서의 평화로운 삶. 언젠가 오래된 영화에서 보았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 같은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남은 일생을 보내는 것이 우연의 꿈이었다. 그 곳에서라면 왠지 그동안의 구질구질했던 과거를 모두 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의도적으로 만든 타인의 상처받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

우연이 택시에서 내리며 문자에 적힌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JR호텔 VIP 라운지 30층. 눈 앞에 고급스러운 고층 건물이 보였다. 호텔 안으로 들어서는 차는 거의 대부분 고급스러운 세단 혹은 화려한 외제차였다. 그들이 사는 세계에 관심이 없는 우연조차도 익히 들어봤을 법한 JR호텔은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대기업인 JR에서 운영하는 호텔 계열사였다. 하룻밤 숙박료가 기본으로 몇 백 단위라는 일명 부자들을 위한 호텔. 이 곳의 VIP 라운지는 호텔 이용객 들 중에서도 극 소수만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우연의 마지막 의뢰인은 무늬만 흉내내는 어중이가 아니라 진짜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그래. 살면서 또 언제 이런데 와 보겠어.”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물 세례를 맞게 될지, 따귀를 맞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우연이었지만 우연의 마음은 이미 바다 건너 뉴질랜드에 도착해 있었다. 우연은 묘하게 들뜬 마음으로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예약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로비로 들어서자 높은 천장과 함께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에 띄었다. 잠시 주변을 구경하던 우연은 프론트로 걸어가 의뢰인이 알려준 이름을 말했다.

“주요한이요."

“아, 고객님. 잠시만요.”

이름을 대자 프론트에 앉아있던 여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조심스러운 말투로 건너편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직원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우연을 향해 말했다.

“고객님 저희 직원이 안내 드릴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호텔 로비 쪽에서 단정한 감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걸어와 우연을 안내했다. 일반 이용객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복도 안 쪽으로 향한 직원이 30층에 멈춰 서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 위로 카드키를 가져다 댔다. 엘리베이터는 매끄럽고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타시죠.”

엘리베이터가 고층으로 향하며 창 밖으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넓은 호수와 푸른 잔디가 펼쳐졌다. 호수 한 가운데 세워진 분수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우연이 잠시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전경이었다. 감상도 잠시 엘리베이터는 금세 최고층에 도착했다. 도착음과 함께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또 한번 직원을 따라 복도를 걸어가자 로비보다 몇 배는 화려한 라운지의 모습이 보였다. 전면이 통 창으로 되어 있는 라운지에는 은은한 조명이 깔려 있었고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넓은 공간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곧게 뻗은 손가락이 와인잔의 끝을 가볍게 쥐었다. 다음 순간 남자의 모양 좋은 입술을 타고 붉은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그 동작들이 마치 느린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갔다. 그 남자였다, 오늘 자신이 헤어짐을 통보해야 할 의뢰인의 연인.

“이사님은 저 쪽에 계십니다.”

우연과 함께 라운지의 입구로 들어선 직원이 우연의 시선이 향해 있던 곳을 가리켰다. 우연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직원이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뒤 돌아섰다. 직원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연은 제 자리에 굳어 선 채 움직일 수 없었다. 호기롭게 호텔로 들어섰던 것과 달리 막상 남자의 모습을 실제로 마주하자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이제껏 제가 상대해왔던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 라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태생적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우성 알파. 우연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돈 많이 준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네. 이거 왠지 따귀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설마 재벌이 모양 빠지게 사람 때리고 그러겠어. 우연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애써 지워내며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장밋빛 인생을 상상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다. 주먹이든 뭐든,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한 대 얻어맞고 끝내자.”

우연이 다짐하듯 남자를 향해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와인을 머금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우연에게 향했다. 남자와 눈을 마주하자 우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 쫄면 지는 건데. 남자의 기에 이미 압도 당했으나 우연은 그것을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검은 눈으로 우연을 응시했다.

“나는 분명 요한이랑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

“다른 분이 오셨네.”

남자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서늘함을 담은 남자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우연이 마른 침을 삼켰다.

“차이경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만, 용건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자가 앉으라는 듯이 맞은 편 의자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은 우연이 잠시 뜸을 들이자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이 툭, 툭 느린 박자로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우연의 대답을 재촉하듯.

“요한씨는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아마 앞으로 쭉.”

“어째서?”

“그야.”

“…..”

“요한씨는 저,하고 교제 중이고, 차이경 씨와는 헤어짐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연의 말에 테이블을 두드리던 남자의 손가락이 뚝 굳었다. 우연의 시선이 멈춰 있는 남자의 손가락에서 다시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칠흑 같은 남자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멈춰 있던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뭔가를 깨달은 듯, 한 박자 느리게.

“아.”

“…..”

“그러니까.”

남자의 한 쪽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피식. 바람 빠진 소리가 남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요한이가 바람이 났는데, 그 내연남이 바로 눈 앞에 계시는 그 쪽이고. 나는 지금 애인의 외도 사실과 이별 통보를 타인을 통해서 듣고 있는 입장이고.”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움직였다.

“내가 이해한 게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직관적인 남자의 말에 우연이 긍정의 답을 내보였다. 이제 어떠한 반응이 나오겠지. 테이블을 응시하던 우연이 흘긋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남자가 매고 있던 넥타이의 끝을 느슨하게 풀었다. 잠깐 마주했으나 저 남자의 입을 타고 쌍 욕이 튀어나올 것 같진 않고, 그럼 역시 맞는 쪽 일까. 저 단단한 손에 맞으면 꽤나, 아니 아주 많이 아플 것 같았다. 남자의 손이 테이블 쪽으로 뻗어졌다. 맞는다. 우연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분명 통증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머리 위에서 남자의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네?”

우연이 남자를 바라보며 멍청하게 대답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한 손에 재킷을 손에 든 채 우연에게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상반되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 쪽 말, 잘 알아들었다고.”

“…그게 끝..?"

남자가 다시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럼, 여기에서 치정 싸움이라도 해야 합니까?”

"...아, 안 때리세요?"

우연의 말에 남자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혹시 그런 쪽이 취향이신가."

“...아니, 그게 아니라.”

“죄송하지만, 제가 그런 쪽에는 취미가 없어서.”

“아니 지금 오해를, 잠깐, 저기.”

우연의 당황한 표정에도 남자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 요리 괜찮으니까 식사하고 가요.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가 뒤 돌아섰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이렇게 끝이라고?”

이런 상황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연인의 외도 상대에게 웃어주는 것도 모자라, 식사 대접까지. 남자는 단정한 걸음으로 라운지를 벗어났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연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지금 이 상황에 밥은 무슨.

“실례합니다. 오늘의 요리는 사이드로 매쉬드포테이토를 곁들인 구운 바닷가재 요리입니다.”

우연은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밥 남기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

마지막 의뢰는 그렇게 전에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지금 이렇게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쫓기고 있는 거지. 이제 진짜 뉴질랜드로 떠나는 일만 남았었는데. 우연은 지나간 일들을 상기하며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마지막으로 웃어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 진짜, 그만 좀, 헉, 그만 좀 따라와라.”

마지막 의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남자가 대접한 근사한 요리와 함께 라운지 밖으로 지는 석양의 아름다움까지 느긋하게 감상하며 돌아오던 길이었다. 허름한 사무실 건물 앞에 이 동네와 너무나도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고급 세단 몇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검은 세단을 본 우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우연이 손에 들고 있던 막대사탕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그대로 깨졌다. 우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우연 씨!!!!”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 지도 모르겠다. 가로등 불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골목이 오늘 따라 원망스러웠다. 땀에 젖은 앞머리는 눈 앞을 자꾸만 찔러왔다. 하지만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끈적한 감각에도 우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바람 좀 폈다고 사람을 죽인다고. 아니, 그전에 분명히 남자가 알겠다고 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죽기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라며 신신 당부했던 부모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제발, 좀.”

다급하게 뛰던 우연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하, 씨발.”

막다른 골목이었다.

“이우연 씨!!!”

우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우연을 따라 뛰던 남자들도 멈춰선 우연을 발견하고 속도를 늦추며 다가왔다. 한 발자국, 둘 발자국 어느덧 양복 무리의 남자들과 한 뼘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우연이 가만히 멈춰 선 채 느린 동작으로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저기요.”

마른 한숨을 내쉰 우연의 눈동자가 가라 앉았다. 우연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그 자리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닥을 응시하던 우연이 고개를 들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살려주세요, 선생님.”

 

.

 

살려 달라며 무릎 꿇은 우연의 앞을 검은 양복 무리가 둘러쌌다. 그 사이를 비집고 무리에서 가장 키와 덩치가 큰 남자가 우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우연과 마찬가지로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우연 씨, 왜 도망가시는 겁니까.”

남자가 미간을 살짝 구기자 왼쪽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꿈틀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우연은 무릎을 고쳐 앉으며 더욱 불쌍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빌었다. 자존심 따위야 어찌 되었든, 당장 살고 봐야 미래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선생님. 제 말 한번만 들어주세요.”

“아니, 이우연 씨.”

“제가 십년 전부터 지금까지 정말 힘들게 살았거든요. 이제 겨우 좀 사람 답게 살아보려고 하는데.”

남자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남자가 우연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물, 물론 제가 잘못 한 게 없다는 건 아니고요. 근데 그렇다고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뭐가 되었든 목숨만 살려주세요.”

우연이 횡설수설 내뱉는 말에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연을 바라봤다.

“제가 이우연 씨를 왜 죽입니까.”

“…네?”

안된다면 눈물 코스프레라도 하려고 한참 감정을 잡고 있던 우연이 느린 박자로 반문했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고?

“그럼 왜 쫓아오셨어요?”

“…이우연 씨가 갑자기 뛰셨지 않습니까.”

“진짜 안 죽여요?”

“네.”

“…때리지도 않고?”

남자가 이상한 표정으로 우연을 내려봤다. 저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입니다. 폭력은 지양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그럼에도 우연의 눈동자에는 남자에 대한 불신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작은 한숨을 내쉰 남자가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우연에게 건넸다.

‘JR케미컬 비서실장 권재혁’

비서가 아니라 당연히 어둠의 세계에 종사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JR케미컬이면 JR그룹 내에서도 주가 1,2위를 다투는 계열사였다. 우연이 금색 테가 둘러진 고급스러운 명함을 말없이 내려 봤다. 아니 잠깐 그럼.

“….차이경 씨가 보낸 거 아니예요?”

“맞습니다. 가시죠,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자의 말에 우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까 남자의 말을 토대로 상황을 종합해보자면, 남자는 JR케미컬의 비서실장이고 그런 남자가 이사라고 부를 사람은 당연히 JR케미컬의 이사일 것이다. 그 이사가 차이경이라고 했고 그럼 차이경이 JR케미컬의 이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차이경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각종 매체에서 종종 언급되었던 JR그룹의 외동아들.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한 번은 차이경의 이름과 얼굴을 본 적이 있을 테니까.

“….좆됐네.”

우연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과 엮인 것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비서실장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죽이지도, 때리지도 않는다고 했으나 어쩌면 차이경의 손에 직접 죽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피어났다. 남자가 왜 도망을 가냐 물었지만, 이건 두 말 할 것도 없이 무조건 미친듯이 달아나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아, 지금이라도 다시 도망칠까.

*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우연은 몇 번이나 도망갈 기회를 엿봤으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양복 무리 덕분에 우연의 야심한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상대는 다섯 명. 지금 자신이 이 사람들과 다대일로 싸워서 이길 확률은 그냥,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이 비폭력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권재혁이라는 비서실장이 제일 무서웠다.

분명 자신이 꽤 멀리 도망 쳤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가는 길은 우연에게 너무나 짧게만 느껴졌다. 눈 앞에 허름한 4층짜리 건물이 보였고 건물의 4층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문득 내려다본 길바닥에 자신이 떨어트렸던 막대사탕이 그대로 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우연이 제일 좋아하는 라임맛이었다.

“저, 실장님. 혹시 다음 기회에 이사님과 만나면 안될까요?”

“네, 안됩니다.”

우연이 건물의 앞에서 멈춰서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을 하며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재혁을 올려봤다. 그런 우연에 재혁이 짧고 굵게 거절하며 우연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우연이 우울한 표정으로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 열 개단 스무 계단. 고개를 들었을 때 ‘모두의 우연’이라는 하얀색 간이식 팻말이 보였다. 회색으로 칠해진 문은 군데군데 시멘트 칠이 벗겨져 있었다. 자신과 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해온 아늑한 사무실이었다. 문을 열면 낡은 건물 특유의 냄새와 함께 빛 바랜 풍경들이 자신을 맞이하겠지만, 익숙한 풍경 속에 더해진 낯선 타인의 존재만으로 자신의 소중한 공간은 순식간에 불편한 장소로 변해 버렸다. 망설이는 우연의 손끝을 대신해 곁에 서 있던 재혁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끽 하는 녹슨 쇳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이사님, 이우연 씨 모셔왔습니다.”

재혁이 옆으로 비켜서자 낡은 사무실의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혁의 말에 손에 쥐고 있던 서류에 머물러 있던 이경의 시선이 우연에게 옮겨갔다. 하루 만에 다시 재회한 얼굴이었다. 이경은 고급스러운 네이비 색 수트를 걸친 채 마지막 의뢰인이 끝내 앉기를 거부했던 닳은 소파위에 앉아 있었다. 이경의 검은 눈이 어제와 같이 우연을 훑어 내렸다.

“수고했어요, 이우연 씨와 단둘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네. 이사님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재혁이 이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도 재혁을 따라 뒤 돌아섰다. 우연이 반사적으로 돌아서는 재혁의 재킷 끝자락을 붙잡았다.

“실장님 여기 계시면 안 될까요.”

“네, 안됩니다.”

재혁이 가장 무섭다는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분명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차이경을 보고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경은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존재한 포식자였다. 이 좁은 공간에 이경과 단 둘이라니. 차라리 재혁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경의 정체를 알고 나자 우연의 온 신경이 이경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비상이다, 비상. 이경의 시선이 재혁의 재킷을 잡고 있는 우연의 손 끝으로 향했다. 단정한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우연의 간절한 눈빛에도 재혁은 망설임 없이 구둣발을 움직였다. 쾅. 열려 있던 사무실의 문이 닫히고 백열등보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 이경과 우연, 단 둘 뿐 이었다.

“다시 보니 반갑네요, 이우연씨.”

이경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경과 자신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연은 이경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리 와요.”

이경이 턱 짓으로 자신의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잠시 미동이 없던 우연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경을 향해 다가갔다. 직사각형의 테이블 하나를 두고 이경과 우연이 마주 앉았다. 우연의 눈이 자연스럽게 이경이 손에 쥐고 있던 서류 더미로 향했다. 서류 위로 자신의 이름이 보였다. 아마 남자는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이우연씨.”

“네, 차이경 씨, 아니 이사님.”

이경이 낮은 목소리로 우연의 이름을 불렀다. 테이블 위로 툭, 이경이 쥐고 있던 서류가 떨어졌다.

“나한테 할 말없어요?”

서류로 향해 있던 우연의 고개가 들렸다. 우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뭐라고 말을 해야 자신이 무사히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빠른 판단을 마친 우연이 결심한 듯 이경과 눈을 마주했다.

“살려주세요.”

“큭.”

이경이 자신의 입가를 가린 채 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 숙인 이경의 등이 잘게 떨렸다. 한참 들썩이던 이경의 등이 잠잠해지고 이경이 고개를 들어 눈 앞의 우연을 향해 되물었다.

“살려달라구요?”

“잘못했습니다.”

“뭐가.”

이경은 여전히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어디 더 해보라는 듯 이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이사님을 속인 건 잘못했지만, 그래도 저는 의뢰를 받았을 뿐이고.”

“...또.”

“아, 아니 이사님께서도 그때 분명 알겠다고 하셨구요.”

연인의 외도상대에게 대리 이별 통보를 받고도 웃어 보였던 건 이경이 아닌가.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우연이 말끝을 흐렸다. 약간 억울한 마음도 드는 것이다.

"아니...저는 진짜 몰랐거든요..."

아무리 우연이 한 탕 해보려는 심산이었어도 상대가 JR 그룹의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의뢰를 거절했을 것이다. 원래 의뢰인의 연인에 대한 정보는 함구하는 편이라 따로 묻지 않았지만, 큰 돈을 준다는데 의심도 해보지 않은 자신이 어리석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과거를 탓할 때가 아니었다. 이 곳에서 벗어난다면 다시는 재벌들과 엮이지 않으리라 우연은 다짐했다.

“물론 알겠다고 했죠.”

“……”

“이우연 씨 통보 잘 알아들었다고 했고.”

이경이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이경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자 우연이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런데.”

“……”

“나는 아직 통보 안 했잖아.”

이경의 손 끝이 테이블 위로 놓여 있던 서류를 짚었다. 우연의 시선이 이경의 손 끝을 따라 서류 위로 향했다.

“이우연 씨, 오메가죠.”

숨기고 싶은 우연의 치부였다. 베타인 채로 살아왔던 우연의 삶은 10년 전, 오메가로 발현하면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런 치부가 눈 앞에 남자에 의해 드러나고 있었다. 이경의 검지 손가락이 서류위에 인쇄된 우연의 이름 위를 느린 움직임으로 쓸었다.

“서류 상으로는 베타로 되어 있던데, 발현하고 신고 안 하는 거. 불법인 건 알고 있죠.”

“그,그건..!!"

“억제제도 불법 유통경로를 통해서 구입하고 있고.”

이경이 심문하듯 말하자 우연은 어쩌면 이 남자가 자신을 감방으로 넣으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도 잘못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우연씨가 오메가라는 걸 숨긴 것도, 이런 말도 안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나랑은 상관없어요.”

이경의 말에 우연의 눈에서 희망이 빛이 보였다.

“그럼 비밀로…”

“이우연 씨와 내가 관계되기 전까지는.”

“…..”

“그러게 왜 하필 나였어.”

이경의 상체가 우연 쪽으로 더욱 가까이 기울었다. 우연의 코 끝으로 시원한 향기가 훅 끼쳤다.

“이우연씨가 먼저 들어왔잖아."

“……”

질책하듯 내뱉는 말과 달리 이경의 표정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이경의 얼굴이 우연의 앞으로 한 뼘 더 다가왔다. 코 끝에서 이경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 이사님. 너무 가까운데요.””

"...그러니까."

이경의 손 끝이 흐트러진 우연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감상하듯 나른한 시선으로 우연의 얼굴을 훑던 이경이 고개를 틀어 우연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

“이우연 씨가 앞으로 내 애인이 되어 줘야겠어요.”

 

.

 

우연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인 이경이 우연에게서 몸을 물려 다시 맞은편 소파 자리에 곧은 자세로 앉았다. 이경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우연의 귓가에 느리게 재생되었다. 우연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되묻는 우연에게 이경이 한 글자, 한 글자 느린 속도로 말을 되짚어 주었다.

“이우연 씨가 내 애인이 되어줘야겠다고.”

멍청하게 굳어 있던 우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이상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일까.

“그…제가 생각하는 그 애인이라는 게..그 애인은…아니겠죠?”

“맞을 걸?”

우연이 현실을 부정하듯 간절한 눈빛으로 이경을 바라봤다. 제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줘. 하지만 혼돈 그 자체인 우연과 달리 정작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은 장본인은 밥은 먹었냐 정도의 인사말을 내뱉은 것처럼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역시, 범상치 안은 인물이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면 정말,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은. 우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아, 아니 저기요…이사님. 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저 같은 사람이 이사님의 애인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말이 되고 안되고는 내가 판단할 문제고.”

단박에 말을 끊어버리는 이경. 할말이 없었다. 우연이 침을 꼴깍 삼키고 뭔가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이사님 저 사실 빚도 많아서 빚쟁이들이 종종 찾아오기도 하거든요.”

“죽여줄까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경을 보며 우연이 흠칫했다. 무엇보다도 이경은 실언이 아니라 실제가 되게 할 것 같아서. 우연은 있지도 않은 빚쟁이들의 무사 안위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사님 좋다고 따라다닐 사람만 한 트럭일 것 같은데.”

“그건 맞죠.”

“…..근데 왜 하필 접니까?”

말 그대로였다. 이경이 손만 뻗으면 그의 연인 역할을 자처할 이들이 지척에 깔렸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우연의 표정에 이경이 피식 웃었다. 이경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위로 옮겨 갔다.

“좀 전에도 말했잖아요.”

“…..”

“나한테 먼저 온 건, 이우연 당신이라고.”

이경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우연씨의 약점을 잡고 있고, 그런 이우연씨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는데.”

다른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

우연이 낮게 읊조린 말에 이경의 고개가 기울었다.

“왜, 여보.”

“……”

할 말을 잃은 우연이 미친 사람을 보듯 이경을 바라보자 짓궂은 표정을 한 이경이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난 또 여보, 당신 하자는 줄 알고. 난 좋은데, 여보.”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마지막 말을 뱉으려던 우연은 생존 본능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남자에게 자꾸 휘말리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요.”

“아, 물론 선택은 이우연씨 자유예요.”

“그럼 전 당연히 거절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잭 나이프가 나무로 된 테이블 위로 꽂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우연이 눈을 크게 뜬 채로 헉 하고 숨을 참았다. 검은 색의 잭 나이프를 쥐고 있는 이경의 단단한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이경이 우연을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선택해요.”

“…..”

우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테이블 위로 꽂힌 잭 나이프가 형광등 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였다.

“나랑 여보, 당신 하는 가까운 당신이 될지.”

“…….”

“아니면 나랑 상관없는 아주 먼, 당신이 될지.”

“…이사님 이건 협박인데요.”

“협박 아니고, 선택.”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로 이경이 웃고 있었다. 선택은 자유라고 했지만 후자의 경우를 선택했을 때 자신에게 어떠한 미래가 펼쳐질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연은 깨닫았다. 눈 앞의 남 자는 다정한 미친놈이라는 걸.

애초에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흘러왔고, 자신은 아찔한 절벽 끝에 서있었다.

‘그래, 어쩐지 쉽더라니.’

“….하”

우연이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우연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이경의 눈썹이 밀려 올라갔다. 우연은 자신의 주먹을 말아 쥔 채 이경이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걸어갔다. 우연이 자신의 옆에 서자 이경이 의문을 담은 눈동자로 우연을 올려 보았다. 푹, 이경이 앉은 소파 옆이 꺼졌다. 한 뼘 거리를 두고 이경과 나란히 앉은 우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보.”

*

우연이 내린 결단은 도망이었다. 세상에 웃으면서 칼 꽂고 협박 아니라고 하는 미친 놈이 어디 있냐고. 당장은 살아남아야 했기에 이경의 제안을 수긍하는 척했지만 이경의 장기말이 되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도망만이 살 길이었다. 안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우연이 꺼져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이경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뒤 돌아섰다. 이경이 돌아가고 난 뒤 우연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빠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구도 몇 개 놓여있지 않은 사무실을 둘러보던 우연은 중요한 서류 몇 가지를 챙겼다. 어차피 곧 떠날 생각이었던 터라 챙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철제 캐비닛 안에 욱여져 있던 낡은 크로스백을 꺼내 든 우연이 몇 가지 되지 않는 짐들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리가 끝난 우연이 사무실을 나서며 마지막이 될 공간을 눈에 담았다. 탁. 사무실의 불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 앉았다. 우연이 등을 돌렸다.

“여권 잘 챙겼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우연은 캐리어를 챙겨 일찍 집을 나섰다. 짐이라고 챙길 게 캐리어 하나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30년을 산 한국을 떠나는데 달랑 짐 하나라니.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네, 사장님 갑자기 떠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무실 주인에게 전화를 건 우연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다정한 미친놈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급히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사정을 둘러댔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딱히 여긴 주인은 5년이라는 세월동안 보증금도 없이 헐 값에 사무실을 임대해주고 있었으니까. 보증금을 돌려받을 필요가 없으니 일의 처리는 더욱 빨랐다. 가장 빠른 오클랜드 행 비행기의 시간대를 확인한 우연은 그대로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오늘 저녁 8시 비행기. 그때 까지만 들키지 않으면 되었다. 이민 문제든 뭐든 일단 가서 생각하자.

“벌써 눈치 챈 건 아니겠지.”

근처 은행에 들러 예치금을 달러로 환전하는 동안 우연은 주변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의심스러운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밖을 나다니는 것보다 실내에 숨어 있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이대로 몇시간 모텔에서 쥐 죽은 듯 있다가 시간 맞춰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탄다. 해외로 튀어 버리면 뭐, 차이경이라도 별 수 있겠어? 설마 자신을 찾기 위해 뉴질랜드까지 쫓아오려고. 이경이 말했던 것처럼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더디고 빠르게 흘러갔다. 창 밖을 비추던 해의 방향이 바뀐 것을 보며 우연은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모텔에서 머무는 몇 시간 동안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한국을 떠나는 순간이 온다면 그저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타인에 의해 떠밀려 급한 결정을 내린 탓인지 아니면 고국에 남아있는 일말의 미련 때문인지 정체 모를 감정들이 솟구쳤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우연은 옷걸이에 걸려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와…”

우연이 짧은 감탄을 터트렸다. 공항에 와본 지가 10년이 넘었기에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라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었다. 우연도 어린 시절에는 활발하게 해외 여행을 다녔었다. 물론 이제 다 옛날 일이 되어 버렸지만. 우연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한 가족이었다. 입가에 잔뜩 웃음을 매단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는 그저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자신도 한 때는 저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었겠지. 실없는 생각을 하던 우연은 정신을 차리고 재차 주변을 살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우연은 쓰고 있던 캡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얼굴을 숙였다.

‘오후 8시, 오클랜드 행 KE1835편 탑승 고객께서는 입국장으로 입국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연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잘 있어라, 한국. 지겨웠고 또.”

혼잣말을 내뱉는데 뭔가 목에 걸린 듯 목이 메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 그래, 아마 자신이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일은 없을 것이다.

우연은 그대로 앞을 향해 걸었다. 이제 정말 모든 게 끝이었다.

“여보.”

낯설고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다정한 목소리에 우연의 몸이 뚝 굳었다. 설마.

“….미친.”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우연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어떻게 벌써.

“지금 나 버리는 거예요?”

검은 수트를 입은 이경이 우연을 향해 큰 보폭으로 걸어오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저 잘생긴 남자 버렸 나봐.’

‘어머, 어떡해.’

아니, 아니라고. 당장이라도 반박을 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자신의 앞에 훌쩍 다가온 이경이 자신의 팔목을 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 대신 짧은 신음이 흘렀다.

“나 버리지 마요, 제발.”

“아니 제가 언제.”

진심으로 실연당한 남자처럼, 이경이 잔뜩 아픈 표정을 지었다. 웅성거리던 주위의 여론은 이미 이경에게 기운 듯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오후 8시 오클랜드….’

귓가에 안내 멘트가 들렸고, 눈 앞의 남자는 자신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바람 핀 것도 다 용서할 테니까.”

“…….”

“돌아와.”

우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람이라는 단어에 주변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

 

“아니, 저기 이사님 이것 좀 놓고!!!”

“놓으면.”

“..예?”

공항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우연이 이경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우연의 말에 한 발 앞서 걷던 이경이 뚝, 걸음을 멈췄다.

“또 도망치게요?”

“….사실 지금도 그러고 싶긴 한…”

우연의 속마음이 그만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던 우연이 그만 입을 합, 다물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연을 향해 돌아서는 이경.

“…위협이 전혀 안되었나보네.”

이경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 충분히 위협적이라서 도망치려고 했던 건데요. 우연은 이번에는 속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경 주위의 공기가 미묘하게 차가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늘한 밤 공기가 우연의 코 끝을 감쌌다. 웅성거리는 주위의 소음과 드르륵, 캐리어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타요.”

“…안 타면.”

“……”

“네, 안되겠네요. 하하, 짐은. 여기다가 넣으면 될까요?”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우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마저도 돌아오는 이경의 살벌한 눈빛에 곧바로 깨갱하고 말았지만.

“주고 타요.”

우연의 캐리어를 넘겨 받은 이경이 조수석 문을 열어 우연의 몸을 차 안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우연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탁, 하고 닫히는 문. 이제 우연에게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하, 그냥 시동 걸고 먼저 출발하면.”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는 이경을 보며 우연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핸들 위에 선명히 그려진 로고를 보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어디 긁기라도 하면 자산의 뉴질랜드 행은 그냥 그대로 쫑, 끝이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우연이 망설이는 동안 운전석 문이 열리고 웬만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이경이 차에 올라탔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 이경이 후,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이경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부드러운 엔진음과 함께 차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먼저 운을 뗀 이경은 그 이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옆에 앉은 우연만 좌불안석이 되어 흘긋대며 이경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이게 말을 하다 마는 게 진짜로 사람 피 말리는 거라는 걸 우연은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었다. 어느덧 공항의 번쩍이는 불빛들이 점차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이경은 아무런 말도 잇지 않았다. 왜 말을 못하니, 왜.

“변명 시작.”

시선은 여전히 고정된 채, 드디어 이경의 입술이 열렸다. 변명이라고 할 게 뭐가 있을까. 빼도 박도 못하게 이건 누가 봐도 도망 그 자체였는데. 그래도 변명을 해보라고 하니 뭐 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요, 이사님…사실은 제가 오랜 꿈이 있었거든요.”

“…..”

“뉴질랜드에 가보는 게 정말 제 꿈이었는데.”

아무 대꾸 없이 우연의 말을 듣고 있던 이경의 고개가 느리게 우연 쪽으로 향했다.

“꿈이라.”

이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우연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담겨있지 않았다.

“가면 되죠, 꿈이라는데.”

“…예?”

너무나도 쉽게 말하는 이경에 우연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저 가도 돼요?”

“그럼요. 얼마든지.”

“…아니 근데 왜.”

가도 된다고 하면서 잘 가고 있는 자신을 왜 굳이 다시 잡아오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같이 뉴질랜드 여행이라도 다녀올까요?”

“….아니…여행이 아니라 저는 거기서 살고 싶은 건데..”

그리고 거기에 왜 차이경 당신이 끼어 있는 건데요.

“왜 거기서 살고 싶은 건데요?”

“…꿈이니까요.”

“….꿈”

“….네, 10년전부터 진짜 제 꿈이었거든요. 거기서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게 제 유일한 꿈인데.”

우연이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이경을 바라봤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간직해왔던 꿈 이라는데, 이제 그만 인정하고 순순히 자신을 보내주었으면 했다.

“꿈 좋죠.”

“그렇죠, 맞죠?”

“맞죠. 사람이 꿈을 갖고 살아야 의지가 있고 행복하고, 그러니까.”

“암요, 암요.”

다행히도 돌아오는 것은 긍정 시그널이었다. 우연은 이경에게서 한 줄기 희망을 얻었다. 이경과 대화를 하고 처음으로 말이 좀 통한다 싶었다. 우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

그러나, 하지만, 그럼에도. 우연이 이래서 언어영역을 싫어했다.

“앞으로 이우연 씨의 꿈은 다른 걸로 하면 될 것 같네요.”

“…..네?”

“이우연씨의 꿈은 나와 함께 하는 거.”

“…….”

“그걸로 하죠.”

“…제가요?”

우연은 사회화가 완벽하게 되어 대리 정도 되었을 때, 상사가 시키는 일에 이걸, 제가요? 이런 느낌으로 되물었다. 말이 좀 통하기는 개뿔이나, 이경과 자신은 그냥 서로 다른 데다가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경의 말에 그만 전의를 상실해 버리고 만 우연. 기대감에 부푼 우연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할 말을 마친 이경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할 말을 잃은 우연은 고개를 돌렸다. 창 밖으로 네온사인이 빠르게 흩어졌다. 우연의 눈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담았다.

.

도착한 곳은 고층 건물 숲이었다. 고급 오피스텔 단지는 밤을 잊은 듯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출입구를 지난 차는 미끄러지듯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 바퀴, 두 바퀴를 돌아 지정된 곳에 차가 주차되고 이윽고 차의 시동이 꺼졌다. 말하지 않아도 우연은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합니까.”

내리라는 듯, 이경이 눈짓했다.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집 주인에게 초대받은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운전석의 문이 먼저 열렸다. 이경의 뒤를 따라 조수석에서 내린 우연이 캐리어가 실린 트렁크 쪽으로 향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잠기자 우연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경이 차 키를 쥔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내 짐….”

“이우연 씨가 또 어디로 도망갈 줄 알고. 인질 이예요.”

캐리어가 없으면 빈털터리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환전했던 돈도 모두 캐리어에 있었고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은 제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우연은 우울한 표정으로 이경의 뒤를 따라갔다.

엊그제부터 오늘까지, 한꺼번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이 발생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우연은 빠르게 멀어지는 창 밖의 풍경을 멍하니 내려봤다. 마치 호텔 밖의 풍경을 감상할 때처럼.

그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일까.

‘45층.’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경의 구둣발이 푹신한 카펫 위를 밟았다. 긴 복도를 따라 가자 복도 끝에 문 하나가 보였다. 이경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지문인식 기계위에 엄지를 가져다 대자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가라는 듯 이경이 문 옆에서 비켜났다. 우연은 느린 동작으로 발을 옮겼다.

“이게 집이라고.”

집 안으로 들어선 우연이 짧게 감탄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높게 트여진 천장에는 호텔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자신의 사무실에 놓여있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가 놓인 넓은 거실 뒤로는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강의 모습이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우연을 지나쳐 거실 소파 쪽으로 걸어간 이경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먼저 씻어요. 욕실은 저 쪽 이랑, 저기. 편한 데 써요.”

씻다니, 여기서 왜. 소파 위로 느긋하게 몸을 기댄 이경을 향해 우연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이사님. 집 구경은 참 잘했습니다. 집이 참 멋지네요.”

“…..”

“그런데 시간이 많이 늦어서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월세방을 정리하지 않았다. 사실 정리라 할 것도 없었다. 애당초 옵션으로 들어와 있던 몇 가지 가전가구를 제외하고 우연의 것은 거의 없었다. 사무실과 같이 당장 입을 몇 가지의 옷가지만 챙기고 나니 안 그래도 휑하던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보증금도 얼마 남지 않은 집이라 급하게 짐만 챙겨 나온 게 다행이었다. 당장 돌아갈 곳은 있었으니까. 머리로는 부정하고 있었으나,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던 걸까. 우연은 어떻게 하면 인질로 잡힌 자신의 캐리어를 무사히 탈환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가긴 어디를 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이경이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 집….”

우연이 말 끝을 흐렸다.

“애인 집에 왔는데 자고 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당연하지 않은데요.”

감고 있던 이경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소파에 기대어 있던 이경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매고 있던 넥타이 끝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풀어내며, 이경이 우연을 향해 다가왔다. 몇 걸음 되지 않아 가까운 거리에서 이경이 나른한 시선으로 우연을 내려봤다.

“혼자 씻을래요.”

“안 씻는다고…”

“아니면, 같이 씻을래.”

“…저 쪽 욕실 쓰면 된다고 하셨죠.”

우연이 이경에게서 시선을 거둬내며 황급히 뒤 돌아섰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이경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

 

“아, 진짜. 미치겠네.”

욕실로 들어온 우연이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벗으며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무슨 말을 해도 이경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러게 돈이 이상하게 많다 했어.”

제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해도 왜 이렇게 큰 돈을 쓰나 했는데, 이경을 겪고 나니 이 돈도 모자라다 싶었다. 이경은 우연이 겪은 세상을 뛰어넘는 상상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경에게 우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고. 아무리 뉴질랜드 라이프에 눈이 멀었다고 한 들, 어쩌다 이런 일 까지 겪게 되었을까.

“하….”

우연이 샤워기를 틀었다. 몸 위로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며칠 동안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이 풀어지며 나른한 한숨이 흘렀다. 욕실 안에서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마땅히 나오는 답은 없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기에는 머리 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잡념을 없애듯 우연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한참이나 맞았다.

“…이거 그대로 입어야 하나.”

샤워를 마친 뒤 우연은 잠시 고민했다. 입고 온 자신의 옷을 그대로 입기에는 좀 그런 것 같고, 그렇다고 저 차이경의 앞에 벌거벗고 나가는 건 더욱 아니될 말이고.

“옷, 문 앞에 뒀어요.”

우연의 고민이 무색하게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이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 감사합니다.”

“고민하고 있었죠.”

“…네”

“난 괜찮은데. 벗고 나와도.”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뭐 어때요, 같은 남자끼리.”

“절대 싫은데요.”

“…아쉽네.”

진짜 뭐라고 하는 거야 저 미친 남자가.

“…그럼 입고 나와요.”

이내 포기한 듯 툭, 욕실 문 앞에 옷이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귀를 기울인 우연이 이경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반쯤 열린 문 틈 사이로 재빨리 손을 뻗어 문 앞에 놓인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포근한 냄새가 나는 잠옷이었다. 소재도 부들부들한 게 딱 봐도 비싸 보였다. 역시, 부자들은 잠옷도 비싼 거 입는구나.

“…아니 이게 뭐야.”

옷을 꿰어 입던 우연의 손이 멈칫했다.

“…이거…”

너무 큰데. 고개를 들어 거울을 살피자, 헐렁한 잠옷 밑으로 쇄골이 훤히 보였다.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어깨가 휑하니 드러나 보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경의 옷 사이즈 인 것 같은데. 우연은 거울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정말로 이 옷을 입고 나가야 하는 걸까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 몰라.”

우연이 헐렁거리는 잠옷 자락을 매만지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한 쪽 손은 흘러내리려는 어깨 쪽을 움켜쥔 채였다.

“저기, 이사님…혹시 옷이..좀 작은 게 없을까요? 이거…”

우연과 마찬가지로 샤워를 마쳤는지, 편안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이경이 보였다. 정돈되어 있던 검은 머리가 내려와 차분하게 이마 위를 덮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우연의 모습을 훑던 이경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드러난 쇄골을 지나, 옅은 홍조가 오른 뺨으로, 물기에 젖은 머리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잘 어울리는데.”

“흘러내릴 것 같은데.”

“그럼 더 좋고.”

“….도대체 뭐가요.”

우연이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정색했다. 그런 우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경의 시선은 한참이나 우연의 몸 위에 머물렀다. 우연은 마치 자신이 동물원의 동물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자신을 관람하는 이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우연씨.”

이경이 우연의 이름을 부르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뭐, 왜 오시는데요.”

“…..글쎄.”

“오, 오지 마시죠.”

우연이 자신의 몸 위로 크게 엑스자를 그리며 거부의 뜻을 정했다. 하지만 예의 그렇듯 그런 우연을 가볍게 무시한 이경은 느린 발걸음으로 우연을 향해 다가왔다. 이경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거실 위에 울렸다. 이경이 자신에게 가까워져 올 때마다 우연은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아니, 오, 오지 마시라니까요.”

“…왜.“

물기에 젖어 나른하게 가라 앉은 이경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이경의 머리 뒤로 시원하게 넘어가 있던 검은 머리가 이경의 이마를 차분하게 덮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오히려 이경의 칠흑 같은 검은 눈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짙고, 까만 눈. 포식자가 먹잇감을 눈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듯. 우연의 말에 이경이 가볍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웃지마, 웃지말라고.

탁.

“….헉.”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나던 우연의 등 뒤에 차갑고 딱딱한 벽이 닿았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어느덧 우연의 코 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이경.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이경이 우연을 가만히 내려봤다. 그리고 이경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이우연씨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그래요?”

“…저 맛 없는데요.”

“…그건 먹어봐야 알 것 같은데.”

“…저 아픈 거 싫은데요.”

끈질기게 내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우연이 황급히 이경에게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우연씨.”

“….네?”

자신을 부르는 이경에 우연이 고개를 들었다. 훅, 눈 앞까지 가까워져 오는 이경에 우연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눈을 감기는 감았는데.

“뭐해요?”

이경이 손에 들고 있던 수건으로 우연의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물기 다 안 말리면 감기 걸립니다.”

“…..”

우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머, 머리는 제가 말릴 수 있는데요!!”

“…..아.”

“….”

“혹시. 뭐 다른 거 기대했어요?”

“아닌데요.”

“이우연씨 여기서 이러면 좀 곤란하죠.”

“절대 아니라고.”

정색하는 우연에도 이경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 남자에게도 이런 얼굴이 있구나. 이경의 차가운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제가 말릴 수 있다니까요.”

“가만히 안 있으면 진짜 다른 거 할 수도 있고.”

“가끔은 남이 머리 말려주는 것도 좋죠. 처음이지만.”

우연이 순순히 이경에게 제 머리를 맡겼다. 우연의 머리 위로 이경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

"새나라의 어린이는 이제 그만 꿈나라에 들 시간이네요."

"여기 어린이 없는데요."

“안 자면 뭐."

"...뭐요."

“안자면 뭐하려고.”

“저 어디에서 자면 된다구요?”

우연은 이제 이경의 저런 말들은 무시해버리기로 했다. 변태도 아니고, 자꾸 하긴 뭘 해. 진짜, 건들기만 해봐. 우연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이경을 흘겼다. 그런 시선을 느낀 건지 이경이 우연을 향해 으쓱 어깨를 들어보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듯.

“안 자면 대화라도 하려고 했죠, 난.”

“…개구라.“

”뭐라구요?“

“하암. 오늘 열심히 돌아다녀서 그런가, 피곤하네. 얼른 자야겠다.”

“그렇겠네요. 피곤하겠네.”

“….”

“도망다니느라.”

“…..”

“따라와요.”

결국 본인이 한 말에 본전도 못 건진 우연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이경을 따라갔다.

“…여긴.”

이경을 따라 차분한 그레이 톤으로 된 커다란 침실로 들어서자 퀸 사이즈 침대와 침대맡의 협탁이 보였다. 낮은 조명이 깔린 침실 안에는 이경의 체취와 닮은 시원한 향이 은은하게 베어 있었다.

“여기 이사님 침실 아닌가요?”

“맞습니다.”

“근데 주인 놔두고 제가 왜 여기에서 자요?”

남는 방이라면 얼마든지 충분 해 보였다. 이 넓은 집에 손님 방 하나 없을 리는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경을 올려보자 이경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태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같이 자야죠.”

이경의 말에 우연이 경악하며 이경에게서 한 발자국 뒷걸음 쳤다.

“저는 남는 방에서 자겠습니다.”

“남는 방 없습니다.”

“그럼 소파에서.”

“소파엔 누우면 안 됩니다.”

거짓말 치지 마. 불신에 가득 찬 우연이 두 발자국 이경에게서 멀어졌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이경이 짧게 웃었다.

“농담이예요.”

“그런 농담 재미없는데요.”

“얼른 눕기나 해요. 아마 내일은 바쁠 것 같으니까.”

이경이 턱 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왜 바쁜데요?”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이경은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우연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래도 그렇지,집 주인을 놔두고 어떻게 침실을 차지 할 수 있나 싶어 우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도 이사님 침실인데…”

“뭐, 같이 자자고?”

이경의 말에 우연이 재빠르게 침대로 걸어갔다. 자신의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우연이 바른 자세로 누웠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사님.”

“이우연씨도 잘자요.”

“아. 그리고 이사님.”

돌아서는 이경을 우연이 불러 세웠다.

“네? 무슨 할말이라도.”

“가는 길에 불도 좀 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드넓은 들판. 높고 푸른 하늘.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서 자리를 깔고 누운 우연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봤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가만히 눈을 감은 우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우연이 10년동안 꿈꿔왔던 삶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는데. 주위에는 아무런 소음도 없이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분명 같은 지구 안에 존재하는 곳은 맞는데, 우연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세계와는 아예 다른 세계인 것 같아서 우연은 그저 가슴이 벅찼다. 이 곳에서라면 그동안의 힘든 일들은 모두 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적인 느낌.

“이우연,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연이 스스로를 토닥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갑작스러운 오메가 발현까지. 10년동안 우연은 꽤, 아니 아주 지난한 삶을 살아왔다. 대학은 당연히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렇다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우연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남의 불륜대행 역할까지 자처해왔다. 상대방에게 물세례를 받기도 하고, 불꽃 싸대기를 맞기도 하고 그야말로 평생 들어먹을 욕이란 욕은 다 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 우연은 그 어떤 후회도 없었다. 자, 이제 시작이야. 내 꿈은.

“여보.”

“…?”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우연이 흠칫했다. 뭔가 익숙한 목소리였던 것 같기도 한데 뭐지. 우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믿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여기는 꿈의 뉴질랜드이니까.

“여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에이”

“나랑 우리 애기를 놔두고 어떻게. 도망을 갈 수 있냐고.”

“…그럴 리가.”

분명 하늘은 높고 푸르고 구름 한 점 없는데, 도대체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예요.”

“…”

“이우연, 당신은 절대 나 못 벗어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원망이 잔뜩 섞인 말투로 우연에게 살벌한 말을 쏟아냈다.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우연이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뭐, 뭐야?”

하늘에서 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연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칼에 맞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미친,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아악!!! 살려줘, 제발!!!”

.

“헉.”

“이우연씨?”

“헉, 허억, 이게 다…무슨.”

“괜찮아요?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오, 오지마!!”

번쩍, 눈을 뜬 우연은 급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천장을 보고 더 이상 하늘에서 칼이 내리지 않음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무슨 이런 개꿈이 다 있어. 그리고 꿈이었다고 안도하는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꿈에서 나온 목소리의 주인공, 이경이었다. 새우 튕기듯 침대 가장자리로 도망간 우연이 이경에게 강력한 거부 의사를 전달했다. 생각해보니 이게 다 저 차이경 때문이었다. 칼 비가 내린것도, 첫 만남에 눈 앞에서 냅다 칼 꽃은 저 인간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PDSD였다. 차이경 후유증, 뭐 그런 거.

“뭐. 내가 뭐했어요?”

“…”

“누가 보면 이우연씨 꿈에라도 쫓아간 줄 알겠네.”

“…알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있겠냐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짓는 이경.

“…그런데 침실에는 왜 들어와 계셨던 건데요?”

“음.”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우연이 물었다.

“좀 아쉽긴 하네요.”

“…뭐가요?”

“이우연씨가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좋았을 걸.”

“…왜?”

이경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툭,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는 이경.

“이우연씨가 하도 안 일어나길래.”

“…”

“입맞춤으로 깨우려고 하던 참이었거든요. 잠자는 공주는 원래 키스로 깨우는 법이라.”

“…”

“아, 왕자인가.”

왕자 같은 소리하네. 또 어디서 칼 비나 안내리나. 차이경 한테.

“아쉽네요. 다음 기회에.”

진짜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이경을 보며 우연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이 저렇게 뻔뻔하고도 정상적이지 않은 사고를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씻고 밥 먹으러 나와요.”

“…입맛이 별로 없는데요.”

“고기인데.”

“무슨 아침부터 고기를 먹어요.”

“투 플러스 한우.”

“…제가 진짜 아침은 잘 안 먹는데 이사님께서 차리신 성의가 있고 하니 또 안 먹을 순 없겠네요.“

하늘에서 내리는 칼 비를 맞고 꿈 속에서 이경에게 쫓기던 기억을 망각이라도 하듯 우연은 한우 한 마디에 이미 씻으러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와.”

누가 보면 어디서 못 먹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싶겠지만, 우연에게 있어 밥이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연료 같은 그런 개념이었다. 게다가 소고기는 비싸서 잘 못 사먹었었는데, 투 플 한우라니. 본인은 티를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 하겠지만 우연의 입꼬리는 티나게 실룩이고 있었다. 그런 우연을 보며 이경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 쪽으로 앉아요.”

깔끔하고 넓은 주방. 넓은 테이블 위에 샐러드며 소고기며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걸 다.

“이사님이 다 하신 거예요?”

“네. 요리는 제가 직접 해먹는 편이라.”

정말 의외의 대답이었다. 손 끝 하나도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부잣집 도련님 차이경이 직접 요리라니. 요리 하는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우연은 여전히 감탄하며 이경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자극했다. 우연이 홀린 듯 포크를 집었다.

”어때요, 입맛에 좀 맞…“

”…네?“

이미 양 볼 가득 빵빵해진 우연. 포크로 열심히 고기를 집으며 대답하는 우연을 보며 이경이 어깨를 으쓱 했다.

”입맛에 많이 맞아 보이네요.“

”음. 맛있다.“

”다행이네요.“

”마트, 다녀오셨어요?“

우연의 눈이 보기 드물게 초롱초롱 빛났다.

“많이 먹어요.”

“..네.”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예정이니까.”

“…?”

분주하게 움직이던 우연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답을 구하듯 이경을 쳐다봤지만, 이경은 더 먹으라는 듯 자신의 소고기가 담긴 접시를 우연에게 밀어 줬다.

“백화점 갈 거예요. 쇼핑하러.“

”…저도 같이 가요?“

”당연히?“

”왜 당연히?“

이경의 쇼핑까지 굳이 자신이 따라갈 필요가 있나 싶었다.

“쇼핑하면 힘들 거니까 미리 든든하게 배 채워 놔야죠.”

“…혹시 제가 대신 짐 들어야 해요?”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셔틀인건가?

“…내가 이우연씨 그렇게 부려 먹을 사람처럼 보여요?”

“….“

”왜 대답이 없지.”

부려 먹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왜 본인만 모르는 걸까.

“하, 하하. 재밌겠네요 쇼핑."

"...그래요. 재밌겠네."

이경이 우연을 빤히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쇼핑 가는 게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어제부터 계속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 이경. 쇼핑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네. 우연은 고기를 씹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 분명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어서오십시오, 이사님."

"이번 시즌 컬렉션으로 준비해주세요."

"네. 이 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아."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분명 백화점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무리 우연이 없이 살았다고 해도 백화점이야 어린 시절에 종종 가봤었다. 근데 우연이 기억하는 백화점과 여기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백화점 안에서도 VVIP들만을 위한 공간인 듯 그냥 백화점을 전세 낸 것처럼 손님이라고는 이경과 우연 둘 뿐이었다. 그제야 우연은 새삼 눈앞의 이경이 우리나라에서 손 꼽는 재벌이란 걸 어렴풋이 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곳의 사람들 그리고 이경 모두가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이 곳에서 우연 자신만 동 떨어진 느낌이었다. 우연은 입구에서 뻘쭘하게 굳어 서 있었다. 백화점 직원들이 이경을 안내하려고 하자, 이경은 눈짓으로 반쯤 자신의 뒤에 떨어져 있는 우연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 말고. 이 쪽."

"....나?"

우연이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갑자기 내 옷을 왜 사.

"응, 너."

"...저 돈 없는데요?"

"내가 있잖아."

그래 너 돈 많다. 너 잘났다.

"...이사님이 왜 제 옷을 사주세요."

"그 옷 입고 갈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또 어디 가요?"

분명 백화점 쇼핑한다고 했는데, 또 다른 행선지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옷 다 입으면 알려줄게요."

"..아니.."

"고객님? 이 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우연이 이경에게 따지려고 하는 순간,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직원들이 우연의 몸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아, 아니 저 진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요."

"고객님? 어떤 스타일 원하세요? 다 잘 어울리시긴 할 것 같아요. 워낙 피부가 하야셔서."

"아니 저기요. 이사님."

분명 웃고 있는 건 맞는데 어딘가 묘하게 부담스러운 직원들의 태도에 우연이 간절한 눈빛으로 이경을 바라봤다. 두 눈을 잔뜩 반짝이며 자신을 이끄는 직원들에 우연은 그녀들이 진심으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저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면 뭔가 큰일이 날 것만 같아.

"잠깐."

그녀들의 손에 끌려가는 우연을 이경이 불러 세웠다. 이 순간만큼 이경이 구세주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이사님, 나이스.

"참고로 저는 청순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이사님."

나이스는 개뿔이다. 니 취향 알고 싶지 않다고.

 

.

 

“고객님? 이사님께서 추천하신 스타일로 몇 벌 가져와봤어요.”

도대체 왜 우연 자신이 차이경이 추천한 스타일대로 입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연 자신이 스타일을 주장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우연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 쪽에서 한 벌씩 갈아입고 나오시면 되세요.”

“아, 네. 네.”

졸지에 여직원들의 손에 끌려간 우연은 직원들이 건네는 옷 한 더미를 받아 들고 피팅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도 우연은 한참을 우물쭈물 망설였다. 왜냐하면, 옷에 달린 가격표를 봐 버렸기 때문에. 일,십,백,천 가격표에 적힌 0을 세던 우연의 입이 놀라 떡 벌어졌다. 도대체 0이 다 몇 개야. 우연은 자신이 0을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두 번, 세 번을 봐도 똑같았다. 한 벌에 몇 백만원씩 하는 옷들을 보자 감히 입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거 입었다가 어디 흠집이라도 생겨서 책임 물으면 어떡해.

“고객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아, 그건 아닌데.”

“네. 그럼 천천히 갈아입고 나오시면 돼요.”

뭐지. 분명 여직원의 목소리는 친절한데 묘하게 압박감이 있는 게. 천천히 갈아입고 나가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씨. 진짜.”

옷 앞에서 또 한번을 고민하던 우연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눈 앞에 보이는 옷을 집어 들었다. 모르겠고, 차이경이 책임지겠지, 뭐.

.

“어머.”

“…아.”

“세상에, 고객님.”

“…이상…한가요?”

우연이 머쓱하게 웃으며 셔츠 끝 소매를 괜히 매만졌다. 그동안 몸에 달라붙지 않는 큰 사이즈만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몸에 착 감기는 감촉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뭔가 입고 있는데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피팅 룸에서 나오는 우연을 보곤 뚝 멈춰 섰다. 그렇게 이상한가? 말이 없는 직원들을 보고 우연은 그 앞에 서 있기가 더욱 민망해졌다.

“처음이예요.”

“네?”

“이 옷 이렇게 잘 어울리시는 분 처음 봐요.”

“…진짜요?”

“역시 이사님 안목이 탁월 하시다니까. 여기, 거울 한번 봐 보세요.”

“…이상할 것 같은데.”

직원이 호들갑을 떨자 우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가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연은 순간 멈칫했다. 어깨선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듯 걸쳐진 화이트셔츠가 은은한 광택감을 더하고 있었고 미세하게 절개선을 따라 포인트로 들어간 은색 펄이 빛을 따라 반짝였다.

“..이게 좀.”

“고객님. 너무 잘 어울리시죠?”

“…아, 네.”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우연 자신의 눈에도 예뻐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떠나서 이 옷은 좀.

“…좀 야한 것 같은데.”

“네?”

“아, 아니요. 저 다른 옷으로 입어 보고 싶은데.”

“네? 아니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

직원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좀 부담스러워서.”

우연이 다시 한번 흘긋,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거울 속에.

“아, 깜짝이야.”

순간 장르가 공포인 줄 알았다. 우연이 화들짝 놀랐다. 무슨 깜짝 출현이 전문이라도 되는 듯, 분명 좀 전 까지만 해도 거울 속에 우연 자신의 모습만 비췄었는데 어느새 등장한 차이사가 벽에 기댄 체 팔짱을 끼고 우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좋은데.”

“…뭐가요.”

“그거.”

이경이 턱 짓으로 우연의 옷을 가리켰다.

“..전 별론데요.”

“왜?”

“..너무 얇고.”

“좋은데요.”

“..몸도 다 드러나는 것 같고.”

“그것도 좋고.”

“막,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것 같고.”

“그건 좀 싫은 것도 같고.”

순간적으로 이경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 뭐 어쩌라고. 그러다 이경이 뭐 어떻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이상하게 쳐다보면 뭐.”

“…”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이상하게 만들 수가 있는 건데.

“죄 없는 사람들 이상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제가 안 입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닐까요?”

“내가 마음에 들어서.”

어쩌라고.

“…청순하기도 하고.”

“…”

“…섹시하기도 하고.”

“…”

“딱 내 스타일 이네요.”

염병.

“이걸로 하죠. 나머지도 전부 포장해 주시고.”

“네. 이사님.”

차이사의 브레이크 없는 추진력에 선택과 결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연이 뭐라고 더 반박하기도 전에 말로만 듣던 차이사의 블랙 카드가 등장했다. 직원이 말하는 결재 금액을 듣고 우연은 제 귀를 의심했다. 0이 하나 더 붙은 거 아닐까?

“감사합니다, 이사님.”

직원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카드와 쇼핑백을 건넸다. 졸지에 우연은 팔자에도 없던 명품 옷을 한아름 안게 되었다.

“아니 이거 다 필요 없는데.”

“그래요? 난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해줬는데.”

“…이사님이 왜.”

“그야.”

“…그야?”

“이우연씨가 내 애인이니까?”

“…”

그 놈의 애인타령 지겹지도 않나.

“공짜로 사준 거 아니예요.”

“…네? 설마.”

우연이 또다시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이경을 올려봤다. 설마 어디 내 장기 한 쪽 내 놓으라고 하거나. 차이사, 내가 눈 앞에서 칼 꽃을 때부터 어둠의 세계에 손 뻗고 있을 거라고 알아봤다고.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흠, 흠흠.”

생각을 간파 당한 우연이 헛기침을 했다.

“중요한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어딘데요?”

“런칭 파티요.”

“…”

“파트너를 데려가야 해서.”

“…에이.”

“이우연씨가 함께 가줘야 겠어요.”

“…제가요?”

“응. 네가.”

“…싫다면.”

“이우연씨 캐리어가 어디 있더라.”

이경이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캐리어로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뭐라고?”

우연이 별다른 대꾸 없이 먼저 돌아섰다.

“그래서 런칭 파티가 어디라구요?”

.

“…이게 다 뭐야.”

이경의 협박에 못 이겨 도착한 런칭 파티 장소. 화려한 조명이 우연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곳은 드라마에서만 봤었지 와보는 건 당연히 처음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테이블에서 대화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경의 등장으로 인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어깨 펴요.”

“…지금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이경과, 함께 등장한 우연에게 집중되었다. 각자 수근대는 소리가 음악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듯했다. 흥미와 경계를 담은 그들의 시선에 우연은 또 한번 자신이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자신이 이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후회와 자책으로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우연의 어깨를 이경의 한쪽 팔이 감쌌다. 흠칫. 자연스럽게 들어온 이경의 팔이 우연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경이 우연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 죽을 거 없어요. 여기에서 이우연씨가 제일 예쁘니까.”

이경의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니까. 고개 들고.”

“…못 들겠는데요, 차마. 이사님이 저질러 놓은 게 있어서.”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셨잖아요.”

“키스도 안 했잖아, 아직.”

우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 이경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갈까요?”

“….”

누구보다 당당하게 걷는 이경과 그런 이경을 마지못해 따라가는 우연. 우연은 지금 이 순간이 제발 꿈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이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잘 지내셨죠?”

이 꿈에서 빨리 깨어나기 만을 간절히 바라는 우연 앞에 낯선 남자 무리가 멈춰 섰다. 멈춰선 일행은 이경에게 반갑게 알은 체를 한 뒤, 그 뒤로 자연스럽게 흘긋 그 옆의 우연을 훑었다. 무리 중 한 남자의 시선이 우연의 얼굴에 얼마간 길게 머물렀다.

“…그런데 이 쪽 친구분은.”

흥미롭다는 듯, 남자의 시선이 다시 우연에게 와 닿았다.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우연을 친구라 지칭한 남자가 이경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리며 손에 쥐고 있던 샴페인 한 모금을 머금었다.

"친구, 아닙니다."

"..네? 그럼."

설마. 우연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이경을 올려봤다. 에이, 설마.

"친구 아니고."

"..아니고?"

"애인."

"....네?"

이경의 입에서 나온 충격 발언에 파티 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진짜 설마 설마 했는데, 그 놀라운 걸 이경이 또 해내었다. 우연은 그 자세 그대로 얼음상태.

"제 애인입니다. 이 쪽."

'뭐야, 진짜?'

'진짜로 이사님 애인이라고?'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굳어 있던 우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 아니. 저기 여!!"

우연이 뭐라 반박하려 입을 여는 순간.

"...."

차이경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차이경의 눈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그 말을 뱉으면.

"...여, 여보..?"

지금 그 말을 뱉으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라고.

 

.

 

차이경의 애인 발언과 그에 더한 우연의 여보 발언에 파티장의 분위기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저 세상 분위기까지 가버렸다.

‘내가 왜 그랬을까.’

진실을 밝히기엔 차이사한테 죽을 것 같아서 나오는 대로 말을 했는데 그게 왜 하필이면 그런 단어였냐고. 이경에게 죽기 전에 이 뜨거운 시선들에 먼저 데여 죽겠다 싶었다.

“…어떻게 좀 해봐요, 제발.”

이경이야 남들의 주목을 받는데 익숙하겠지만, 우연은 아니었다. 우연이 간절한 눈빛으로 이경의 팔뚝을 붙들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응?”

“…이 분위기가 안 느껴져요?”

“왜요, 여보.”

이경이 다정한 목소리로 우연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슥, 이경의 팔이 우연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우연이 움찔 하며 이경에게 잡힌 허리를 빼내려 했지만, 단단히 허리를 붙든 손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그…여보 소리 좀 제발.”

“난 좋다고 했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좋은 대로만 살아요.”

“난 그렇게 살아.”

“…상당히 재수가 없네.”

“…뭐라고?”

슥, 이경의 눈썹이 밀려 올라갔다. 우연이 애써 그런 시선을 피했다. 사실 이경이 어떻게 되든 그건 우연 자신이 알 바 아니었으나, 그래도 명색이 재벌인데 이런 행보를 이어간다면 무조건 신문 기사 1면 감이다 싶었다. 진짜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거냐고. 요새 사이버 부대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하긴, 이경이라면 그런 사이버 부대들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이야. 이사님한테 이렇게 미인인 애인 분이 계셨네요.”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때 소란스러움을 뚫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뱀 같은 눈을 한 남자였다. 남자는 이경을 향해 인사를 한 뒤, 그 옆에 있던 우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윽, 자신을 훑어보는 남자의 가는 눈에 우연은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듯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런데.”

“…”

“제가 알고 있던 분 이랑 다른 분이신 것 같은데. 그새 바뀌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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