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기나긴 마계와의 전쟁이 끝나고 수도로 복귀했다. 하지만 기다린 건 귀족들과 황제의 정치놀음. 이제 이런 삶은 지쳤다. 그래, 여행이나 떠나자.
“후루룩. 후룩. 하아.”
길고 가느다란 면과 깊고 진한 풍미가 느껴지는 돼지고기 육수.
뜨거울 법도 한데, 혁필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있는 음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날, 길고도 긴 여행길에 마주한 라면은 천상의 맛이었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노란 머리의 소녀가 방긋 웃었다.
포크로 면을 한가득 퍼서 한입에 집어삼키는 소녀.
우물우물.
면을 입안 가득 넣은 채 우물거리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그래서 괜히 볼때기를 쿡 찔렀다.
“우움! 움움!”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는 걸까.
아이는 항의하듯 노려보곤 숟가락으로 국물을 퍼마셨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혁필은 그렇게 생각하며 픽 웃었다.
그리고 면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두 사람은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음식이 나오는 족족 흡입했다.
매콤한 향신료와 달콤하고 짭조름한 소스로 구워낸 닭고기 요리.
채소와 소고기 조각이 들어간 속이 든든하고 따뜻해지는 수프.
거기에 더해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부드럽게 익은 생선 소금구이까지.
두 사람은 쉴 틈 없이 먹어치웠다.
“하아. 배불러요. 더는 못 먹어.”
“루루, 근처에 분위기 좋은 빵 가게가 있다는데 안 갈 거야?”
“우아~ 빵 좋아요! 갈래요!”
민들레를 닮은 아이, 루루가 방긋 웃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빵 가게를 향해 달릴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해. 일단 짐부터 풀어야지.”
“아, 그렇네요.”
루루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며, 여관 2층으로 향했다.
녀석, 무리할 필요 없다니까.
혁필은 탁자에 은화 다섯 닢을 올려두고 루루의 짐을 번쩍 들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아이까지 함께 들어 올려졌다.
“우와아. 날고 있어요!”
“그렇게 좋아?”
“네!”
아이의 웃음.
부족할 거 없는 여행길.
이거야말로 행복이 아닐까.
혁필은 씩 웃었다.
***
“은퇴하겠습니다.”
용사, 혁필의 충격적인 선언에 회의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혁필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직서라 적힌 양피지를 탁자 위에 던졌다.
툭.
탁자 위에 있던 회의 자료들이 양피지와 함께 어질러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은퇴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귀족들의 투표 없이 그럴 수 없단 거 모릅니까?”
“맞소. 당신의 은퇴는 허락할 수 없소. 그러니 양피지는 도로 가져가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쟁이 끝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잡아둔 지 어느덧 한 달.
마왕도 죽었고 더는 이렇게 붙잡혀 있을 이유는 없었다.
“제가 할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은퇴하겠습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용사여. 후회하지 않겠는가.”
“후회는 무슨. 이곳에 잡혀 있는 편이 더 끔찍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혁필은 회의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나가는 동안 귀족들이 무어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던 거 같은데.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는 말들이었다.
‘내가 언제까지고 잡혀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지.’
회의장을 빠져나온 혁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벅. 저벅.
황성의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르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
한 편의 구름과도 같은 풍경이, 자유라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그럼 돌아가 볼까.’
혁필은 황성을 빠져나와 곧바로 머물고 있던 저택으로 향했다.
‘여행. 가는 거야.’
저택으로 돌아간 혁필은 황제가 직접 붙인 감시인들 앞에서 짐을 쌌다.
옷가지와 구석에 쌓아둔 돈 몇 푼.
그리고 등에 딱 맞는 배낭과 돈을 담아둘 작은 주머니까지.
“그.”
“음.”
감시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혁필을 바라보았지만, 따로 제지할 수 없었다.
황제가 보낸 감시자들 앞에서 감히 도망을 준비한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황제한테 말하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저 떠납니다.”
“자, 잠시만요.”
감시자 하나가 혁필의 앞을 막았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저택을 나가고 싶었지만, 마지막인 만큼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를 쳐다보았다.
“저, 정말로 떠나시는 겁니까?”
“네. 갑니다. 친절하게 말하는 건 이게 끝이니 비키세요.”
감시자는 아무런 말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끼릭. 쿵!
감시자들은 황당한 얼굴로 현관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를 따라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지각색의 꽃들이 피어난 정원.
중심에 보이는 새하얀 대리석 분수대.
처음에는 좋은 집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황제의 술수였다,
일부러 황성 근처에 있는 저택을 주고, 감시까지 붙였다.
이건 용사를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데 나는 바보처럼 선의라 생각하고 곧이곧대로 받았지.’
이제 끝이었다.
더는 그들과 엮일 일도 없었고, 그들이 혁필을 찾을 일도 없었다.
찰그락. 휘익.
은색 줄과 테두리를 가진 펜던트.
혁필은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그 펜던트를 목에 걸면 당신을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제가 직접 축복을 담은 성물이니까 믿어도 돼요.’
여신의 세계에서 떠나기 전, 그녀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믿기로 했다.
명색에 여신이란 존재가 한낱 인간을 속일 이유는 없으니까.
“몰라. 이제 자유야.”
혁필은 누가 볼까 싶어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인파가 붐비는 수도의 중심지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바람 좋고, 공기도 좋았다.
새파란 하늘, 구름, 햇살 하나하나가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평소라면 불쾌했을 것들이 오늘은 그저 맑게 느껴졌다.
“어이, 청년. 사과 먹을래?”
중년의 남자가 붉게 잘 익은 사과하나를 혁필에게 던졌다.
평소라면 용사님이라 소리쳤을 건데, 펜던트의 효과가 진짜인 모양이다.
괜스레 실소가 터졌다.
“고맙소.”
그리고 그들의 말투를 따라했다.
아삭. 아삭.
사과의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히 채우며 밀려들어왔다.
“맛 좋네.”
2025.10.13 23:50
2025.10.08 10:00
2025.10.06 22:43
2025.10.03 22:08
2025.09.27 02:13
재미있게잘봤어요
25.10.15

작가님 왜 삭제된 댓글이 이렇게 많아요...?
25.10.04
삭제된 댓글입니다.
25.10.03
수정
삭제된 댓글입니다.
25.10.03
수정
삭제된 댓글입니다.
25.10.03
수정

안녕하세요. 작가님. 재밌게 잘 봤어요. 계속 연재해 주세요~
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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