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죽은 형의 아들을 데려다 홀로 키우던 이하림. 어느 날 싱글대디를 대상으로 한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는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학창 시절, 괴롭힘당하던 자신을 외면한 소꿉친구 배유찬을 만나게 된다. “네가 살려냈잖아! 책임져! 내 인생 책임지라고!”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과 다르게 가슴이 요동친다. 잠잠했던 웅덩이에 파문이 일고… 바닷가에 서 있던 둘은 묵혀두었던 오해를 푸는데. “우리 그만하자 제발….” 애원하는 배유찬을 뒤로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이로 되돌아가려 한다. 매사에 여유를 보이던 배유찬이 눈에 띄게 불안해하면서 자신의 곁에 붙어있던 건 그날로부터였다.
―[새로운 사랑을 쟁취하라, 메리 어게인! 이하림씨는 지원한 동기가 어떻게 되실까요?]
잎새조차 움트지 않았던 초봄이었다. 차창 너머 즐비한 나무들이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해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렌즈를 향해 느릿하게 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아이에게 아빠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겠네요.]
―[아이를 위해서요?]
[네, 아시다시피 제가 IT 기업 회장이다 보니 바쁘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군요.]
―[어머, 아이가 외로웠겠어요.]
[네, 어느 날 밤 아이가 잠결에 말하더군요. 아빠 어딨느냐고, 보고 싶다고… 말이죠. 하, 역시 아직 돌아가신 아빠가 그리운 거죠. 게다가 저도 제대로 못 챙기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됐어요. 가족 구성원이 늘면 아이의 외로움이 그나마 덜어질까 해서요.]
착잡한 마음을 드러내듯 양손을 마주 잡고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슬그머니 훔쳐본 카메라 렌즈에는 아이에게 잘 해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는 한 아버지가 담겨있었다. 힘없이 추욱 늘어진 어깨와 바닥으로 떨군 시선 그리고 깊은 한숨까지.
단막극에 선 배우처럼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꼭 단란한 가정을 이루셨으면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하림씨는 조카를 입양해 키우고 있다고 했죠?]
[네, 형이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다온이가 혼자 남겨졌거든요.]
굽이치는 적발과 주근깨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MC로 보이던 그녀는 흠칫 놀라고서는 급히 입을 가렸다. 그녀의 얼굴엔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사정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하림씨는… 그러면 다른 출연진들과 달리 재혼이 아니라 결혼이 목표가 되겠네요.]
[아무래도요.]
―[앞으로 ‘메리 어게인’에서 보여줄 하림씨의 모습이 기대되는데요! 아, 혹시 하림씨는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을까요?]
순진무구한 질문이 이토록 잔인할 수가 있다니. 갈수록 짙어져 가는 그리움이 감당하기 힘들어서, 차마 잊히지 않는 한 사람을 머릿속에서 지우고자 애쓰던 때가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길게 침음하던 나는 오래 방치해두어 먼지가 쌓인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히 언제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아마 내가 열 한 살 즈음이었을 적이었다.
‘뷰우우웅신, 그것도 모르냐? 네 엄마는 널 싫어하니까 안 오는 거야!’
학부모 참관 수업 날이었다. 철딱서니 없었던 또래 아이들은 자기과시로 똘똘 뭉쳐 있었고 본인을 눈부시게 해줄 수 있는 약자를 찾아 서성였다. 그래, 단지 그 이유에서였다.
스포트라이트를 오롯이 그들에게 비추기 위해 내 마음이 당연하다는 듯 짓밟힌 건.
‘이 새끼 눈깔 봐라, 야. 눈 제대로 떠.’
성격이 유독 드셌던 탓에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했던 나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딱히 서글프거나 씁쓸하진 않았다. 단지, 가슴 언저리가 시렸을 뿐.
녀석은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면서 내 턱주가리를 움켜쥐었다.
‘눈. 제대로 뜨라고.’
그의 페로몬이 사납게 일렁였다. 바위로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과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따가운 감각.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성 오메가였던 난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그를 쏘아다 볼 수 있었다.
불씨는 사그라들긴커녕 점점 번져갔다. 처음에 관심 가졌던 아이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고 얼굴에서 조바심이 묻어나던 그는 급기야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잔잔했던 웅덩이에 파문이 인 건.
‘야! 왜 가만히 있냐? 멍청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요란스럽게 등장한 그 애는 정말 우스웠다.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강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나를 대변했으니까.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그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편,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 애 이름이 배유찬이라는 것을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좌석 배치도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아, 눈가에 뭐 들어갔나 봐…. 으, 하림아, 여기, 여기 좀 봐줘.’
숨쉬기 버거웠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초등학생 시절만 하더라도 나보다 작았던 그는 어느덧 열다섯 살이 되어 훌쩍 커버렸다. 시선이 두 뼘 높아 고개를 들어올려야 할 정도였다.
그의 옆자리였던 나는 상체를 기울여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2025.10.1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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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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