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달빛이 쏟아지는 밤. 궁궐의 깊은 후원 한 켠.
붉은 단청이 은은히 빛나는 팔각정 위로 곧추선 기와마다 이슬이 떨어져 반짝였다. 줄지어 선 등롱이 연못 위에 비쳐 마치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듯하였다.
향로에선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악공들의 손끝에서 가야금과 단소 소리가 울렸으며 북소리가 잔잔히 전각을 가득 메웠다.
경성 대군이 비단 단령을 단정히 하고, 옥으로 장식된 술잔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도열하여 앉은 대신들과 귀족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곧, 모두의 시선은 무대 한가운데로 향했다. 붉은 비단 치마를 흩날리며 도화가 등장했다. 달빛에 비치는 얼굴은 검정 저고리와 대비되어 무척이나 하얗고 청아했다.
그 자태가 드러난 순간, 술렁이던 소리가 그치고 전각은 고요에 잠겼다.
도화의 팔 끝이 휘둘릴 때마다 은 노리개가 옥구슬 부딪히듯 맑은 소리를 냈다. 고운 머리를 쪽 지은 채, 천천히 옮기는 발끝의 움직임은 그림처럼 완벽했으며, 마치 선녀와도 같아, 보는 이마다 숨을 죽였다.
허나 그 평온은 금세 무너졌다.
땅이 울리며 하늘이 갈라졌다. 술잔이 흔들려 엎어지고, 등롱의 불빛이 꺼졌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속에 균열이 번개처럼 번졌고, 푸른 섬광이 튀며 검은 구름이 치솟았다.
“이 무슨 변고더냐!”
“하늘이, 하늘이 열렸도다!”
대신들이 술렁거리고 궐을 지키던 무사들마저 얼어붙었다.
틈 속에서 기괴한 짐승들이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형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흉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피비린내가 금세 궐을 뒤덮고, 울부짖는 괴성이 궐을 가득 메웠다. 곧 사람들이 비명이 겹쳐, 궁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도화의 눈빛이 달라졌다. 머리에 꽂힌 비녀를 뽑아 들고,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 괴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려하게 장식한 기생 도화가 아닌, 수많은 던전을 누빈 헌터 차 원이 비로소 나타나는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
콰직―
차원이 던전의 핵을 부쉈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 나갔고 쏟아지는 마나에 던전 내부가 흔들렸다. 동시에 던전 안은 마치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몬스터들은 먼지처럼 사라졌고, 흩뿌려졌던 핏자국이 지워졌다. 피범벅이 된 검을 정리하던 찰나, 눈앞에 푸른 시스템 창이 떴다.
[던전 클리어 완료]
- 이름: 북촌 불길의 균열
- 등급: S급
-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 진행률: 100%
- 참가자: 차 원 외 3명
- 보상: 지급 대기 중…
차원의 뒤로 팀원을 치료하던 힐러 윤슬아가 다가왔다.
“팀장님, 치료 완료됐습니다. 문이 곧 닫힐 텐데, 어서 나가시죠.”
슬아의 말에 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검집을 정리했다. 팀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슬아와 원만 남아 있었다. 원은 이상한 미시감에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팀장님, 차원 팀장님?… 언니!”
슬아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발을 뗐다. 슬아가 던전 밖으로 나가고, 원도 따라나서려는 순간,
딸그락―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원의 걸음이 멈추고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은색의 링 귀걸이 한 짝이 반짝이고 있었다. 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이게 언제 빠졌지.”
왼쪽 귀에 다시 귀걸이를 착용한 그 순간.
쿠구구궁―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와 크게 흔들리는 던전 내부. 고개를 들자, 던전의 문이 닫히고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떴다.
[!에러; 던전 발생!]
- 이름: 북촌 불길의 균열
- 등급: EX급
- 위치: ■■■ ■■
- 진행률: 0%
- 참가자: 차 원
- 보상: 본■■■■로■■■■■
“…씨발”
구라까지마… 이미 클리어된 던전이 재발생하는 것부터 희박한 확률인데, 게다가 EX급? 들어본 적도 없는 등급이다. 에러는 또 뭔데…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이 몬스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급하게 길드에 연락하려 했지만, 귀에 꽂힌 통신기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기계 잡음조차도, 아예 작동조차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눈앞에 쏟아지는 몬스터들이었다. 기존 던전의 몬스터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달랐다. 속도도 힘도 한층 더 진화된 모습이었다.
콰아앙―
묵직한 굉음과 함께 바닥이 들썩거렸다. 마치 불사조를 연상케 하는 몬스터 하나가 돌진해 왔다.
“하. 진짜 미치겠네.”
검에 화염 저항 마법을 두르고 단숨에 몬스터를 베어냈다. 생각보다 쉬웠다. EX급이라 긴장했는데 별거 아니네? 그런 안일한 생각도 잠시, 몬스터들이 무리 지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베고 찌르고 몬스터들을 처치하기도 잠시, 바닥난 마력과 체력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길드원들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걸음이 더뎌졌고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팔다리엔 힘이 빠져갔고 마력이 고갈되는 게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와 정신을 붙잡으며 안식처를 찾아 헤맸다.
“찾았다….”
지반의 얕은 함몰 구역, 피비린내와 여러 마나가 섞여 몬스터들이 탐지하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통신기를 만져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단은 내 몸을 회복하는 게 먼저였다.
“상태 창.”
[상태 창 – 차 원]
이름: 차 원
등급: SS+
소속: 길드 [무영] / 팀장
직업: 다중 계열 전투자 (올라운더)
HP: 11% [위험]
MP: 23% [경고]
[경고 – 능력치 심각 소모 감지]
※ 상태 이상
[피로 Lv. 2] – 지속 회복량 50% 감소
[출혈 Lv. 1] – 10초마다 HP 1% 감소
[집중력 저하] – 스킬 시전 시간 증가
(자세히 보기)
경악스러운 수치다. 헌터 생활 동안 본 적 없는 수치들. 아무리 빡센 던전이었어도 이 정도로 에너지가 소모된 적은 없었다. 막막했다. 일단은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자잘한 상처를 치료하고 비상용 포션을 들이부었다. 비싼 값을 하는지 빠르게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회복이 완료되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이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부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EX 급 던전이라니, 학계에 보도 되면 어떤 반응일지. 시스템 창에 에러가 뜬 것도 처음이다. 또 클리어된 던전이 다시 열린 경우는 희박한 확률로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런 경우 보통 같은 등급이나 한두 단계 낮은 등급으로 열린다고 알고 있었다. 이거 돌아가면 연구원들에게 한 소리해야겠다.
그럼, 일단 클리어해야겠지.
“시스템, 던전 정보 띄워줘”
[던전 정보]
- 이름: 북촌 불길의 균열
- 등급: EX 급
- 위치: ■■■ ■■
- 진행률: 3.1%
- 참가자: 차 원
- 보상: 본■■■■로■■■■■
!에러: 알 수 없는 오류!
알 수 없는 오류? 오류라고? 믿기지 않는 현실에 깨진 글자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황당함에 얼빠진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럴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2025.09.2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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