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은 눈 너머로 밝은 빛이 느껴졌다.
스르륵.
천천히 눈을 뜨자 나를 반겨준 건 새하얀 건물이었다.
벽이고 천장이고 바닥이고 전부 하얀색인, 말 그대로 새하얗게 뒤덮인……
아니. 정정하겠다.
온통 새하얀 공간은 아니었다.
크고 작은 불길들이 여기저기에 퍼져 하얀 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보니 쓰러진 사람들도 보였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불길들과 쓰러진 사람들은 이 새하얀 건물에 굉장히 이질적인…….
나 뭐래니.
‘하…. 하하.’
눈 뜨니 불타는 새하얀 건물에 사람들이 쓰러져있는 이 상황은 대체….
“후….”
생각하자. 생각해…….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며 가만히 벙쪄 있으면 나만 손해다.
일단… 움직이자.
내가 왜 여기에 있고, 여긴 어디이며, 왜 불타고 있는 것인지와 같은 의문이 들었지만 이런 생각을 계속해봤자 득이 되는 건 없기에 일단 접어두고 움직였다.
어찌 되었든 살려면 움직여야 하니까.
출구를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더 있는지도.
불길을 피해가며 주변을 살펴보니 기계같이 생긴 것들과 알 수 없는 이상한 것들을 발견했다. 나오라는 출구는 안 보이고.
잠깐만, 기계?
‘그러고 보니 아까 사람들이 그걸 입고 있었지?’
기계를 발견하고 생각난 것이 있어 고개를 돌려 쓰러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눈에 담았다.
불에 그을려 살짝 색이 바래진 가운.
하지만 원래의 색을 완전히 잃지 않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 건물과 같은 하얀색.
그래, 사람들이 입고 있는 가운은 흰 가운이었다.
그러니까……. 연구원들이 입을 법한.
대충 예상이 간다.
다시 출구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데, 멀리 시야의 끝에 쓰러진 사람들 속에 조그마한 인영이 눈에 띄었다.
눈을 좁혀 더 자세히 보니 주저앉아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몇 살일까. 한 다섯 살 정도일까.
멀어서 정확하지 않지만 그쯤 되어보인다.
‘아이가 왜 이런 곳에…….’
설마 하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러한 기분도 사치다.
찜찜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아이에게 다가가려 몸을 움직였다.
후두둑.
그때, 위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떨어졌다.
건물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더 생각하지 않고 다리에 박차를 가해 아이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는 자리마다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 사람들은…….’
안 된다. 이런 감상에 빠지면.
쓰러진 사람들을 애써 지나치며, 아이에게로 달렸다.
아이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 때, 아이의 뒤로 문이 보였다.
출구다.
드디어 희망이 보인다.
“얘! 얼른 뒤로 뛰어!”
나는 다급하게 아이에게 소리쳤다.
저기로 나가기만 하면 그래도 안전할 것이다.
‘……?’
뭐지?
이 정도 거리에서 못 들을 리가 없는데.
아이는 내 소리를 못 들은 것인지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그대로 굳어서 그저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다.
고개를 돌려 살짝 보니 건물에 간 금은 빠른 속도로 커져가고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그대로 굳어 있는 상태.
나는 이를 악물며 다리에 더욱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였다.
무사한 아이를 죽게 놔둘수는 없다.
내가 데리고 나가야 한다.
아이가 있는 곳까지 앞으로 10m 정도.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아이가 있는 곳에 도달한다.
빨리 가서 아이를 데리고 뛰면….
‘…이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내가 아이에게 도달하는 것보다 건물이 무너지는 것이 더 빨랐다.
삐이───
내가 아이에게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이 들어차고 시끄러운 이명이 귀를 때렸다.
그리고 사위가 돌며 시야가 암전됐다.
시야가 암전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가 트이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환하게 켜져있는 전등과 연한 민트색 벽지.
내 방의 천장이었다.
‘허억!’
갑자기 보인 내 방의 천장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이는 어떻게 된 거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밀려왔다.
어지러웠다.
여러 생각들로 어지러워진 내 머리는 제대로 일하지 못했다.
계속 이런 상태면 곤란하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찬물을 끼얹어 정신차려야겠다는 생각을 간신히 끄집어내서 몸을 이끌어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정신없는 상태로 어찌저찌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 앞으로 가서 얼른 찬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후우…….”
찬물을 끼얹으니 그나마 좀 살만했다.
생생한 감각이 조금 씻겨 나가고 쓸데없는 잡념도 어느정도 사라졌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질끈 묶었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빙자한 끼얹기-를 하고 나서야 제대로 일하기 시작한 내 머리는 금방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꿈.’
진짜 같은 생생함과 어지러움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머리로 바로 나오지 못한 결론.
‘꿈…인 거지. 그래.’
그렇게 강렬하고 생생한 꿈은 처음이다.
게다가 그 아이는….
조금만 생각해도 꿈속의 장면이 재생되고 생각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온통 새하얀 건물에 흰 가운을 입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 그 속에 혼자 주저앉아 있는 아이까지.
재생된 꿈은 다시 여러 생각들을 채워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2025.09.27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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