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소멸하기 싫어서 금기 어기고 탈출했더니 위대한 정령왕이었던 내가... 나약한 F급 인간의 몸에 빙의당했다.
나는 베타라 불리는 별세계의 정령왕이다.
신화나 전설로 불릴 정도로 매우 위대한 위치인 만큼 세계에서의 역할 또한 컸다.
물론 이제와선 다 쓸모없는 얘기다.
‘빌어먹을 마족 새끼들.’
어느날 마족이란 녀석들이 베타에 쳐들어오더니 순식간에 평화로운 세계를 무너뜨렸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세계의 신은 내 요청을 거절했고, 다른 정령왕들 또한 사태를 그저 방관했다.
그 탓에 고작 300년 만에 베타는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베타의 일부인 나와 다른 정령왕들 또한 소멸될 위기이고 말이다.
[제기랄.]
서서히 희미해져가는 육신을 보며 나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다른 녀석들을 설득해보고 힘으로 소멸에 저항도 해보았으나 결과는 실패.
‘정말 이대로 저 새끼들 손에 소멸해야 한다고?’
절대 안 해. 아니, 못해!
그럴 바엔 차라리 스스로 영혼을 찢어발기는 게 훨 나았다.
물론 신이 건 금제 때문에 자살은 불가했지만, 아무튼 그만큼 마족들 손에 소멸되긴 싫다는 거다.
‘정말 방법이 없나?’
소멸을 피하기 위해 내 공간에 틀어박힌 나는 여러 실험과 궁리를 거듭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절망하던 순간, 문득 한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머나먼 별세계 존재에게 소환되는 것!
‘베타인 외의 소환에 응하는 건 금기지만, 안 하면 소멸인데 금기가 뭐라고?’
육신은 이제 거의 절반이나 사라진 상태.
나는 곧장 날 소환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여전히 정령왕의 힘을 탐내는 마족 새끼들의 더러운 속삭임이 대부분이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원… 들…….
[! 찾았다!]
드물게 정순한 기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맑고 깨끗한 그 기운을 보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소환에 응했고.
육신이 완전히 바스라짐과 동시에 소환 마법에서 나온 밝은 빛이 남은 영혼을 감싸안았다.
‘빌어먹을 마족 새끼들아! 어디 내가 없는 베타 잘 굴려봐라!’
세계가 망하자마자 책임을 외면한 신. 내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동료 새끼들.
이게 바로 인간이 말하는 주마등이랑 걸까?
‘이젠 상관 없지.’
난 탈출에 성공했다. 마족의 손에 죽지 않았다!
비록 볼품없는 도주에 불과하나 아무도 내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이미 나는 최선을 다 했으니.
***
잠시 꺼졌던 의식이 돌아오자 닫힌 눈꺼풀 위로 눈부신 빛이 비춰지는 게 느껴졌다.
유희를 나갔을 때면 ‘불’이 항상 하던 장난과 비슷했기에 별 생각없이 눈을 떴다.
“으악!”
그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쨍한 통증에 눈을 다시 감았다.
‘눈이…… 이거 왜 이러냐.’
정령왕쯤되면 왠만해선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세계를 수호하는 존재인만큼 눈부심같은 건 첫 유희 때도 느낀 적 없는 감각이다.
소멸 중에 이동한 부작용인가?
당황하며 눈을 여러번 깜빡이자 얼마지나지 않아 뿌옇던 시야가 초점을 찾았다.
그렇게 본 주변 풍경은 정령왕인 내겐 너무 어처구니 없는 광경이었다.
‘여기도 전쟁 중인가…?’
나무로된 평평한 바닥 위로 끈적한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처음보는 물건이 정돈되지 않은 채 나뒹굴고 있었고, 깨진 거울에서 튄 유리조각이 피와 섞여 날카롭게 빛났다.
어디서 본다 한들 누군가가 거주하는 곳으론 보이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장소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에도 살려달라며 소환하는 놈도 있는데 이런 곳에서 소환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중요한 건.
‘그래서 날 소환한 녀석은 어디있는 거지?’
정령왕을 소환한다는 건 고작 마력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왕을 소환할 정도의 간절함. 그리고 정령과 교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연친화력.
물론 마지막으로 수많은 소원들을 제치고 내 눈에 띄어야 하긴 하지만, 이번 건은 경쟁자가 다 쓰레기였으니 넘어가고.
아무튼 그만큼 소환자체가 빡세기에 왠만해선 소환하자마자 쓰러져 있거나 의식이 있어도 마력고갈로 다 죽어가는 게 대부분이다.
‘날 소환하자마자 자리를 뜰 정도면 꽤 실력자겠는걸?’
그렇게나 강한 자가 날 소환하면서까지 빌고 싶은 소원이라…….
꽤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깨진 거울로 낯선 모습의 남자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가릴 정도로 덮수룩한 검은색 머리카락…… 아니, 자세히 보니 바깥쪽만 까맣고 안쪽은 염색이라도 한 듯 하얗다.
생기라곤 전혀 보이지 않은 까만 눈동자가 내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빤히 보고있자니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체격은 비슷할지 몰라도 마른 몸하며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연약한 피부하며 내 육신과 닮은 구석은 전혀 없는데…….
‘뭔가, 나랑 똑같이 움직인다?’
마치 내 모습을 비춰보는 것처럼…….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똑똑한 머리는 현실부정을 오래 끌지 않았다.
거울 속 남자가 나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미친!?”
그리고 입밖으로 나온 낯선 언어에 2차로 놀랐다.
“뭐, 머, 뭐야! 이게 뭔…… 아아, 아, 안녕? 안녕하세요? 씨발!”
분명 베타에서 쓰는 말로 인사했는데 밖으로 나온 말은 자연스럽게 낯선 언어로 번역되었다. 심지어 자주 쓰는 욕설도 바꿔서 나온다….
“대체 무슨…….”
정령왕으로서 누군가에 의해 소환된 기억만 대략 1만번 이후론 세지도 않았다.
그만큼 많은 소환을 겪어봤음에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다.
2025.09.27 07:15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