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연재 | 글링
북부대공의 딸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애교도 잘 부리던데. “엘루이즈, 화난 거니?” “대공녀님, 화나셨습니까?” 나는 하도 험상궂은 표정으로 다녀서 오히려 사람들이 내게 화 났냐고 물어온다. 사랑스러운 대공녀 캐릭터에 빙의한 줄도 모르고 학대당하며 살았다. 내 친부라는 북부대공이 죽기 직전의 나를 구해준 것도 놀라서 자빠질 판인데, 거기에 내가 빙의했다는 것까지 깨달아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문제를 만나버렸다. ‘성격이 아예 다른데?’ 성격, 입맛. 어느 하나 빙의한 원작 캐릭터와 똑같은 게 없다! “사탕 드시겠습니까?” '달다 못해 혀가 아려....' 내가 빙의한 캐릭터는 원래 사탕 마니아였는데, 나는 단것만 먹으면 인상이 더 험악해진다. 혹시나 내 성격 때문에 따돌림이라도 당할까, 아카데미에서는 조용히 지내려고 했는데.... “언니 멋있어요!” 오히려 말싸움 잘하는 만인의 언니가 되어 버렸다. ‘이게 맞아?’ 응, 맞아. 원작 캐릭터가 아무리 솜사탕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지만... 아빠에게 애교도 부리지 못하는 성격의 내가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말랑콩떡으로 살기는 이미 글렀으니까, 내 방식대로 살아야겠다. 그리고, 몇 년 후. ‘나쁘지 않은데?’ 그냥 내 성격대로 살았더니, 인생이 오히려 나아졌다. 문제 하나 빼고. “쿨럭!” 원작에서 이 몸뚱이는 열여덟 살에 명을 다할 예정이다. 미계약작 / 메일: cattiegreen@naver.com 표지 일러스트 : @Binishu_
“어, 음, 보통….”
“보통, 뭐?”
리안 메이필드가 말을 하다 말고 멋쩍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입 밖에 내도 될 말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눈 앞의 여인을 지긋이 바라봤다.
“로…맨스 소설을 보면....”
“소설?“
이제는 엘루이즈 리엘 에버렛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리안은 이대로 말끝을 얼버무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한창 감수성 풍부하던 어린 시절에 심심풀이로 읽었던 소설책 내용을 입 밖으로 내자니 괜스레 입술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다지 좋은 교훈이 있는 내용도 아니었고, 흔하디흔한 등장인물에 뻔한 전개로 흘러갔기 때문에 추천할 거리도 못 되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 자신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북부대공 아빠를 둔 딸은… 오히려 솜사탕 같더군요.”
리안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엘루이즈의 눈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래서, 나는? 어떤데?”
엘루이즈가 흥미롭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제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 섰다.
리안은 자신의 시시콜콜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굳이 반응한 엘루이즈가 의아스러웠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엘루이즈는 사춘기에 접어든 십대들이 주로 읽는 로맨스 소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는 장차 현 북부대공인 제 아버지를 따라 차기 북부대공이 될 예정이었고, 이에 따라 교육도 착실히 받아 가고 있었다.
‘북부대공이란 자리가 쉬운 자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뛰어난 검술은 기본이었고,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항상 최전방에 배치되었기에 전술에도 능해야 했다.
심지어 척박하고 건조한 북부 영지까지 관리해야 했으니 이건 웬만한 귀족들의 업무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루종일 교육을 받아도 모자랄 텐데... 그 와중에 로맨스 소설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다고.’
리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이에 엘루이즈가 불신의 눈빛을 보내며 제 눈을 치켜 떴다.
‘에버렛 대공에 관해서는 꼭 이런다니까.’
엘루이즈는 세심한 딸이었다. 제 아버지에 관해서라면 굉장히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굴었다.
만일 누군가 감히 겁도 없이 에버렛 대공을 모욕이라도 한다면 그날은 그 ‘누군가’의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
리안은 아무 말도 않고 엘루이즈의 푸른빛 눈동자를 향해 미소지었다.
대충 한 갈래로 묶어 내린 칠흑색 머리카락, 바다를 닮은 푸른빛 눈동자.
차기 북부대공답게 차가운 말투와 인상은 그녀만의 특별한 야성미를 더해 주었다.
팔꿈치 근처에는 끊임없는 검술 수련으로 인해 생겨난 크고 작은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여느 평범한 귀족 영애라면 가리는 데에만 급급했겠지만, 엘루이즈는 오히려 여봐란 듯이 당당하게 내놓고 다니곤 했다.
고대어로 ‘거친 바람’을 뜻하는 이름에 맞게 무척이나 날카롭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엘루이즈였다.
“푸흡.”
그때, 계속되는 어색한 침묵과 리안의 부담스러울 듯한 시선에 엘루이즈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왜 하다 마는 건 둘째치고... 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리안의 시선이 불쾌하기는커녕 웃기기만 한 모양이었다. 보기 드문 엘루이즈의 통쾌한 웃음소리에 리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
리안의 햇살과도 비슷한 황금빛 눈동자가 요리조리 움직이며 엘루이즈를 제 안에 담았다.
그녀는 평소에는 세상 다 산 것 같은 음울한 표정이다가도, 가끔씩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정말....’
따스한 햇살을 닮은 미소를 지을 때에야 제 나이대에 맞는 소녀의 면모가 불쑥 튀어나오는 그 순간이....
“아닙니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제국에서 냉철하기로 둘째 가면 서럽다는 북부대공이 내게 말했다.
“이걸로 눈알을 파 버려라.”
끝이 날카롭게 세공된 단검을 건네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 눈 앞의 북부대공을 바라봤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영혼마저도 팔았다는 북부대공, 카이덴 텔레시오 에버렛.
‘음….’
이토록 호화롭게 장식된 단검을 눈앞에 두는 것은 처음이었다.
단검 한가운데에는 대공의 붉은 눈동자를 닮은 루비가 박혀 있었는데, 대충 봐도 진품이었다.
여태껏 내가 봐 온 보석이라곤 로메니아 이모가 허구한날 떠돌이 보석상을 통해 구매하던 가짜보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한눈에 봐도 알아차릴 만큼 싼티가 나는 싸구려 재질이었지만, 로메니아 이모는 그것을 여봐란 듯이 착용하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유층의 느낌을 내고 싶었던 거겠지.
“저어,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내가 최대한 밝게 웃으며 넌지시 사양했다.
그러나, 에버렛 대공은 그 거절을 받아들일 생각은 개미 간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
“흠.”
그는 내가 그의 앞으로 쭉 밀어놓은 나무 상자를 한 번 흘끗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금 내게 단검을 내밀었다.
단검 위, 뾰족하게 세공된 루비 조각의 표면에 당장이라도 흐려질 것처럼 흩날리던 촛불 빛이 반사되어 오묘한 빛깔을 만들었다.
“…?”
나는 엉겁결에 그가 건넨 루비를 받아들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다이아몬드가 좋은 건가.”
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이아몬드가 옆동네 개 이름도 아닌데!
내 평생 구경조차 해 본 적 없는 보석인 데다, 그 ‘높으신’ 귀족들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광물이 바로 다이아몬드였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쉽게 말한다고?
“요즘 아이들은 루비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대공은 거기에 한 술 더 떴다.
“정 그렇다면… 다이아몬드도 가져 오지.”
“예?”
어이가 없다 못해 영혼이 육체를 떠나 버린 것만 같았다.
**
나는 평생을 이모의 학대 밑에서 살았다.
엄마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정작 그 친엄마는 내가 어릴 때 나를 이모에게 덜렁 맡겨 버리고 죽어 버렸다. 아니, 적어도 로메니아 이모는 내게 죽었다고 했다.
이따금 엄마가 나를 로메니아 이모에게서 구출해 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가 살아 있을 가능성도 희박하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나는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을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내가 엄마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내 첫 기억뿐이었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던 그 부드러운 손길, 자상한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만 흐릿하게 잔상이 남아 있었다.
“야, 너 이리 안 와?!”
로메니아 이모가 괴상하게 쉰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이모는 내 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내심 여동생이니까, 나를 잘 돌봐줄 거라고 바랐던 거겠지.‘
전부 다 착각이었다.
나는 왠지 측은한 기분이 들어 그대로 눈을 내리깔아 버렸다.
혈육의 집에 버리듯 맡겨진 어린아이가 늘 그렇듯이, 나는 하루 하루를 구박받고 학대받으며 살았다.
음식을 주지 않는 경우는 허다했고, 로메니아 이모는 당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내 어머니의 유품까지 팔아 버렸다.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맡겼다는 사실을 말도 안 되는 식으로 들먹거리면서.
이모는 늘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기분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좋다가도, 금방 저 아래로 꺼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디 작은 마을에서도 시도때도 없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배척받았고, 이 때문에 이모 집에 딸린 나조차도 마을 아이들에게 시도때도없이 돌을 맞았다.
그 뒤로 로메니아 이모는 출처도 명확하지 않은 이국의 술과 약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그날도 시작은 비슷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를 향해 되도 않는 말로 윽박지르는 이모를 피해 헛간에 숨었고, 숨을 죽이고 이모가 약기운에 취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가 갑자기 환각이라도 본 건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집 바로 옆 강가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모?”
몇 번이고 이모를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평소였다면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괴하게 비명을 질러 댔을 텐데 말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헛간 밖으로 나왔을 때, 내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악! 꺅!”
로메니아 이모가 그 깊은 강에서 홀로 헤엄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아니, 그런 건 헤엄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건 정말 턱 끝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위아래로 첨벙거리는 것이 다였으니까.
이모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아니, 물을 무서워해서 강이나 호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사고가 흘러가고 난 뒤, 나는 곧바로 강가를 향해 달려갔다.
로메니아 이모는 나를 싫어했고 곧잘 나를 때리며 막말을 퍼붓곤 했다.
2025.10.04 11:47
올라온 댓글이 없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뷰컴즈 주식회사
대표 : 김학성 | 전화 : 1811-8389 | 이메일 : help@gling.co.kr
사업자 등록번호 : 492-88-01088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22-서울영등포-1768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 171, 13층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