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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선 안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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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송이버섯🐱
1화무료 1화

자유 연재 | 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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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은아연 씨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둠 속에 나른하게 누워 있던 남자가 느리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은아연의 몸을 기어오르는 붉은 안광이 직설적이었다. 밤이 되면 미쳐버리는 이 남자, 바로 풍산 가의 후계자 차도혁 대표를 간병 하는 일. 아연이 제안받은 3억짜리 아르바이트였다. 스물여서이 되고 보니 아연은 낭떠러지 위에 서 있었다. 위험해 보이는 아르바이트. 하지만 넝마 같은 인생이 한 번 더 굴러떨어진다고 크게 달라질까. 이게 하늘에서 떨어진 동아줄이 될지, 또 모르는 일이라고 자위했다. ‘못 나갈 거거든, 여기서.’ 보안 상의 이유로 요구한 100 일간의 감금 합숙도. 그의 낮고 부드러운 경멸도, 다 참을 만했는데……! “네, 잘, 할 수 있어요. 끝까지…….” 아연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다 끝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생각 잘하고 말해, 약속 못 지키면 은아연 씨 죽어.” 그의 진짜 정체를 목격해 버린 순간, 아연의 본능이 경고등을 울렸다. 당장 여기서 도망치라고 - 남자주인공 : 차도혁 / 34세, 풍산그룹 대표이사 / #상처남 #나쁜남자 #집착남 사람을 홀리는 얼굴, 완벽하고 미려한 외모와 달리, 감정이 없고 잔인한 일 처리로 생사를 함께하는 부하 직원들까지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암흑가에서 자란 그는 임무에 실패해 본 적 없다. 일이든 사람이든 완벽하게 손안에 넣고 통제하는 것으로 행복과 만족감을 느낀다. 친부를 죽이고 자신을 괴롭히던 의붓아버지 조태진과 자기애적 성격 장애를 가진 친모 때문에 생긴 어린 시절의 상처는 강한 트라우마로 남았고 현재까지도 수면장애를 앓고 산다. 호시탐탐 자신을 제거하려는 조태진에게 복수하기 위해 강한 어른이 되어 자신이 경멸하던 가문 풍산 가의 후계를 잇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인간 병기로 만들어 간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풍산 가의 외손자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후로, 타고난 리더의 기지와 능력으로 막강한 후계자가 된다. 살아남고자 하는 살기 어린 의지로 잘 버텨온 그의 발목을 잡는 한 가지, 몽유병이 최근의 유일한 문제. 우연히 만나게 된 은아연이 발작을 잠재운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간병인으로 들이지만, 그녀가 조태진의 미끼일 것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그녀를 경계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더불어 친모에 대한 부정적 감정 때문에, 한눈에 든 그녀를 경멸한다. 여주 : 은아연/ 나이 26세, 동물 구조보호소 직원, 온갖 아르바이트 / #햇살여주 #상처녀 #다정녀 은아연은 이른 나이에 소녀가장이 되어버렸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가 다른 남자와 동거하면서 아연의 삶은 구덩이가 된다. 엄마가 동거남 전재철의 이름으로 돈을 빌려 도망친 후, 열여덟 살 때부터 1년 365일 제대로 자고 먹지도 못하고 막노동에 가까운 아르바이트를 하며 불행한 삶을 책임지고 있다.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워 전재철의 폭력과 전재철의 처와 자식의 행패를 참고 견디면서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었던 건 길고양이나 길에서 만난 강아지였고 후에 유기 동물센터에서 동물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게 된다. 하루하루 희망이 없던 어느 날 밤. 아파트 뒷산에서 한 남자를 만난 후 급물살을 탄 듯 아연의 삶이 바뀐다. 빌런 : 조태진 /차도혁의 의붓아버지(차도혁은 친부의 성을 따름) / 58세, 풍산 그룹 부회장 / #교활 #탐욕 #암흑가 자기애적 성격 장애를 앓고 있는 이인애를 이용해 도혁의 친부를 죽이고 풍산 가의 사위가 되려던 계획은 성공했으나, 풍산 그룹 회장 이순철이 인정하는 후계자는 어린 외손자 도혁뿐이었으므로, 이인애와 결혼을 하려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계약과 함께 정관 수술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풍산 가의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복수심과 질투심으로 이 회장과 차도혁을 제거하고 풍산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001.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아연이 허름한 장미 아파트 뒷산을 오른 건 유명 국회의원 집으로 입양이 결정된 녀석의 산책을 위해서였다.

이제 녀석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늦은 시간이었지만 녀석이 좋아하는 뒷산의 산책로를 택했다.

저먼 셰퍼드와 골든 리트리버의 믹스견인 셰리는 태어나자마자 야산에 버려졌고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구조되어 아연이 일하는 유기견 센터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게 5개월 전, 아연은 자그마한 입으로 숨을 불어 넣고 부서질 것 같은 가슴을 압박하며 한 시간가량의 사투 끝에 기어이 살려냈다.

후로 한 달을 녀석 옆에서 먹고 자며 간호했다. 녀석은 아연이 제 엄마인 줄 안다.

건강하게 자란 셰리의 사연이 홍보 영상으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선에 도전하는 국회의원이 찾아왔다. 수행원들을 잔뜩 달고서.

카메라 앞에서 거금을 기부한 의원은 카메라가 꺼지자, 옷을 탈탈 털어대며 셰리를 다시 아연의 손에 건넸다. 그것만 봐도 박 의원이라는 작자는 애견인은 아니었다.

후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속내가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박 의원은 아연을 콕 집어 셰리의 산책을 부탁했다.

 

그래도 부잣집으로 가니 좋은 것 먹고 좋은 환경에서 실컷 뛰어놀기는 할 테니 셰리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여기까지 와버렸네.”

 

노란 털이 승천한 귀를 바짝 세워 아연을 향해 고개를 실룩이는 셰리. 웃음이 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산책로를 벗어난 지 한 참이었다.

이슥한 밤이었다. 익숙한 산책로라 해도 밤의 산은 위험하다.

발길을 돌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어? 왜 그래, 셰리!”

 

리드줄을 놓쳐버린 아연이 소리쳤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숲으로 튀어 가버린 녀석을 쫓아 숲으로 들어선 아연은 셰리를 발견하고 안도한 것도 잠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셰……!”

 

달빛을 받은 하얀 나무 아래 뭔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두 팔로 연신 땅을 파헤치며.

 

“헉.”

 

사람인가.

그 짓에 열중하느라 지척에 사람이 서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소름 돋는 장면에 아연은 숨을 들이마신 채 멈추었다.

시커먼 산과 대비되는 하얀 인영, 괴이한 팔동작.

그 구체적인 시각적 충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연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깊은 밤, 산 중에서.

잠옷 차림에 맨발인 남자가 나무 밑을 파헤치고 있다면!

그건 필시 불길한 사고의 예고편이 될 터였다.

 

가령, 저건 미친놈이고 미친놈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일이고….

 

생사는 의지와 무관하다지만, 이렇게 허무한 종말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적어도 여기서 허망한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셰리, 이리 와….”

 

불행 중 다행일까,

잔혹한 견주가 망쳐 놓은 목젖 때문에 짖지 못하는 셰리를 아연이 조심스럽게 불러들였다.

그러나 녀석은 저만치 서서 혀를 내밀고 아연을 보며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빨리 저 재밌는 것을 보러 가자고 조르는 것이었다.

아연은 재차 신호를 주었다. 목소리는 거의 죽인 채.

셰리는 사람보다 잘 들으니 이 작은 소리에도 분명 반응하리라.

 

“셰리, 그렇지, 옳지, 셰……!”

 

영특한 셰리는 기특하게도 아연의 절실함에 반응했다.

뒤에 있는 흥미로운 것을 포기하고 이내 아연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아!”

 

아연의 목소리에 반응한 건 셰리뿐만이 아니었다.

 

아연이 낸 미세한 소리에 그 미친놈이 동작을 멈추었고 뒤를 돌아봤다.

순간 5미터 남짓의 거리가 무색하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하게 맞물렸다.

 

“……!”

 

그리고, 남자가 몸을 일으켜 다가오기 시작했다.

큰 보폭은 느린 듯 빨랐다.


“셰리 뛰어!”

 

아연은 그대로 내달렸다.

그러나 늘 운이 없던 아연은 몇 발 딛지도 못하고 그만 돌을 밟고 넘어지고 말았다.

 

“윽!”

 

발목이 심하게 꺾여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재빨리 몸을 돌려 다가오는 남자를 확인했다.

부옇게 일렁이는 시야에 거대한 남자가 차곡차곡 거리를 좁혀 오는 게 보였다.

 

아연은 잡히는 대로 흙과 풀을 던졌다.

그러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시 제게 뿌려지는 것이 태반이었다.

마침내, 그가 다다라 우두커니 섰다.

마구 발버둥 치던 낡고 하얀 운동화 앞에서였다.

 

그때, 소슬한 바람이 스치자,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의 하얀 얼굴이 이마까지 드러났다.

 

“!”

 

더럽게 잘 생겼네.

인물이 아깝다는 말, 어른들이 제게 동정이나 진심을 섞어 아무렇게나 던지던 말은 그에게도 어울렸다.

아연은 와중에 그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한차례 봄밤의 서늘한 숲 냄새가 차디찬 바람에 섞여 밀려왔다.

 

적요. 밤새소리. 비현실적인 순간들이 아연의 감각을 잠식해 버렸다.

그러나 얼어붙은 아연의 눈앞에 거대한 남자만은 또렷이 보였다.

예리한 각을 지닌 갸름한 얼굴, 언뜻 소년 같으나 그에 비해 어깨는 위협적일 만큼 크고 단단해서 그 이질감이 뚜렷했다.

꼭, 비단옷을 입은 신화 속 반인반수가 저러할까!

 

기어이 남자의 텅 빈 동공이 발화하며 손을 뻗는 순간.

 

바스락,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들렸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아연의 시선 끝에 어른거리는 인영이 보였지만.

그게 아연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아연은 평소보다 일찍 유기견 센터로 출근했다.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려는 의지였다. 그런데.


“말도 안 돼!”

 

소장님이 켜 놓은 TV에서 한창 이슈였던 풍산그룹 승계 문제를 보도하는 뉴스가 재생되고 있었다.

분명 저와는 어떤 접점도 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방금, 한 교점을 발견했다.

 

“저건.”

 

어젯밤 그 짐승 같던 남자였다.

뉴스에서는 그를 풍산그룹 차도혁 대표라 일컬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래, 어떻게 이럴 수가, 같은 남자로 태어나서, 어떻게 점마는 저렇게 생겨 먹고 나는 이렇게 생겨 먹은 건데. 젊은 나이에 회사까지 물려받고.”

 

쯧, 소리를 내며 민 소장이 화면 속 남자의 재력과 외모를 부러워하는 동안 아연은 머리가 텅 비어 갔다.

삽시간에 지난밤의 일이 뺨을 할퀴는 듯했다.

 

어젯밤.

살겠다고 버둥대는 저를 영혼이 빠진 얼굴로 빤히 내려다보던 남자, 그의 동공이 유독 붉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경계심 없이 묵묵히 곁을 지키던 셰리가 갑자기 낑낑거렸고.

녀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간 시선 끝에 랜턴을 비추며 다가오는 남자들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그렇게 그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자신도 영상 속 저 남자도.

 

“와, 차도혁이! 하루만 차도혁으로 살아보고 싶노…. 맞제, 은아연.”

 

저건, 사람이 아니거든요.

평범하게 살더라도 사람처럼 살아야죠.

아연은 화면 속 남자를 쏘아봤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잘 맞는 감빛 슈트를 입고 인파에 둘러싸여 검은 세단에 오르는 매끈한 남자.

그러나 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과는 더는 얽히는 일 없어야 한다.

마치 그가 살다가 언제고 만날 수 있는 세계의 사람이라도 되는 듯.

아연은 저도 모르게 그런 각오를 다졌다.

누가 봐도 우스운 착각이겠지만 아연은 그 착각의 근거를 제 바지 주머니 위로 더듬었다.

[아웃소싱 퍼펙트 한노진 실장]

 

‘대표님 먼저 모셔.’

 

그래, 그가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정신을 놓았던 아연이 깨어났을 때는, 낯선 차 안이었다.

흙투성이 몸을 깨끗한 가죽 안장에 늘어트린 채.

 

‘오늘 일은, 없는 일입니다. 더 궁금해하지도 마시고. 그게 그쪽 신상에는 좋을 겁니다.’

 

경고와 함께 한노진이라는 사람이 내민 명함이 아연의 손끝을 찔렀다.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소장님의 무감한 인사에 유기견들이 일제히 짖어댔다.

출입문을 본 순간, 아연은 그대로 굳었다.

한노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경찰과 함께.

 

***

 

“사례요?”

 

아연은 몸을 사리듯 되물었다.

사례를 하고 싶다는 핑계로 경찰까지 동원한 남자의 말은 협박처럼 들렸다.

동행한 경찰은 소장과 친분이 두터운 최 경사였다.

평소 아연을 아꼈던 그는 사례금 이야기에 당사자보다 더 신이 나 있었다.

한노진은 그 옆에서 제 주인의 힘을 과시하듯 여유로운 시선으로 아연을 보고 있었다.

너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덤덤한 눈빛이었다.


“우리 은아연 양, 아주 훌륭한 청년입니다! 아연아, 뭐 해. 어서! 아연아, 알지? 풍산! 풍산에서 나오셨대……!”

 

뒤에 말은 워낙 속닥대서 그녀만 알아들었다.

최 경사는 자꾸만 아연을 풍산 사람을 향해 몰아갔다. 속도 모르고.

 

궁지에 몰린 쥐가 되자, 아연은 오히려 평온해졌다.

호랑이 굴에 떨어져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런데 저는 정신을 잃고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나!

 

아연은 기어이 정중하게 손을 내미는 한노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검은 밴에 몸을 실었다.


002.

 

“대표님이, 사례하고 싶어 하십니다.”

 

짙게 선팅된 밴의 내부.

한노진을 직시하며 아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꾸만 빙빙 도는 대화였다.

 

“전 그냥 도망치려다 넘어졌을 뿐이고요.”

 

“네.”

 

“그건. 아니 그 사람은 넘어져서 버둥거리는 날 그냥 구경만 했구요.”

 

“네에.”

 

“하. 그러니까 그게 다고, 제가 사례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어요. 제가 신고를 한 것도 아니고, 그쪽이 그 사람을 찾아냈잖아요!”

 

차도혁 대표의 비서라는 한노진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례금, 안 받겠습니다.”

 

그의 안경 속 눈동자가 짐짓 가라앉았다.

 

“쉬울 줄 알았는데.”

 

줄곧 예의를 지키던 그의 혼잣말에 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여기서 말씀드려야겠네요. 사실 은아연 씨께 제안하려고 왔습니다. 원래는 대표님과 하셔야 할 이야기인데.”

 

“제안이요?”

 

미심쩍은 말에 아연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네. 대표님의 간병을 맡아주실 수 있을까 하고요.”

 

“간병이요?”

 

점입가경이었다.

아픈 개를 봐달라는 것도 아니고 차도혁 대표를 간병해 달라는 말에 아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표님은 사실 수면 장애를 앓고 계십니다. 몽유병이라고 하죠.”

 

“…….”

 

몽유병이라니,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그의 말을 믿어도 될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문득 어젯밤 차도혁의 텅 빈 눈동자와 건조한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영혼이 없는 아름다운 조각상.

잠옷에 잔뜩 묻은 흙, 신을 신지 않은 피투성이 발.

괴이쩍은 그 모든 것이 몽유병이라는 단어 하나에 완성된 퍼즐처럼 명확해졌다.

 

“저희는 은아연 씨가 가진 어떤 조건이 대표님의 증세에 도움이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치의와도 이야기해 봤고. 아마 높은 확률로 맞을 겁니다.”

 

“제가요? 왜…요?”

 

남자가 이어 붙인 상관관계에 아연은 불길함을 느꼈다.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남의 사정이었다. 거기에 왜 자신을 갖다 붙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연 씨를 만난 후로, 대표님의 발작 증상이 멈췄어요. 어떤 약으로도 고치지 못했던 증상이고요.”

 

“우, 우연이겠죠!”

 

아연의 말에 한노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표정에 어떤 확신이 보였다.

“아니요. 조용히 침실로 가셔서 다시 깊이 잠든 건 어젯밤이 유일했습니다. 심지어 숙면하셨고요.”

 

사기꾼 같은 남자를 그저 바라보며 아연은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최고의 의료진이 관리하고 있지만 나아지질 않습니다. 대표님, 지금 매우 중요한 시기라.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그렇다 해도. 제 사정은 아니에요. 죄송해요.”

아연의 말에 노진의 온화한 표정이 굳었다.

 

“은아연 씨 사정이 될 수 있습니다.”

 

“네? 무슨.”

 

아연은 퍼뜩 한노진을 향해 숙였던 시선을 들었다.

이제, 협박을 할 모양이었다.

 

“당신은 이제 다시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너무 많은 걸 보고 알아버렸으니까요.”

 

아연실색한 그녀의 입술이 헤벌어졌다. 겁을 먹은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대표님은 풍산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고 지금 풍산 그룹은 대표님의 지휘하에 국내외적으로 아주 기밀하고 주요한 국가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대표님의 사소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게 되죠.”

 

“하….”

 

기밀, 국가사업, 주요….

그런 단어의 압박에 아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막다른 곳에 몰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는 기분을 느끼는 아연 앞에 한노진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협박을 이렇게 정중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할 수 있다니.

차도혁 대표처럼 그도 이상한 사람 같았다.

***

 

반은 협박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은 아연 자신도 정리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몽유병을 앓는 남자, 그가 보냈다는 간병 제안서.

그리고 5천만 원.

이 계약을 하면 유기견 센터 월급과 야간 아르바이트로 벌 수 있는 연봉과 맞먹는 금액을 받게 된다. 그것도 단 100일 만에.

 

‘어차피 간병인의 소양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표님의 더 나은 수면을 위해서 은아연 씨를 고용하는 거니까요.’

책임까지 묻지 않는 돈.

5천만 원은 어쩌면 차도혁에겐 소액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제안하는 거니까.

그리고 아연 저에게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숨통을 조이는 최 사장의 사채 원금을 갚을 수 있는 절실한 돈이고.

선택은 명확했다.

그런 계산을 하는 자신이 불쌍하고 또 싫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한다면 이건 기회였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차는 조용히 출발했고, 곧 아연의 눈에는 안대가 씌워졌다.

그리고 한노진은 가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차도혁.

얼굴도 모르던 사람, 이름보다 친숙한 풍산 가의 셰퍼드라는 별명.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던 세계.

 

‘거긴 그냥 재벌이 아니고 조직 기업이었다잖아. 그래서 재벌보다 돈도 훨씬 더 많고 정보기관보다 더 쥐도 새도 모르게 일하기로 유명하다던데.’

 

민상훈 소장과 건너 상가 사장들의 식후 잡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가십이었다.

 

소위 ‘찌라시’라 불리는 전문 가십 매체에 따르면,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정계에 군림하는 존재들이 따로 있다고.

그리고 풍산은 그들의 뒷배고 실세라고 했던가.

총알만 만들어 수출하던 하청 업체가 차도혁 때문에 번지르르해졌다고.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연에게, 풍산은.

 

그때, 차가 정차했다.

 

“도착했습니다. 여기 잡으시죠.”

 

아연은 더듬더듬, 한노진이 내민 팔목을 잡았다.

 

 

***

 

“이쪽입니다.”

 

부축을 받다시피 해서 들어선 실내는 은은한 나무 향이 배어 있었다.

시각이 차단되니 목덜미를 스치는 온기의 변화에도 몸은 쉽게 움츠러들었다.

한노진이 그녀의 뒤로 받쳐준 의자에 막 앉았을 때였다.

문 여는 소리가 났고.

 

“오셨습니까.”

 

한노진이 차도혁일 남자에게 인사했다.

나무 바닥을 쓸며 여유롭게 다가오던 그의 발소리가 두꺼운 카펫 위를 밟아 올랐다.

아연은 그의 동선을 읽으려 온 신경을 세웠다.

이윽고 다가선 남자에게서 짙은 숲 향이 퍼져 나왔다.

어제 그였다.

 

“하.”

 

남자의 힘 빠진 웃음소리에 조소가 선연했다.

그리고는, 맞은편 소파에 툭, 몸을 내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버하지 말라고 했지. 벗겨.”

“예.”

 

중저음의 좋은 목소리라 조금 놀랐다.

한노진이 안대의 매듭을 풀자, 아연의 눈동자로 은은한 채광이 들어찼다.

 

그리고 시야에 저를 직시하고 있는 차도혁이 보였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구나.’

 

어두운 가죽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긴 다리를 교차해 앉아 있는 그는 공간의 어둑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마치 정지된 장면 속에 박제된 아름다운 짐승 같았다.

감상하는 사람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눈동자와 이빨을 가진.

 

깔끔하게 넘긴 머리.

하얀 얼굴 위에 미려한 생김은 오래 시선을 둘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느슨하게 흘러내리는 검은 셔츠와 슬랙스 차림에 매끈한 가죽 슬리퍼.

어딘가 나른해 보여 어젯밤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위압적인 어깨와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숨통이 조이는 기분은 어젯밤과 매한가지였지만.

 

아연의 멍한 시선이 날렵하게 솟은 콧날을 지나 그와 마주친 순간.

차도혁이 예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구경 잘했습니까? 재미는 있었나 모르겠네.”

 

“네?”

 

아연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오래 시선을 두었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이름이.”

 

“네. 은, 은아연입니다.”

 

아연이 고개를 주억거려 인사하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연을 빠르게 훑었다.

높은 창을 지나온 봄볕이 그의 담갈색 눈동자 위를 지나고 있었다. 유독 붉은 눈동자였다.

그가 턱짓을 하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노진이 파일에 고정된 계약서를 아연 앞으로 내밀었다.

 

“대강의 이야기는 내 비서를 통해 들었을 거고, 계약은 100일, 업무는 수면 중 발작 증상을 할 수 있는 만큼 통제하는 겁니다. 완벽한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할 수도 없을 거고.”

 

도혁은 바로 계약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스스로 말해 본 적 없는, 오랜 시간 우위에 선 사람 특유의 속도였다.

자신의 몽유병에 대해 언급하는 그는 다소 권태로워 보였다.

감정을 뺀 일이라는 투였다.

 

“수당은 그쪽의 갱생.”

 

“네? 갱…생이라니요?”

 

그의 말에 아연은 잊고 있던 계약서로 시선을 내렸다.

계약금에 동그라미를 한참 센 후에야 얕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3이요? 5천이라고 들었는데요.”

“잘 들으셔야지. 수당이라고 했는데.”

 

한노진이 계약금입니다, 라고 또박또박 찍어 말했던 게 이제야 인지되었다.

 

“왜 그런 금액을…….”

 

“딱 3억이던데. 뭐 더 있습니까?”

 

도혁이 눈살을 구기며 아연의 뒤로 시선을 건넸다.

한노진이 담백한 목소리로 그녀가 떠안은 부채를 줄줄 읊는 동안.

차도혁은 다시 아연에게 시선을 꽂은 채, 고개를 좌우로 꺾어 목 근육을 풀었다.

 

“그래도 간병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간병 말고 뭔가. 그러니까….”

 

아연이 자신이 아는 한, 상상해 낼 수 있는 모든 악덕을 떠올려 나열하려 할 때였다.

 

“못 나갈 거거든. 여기서.”

 

 

003

 

아연은 제 귀를 의심했다.

한 낮인데도 어둑한 실내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가 낮게 뇌까린 목소리 등골이 오싹했다.

풍산 가의 가십을 비웃었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했다.

동굴 속 웅크린 짐승의 본성을 엿본 듯 이제야 여러 생각으로 번잡했던 아연의 정신에 번쩍 빛이 들었다.

 

“못 나간다니요. 그게 무슨!”

 

“말 그대로. 이 바닥은 비밀 유지가 중요한 곳이라.”

 

차도혁 대표가 맡고 있는 방산 계열사 ‘PS 넥스페이스’는 매 분기 영업익 5조를 돌파하는 기업이었다.

핵심 기술을 다루는 부서의 직원들은 의례 강도 높은 보안 체계를 숙지하고 계약한다.

그런 직원들의 개인 사찰, 때에 따라서는 위치 추적, 도청 감시조차 당연시되는 영역이었다.

때로 국가 간 산업 스파이에 대한 간첩죄까지 운운하는 것만 봐도 이쪽 세계의 기밀 유지가 얼마나 엄정한 것인지를 알 수 있으니까.

그러니, 풍산 그룹 대표 이사의 사생활에 깊이 관여하는 직원의 감금 합숙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했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넋 놓고 나름은 친절하게 자신을 설명하는 남자를 보며 바보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차도혁 대표가 언급한 단어나 숫자는 거대한 빙산 같은데 그의 기조는 무미건조해서 그 갭에서 오는 자잘한 충격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럼에도 그의 설명은 회사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아연도 조직 사회의 순리를 능히 이해하게 했다.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계약서 작성은 한 실장과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저…….”

 

시간을 확인하며 일어나려던 그가 아연에게 시선을 꽂았다.

 

“뭐, 더 이해 시켜드려야 할 게 남았나?”

 

성마른 목소리였다.

그의 본성을 엿본 듯한 순간이었다.

계약서 사이 그와 자신의 상황은 이해했지만.

문제는 이 사람이었다.

풍산 가의 쉐퍼드, 풍산 가의 이빨, 누굴 물어뜯을지 모를 풍산 가의 실세.

차도혁 그 자체가 미심쩍고 무서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미는 거액은 필시 그녀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갈 게 뻔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거절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죄송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머릿속을 떠도는 말을 정리하느라 잠시 숨을 고르는데.

 

“돈 때문, 아닙니까?”

 

경멸이었다.

고고한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비친 감정을 아연이 모를 수 없었다.

수없이 당해왔던 업신여김.

순간, 아연은 가슴 언저리에서 통증을 느꼈다.

첫 대면에 그가 간단하게 안겨준 모멸감이 기폭제가 된 듯.

수년간 먼지처럼 쌓였던 수치심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네, 맞아요. 얼마라도 더 벌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방금요.”

 

아연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힘을 주며 그를 똑바로 봤다.

그가 눈썹만 치켜올려 물끄러미, 아연의 시선을 받았다.

 

“왜지?”

 

무감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말한 그 돈 때문에요!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너무 큰 액수는 어딘가 수상해서요.”

 

그가 팍 숨을 트며, 알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 하…. 그러니까 지금.”

 

그가 웃음을 지우지 않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혀끝을 천천히 굴려 입 속살을 쓸며 뭔가 생각하는 모양이 어쩐지 색정적이었다.

그때 흘러내린 커프스 위로 드러난 그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유독 불거진 손목뼈와 힘줄 위에는 문신이 있었다.

마구 해댄 낙서 같았다.

역시, 그는.

일반적인 기업 후계자는 아닌 것 같았다.

판단은 더 확고해졌다.

 

“그래서.”

 

“…죄송해요. 안 하겠습니다.”

 

거절당한 건 그였는데.

제 기분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스스로도 명명할 수 없는 감정에 속이 쓰렸다.

뭐가 됐든, 1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럽시다, 그럼. 없던 일로.”

 

쉽고 담백한 결정.

허탈감에 아연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차도혁이 예의적인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세우자,

그의 홍채가 더 자세히 보였다.

마치 누군가 찍어 놓은 붉은 문양 같았다.

오랜 잔상을 남길 장면이었다. 간간이 수치감도 함께 떠오를 테지.

 

아연이 단숨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입단속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러니 제발 저 감시 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연이 차도혁을 향해 허리를 숙이자,

 

“하…!”

 

느슨하게 묶어두었던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그의 잇새에서 실소가 터진 건 그래서였을까.

 

 

아연은 저택을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

한참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빽빽한 일상을 구경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느라, 괜히 버스비를 더 들였고 체력도 훨씬 소모했다.

무엇보다 겪지 않아도 될 모멸감을 느껴야 했고.

 

아연은 우연이라도 다시 그를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끊임없이 했다.

 

***

 

“왜? 그걸 왜 안 받아!”

 

“제가 좀 정직하잖아요.”

 

오늘 오전에 구조된 요크셔테리어의 케이지를 정리하며 아연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은아연, 니는 그냥 쫄보라서 그런 기다.”

“치.”

“그런 데선 기백은 사례금으로 주려고 했을 텐데. 니 배에 미국산 소고기라도 채워 넣을 수 있었을거 아이가. 쯧, 니 거울 좀 봐라. 핼갑다 못해 투명해질라 칸다.”

 

어디 기백뿐일까요.

아연은 힘없이 웃었다.

요크의 케이지 안에 이불과 물을 채워준 아연이 손을 털며 뒤돌자,

 

“짜잔! 그래도. 은아연! 스물네 번째 생일을 심하게 축합니데이!”

“어…?”

 

오늘이 아연의 생일이었다.

아연의 눈망울에 티 없이 뽀얀 생크림 케이크가 맺혔다.

숫자 초의 알록달록한 빛이 물기 위에서 반짝였다.

 

“오늘은 내가 니 배에 기름칠해 줄 끼다. 얼른 정리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 애들도 오기로 했다. 민수도.”

“민수가요? 다신 안 볼 줄 알았는데.”

“오래 버텼지. 지민수가 은아연이를 이틀이나 안 봤으면. 어, 양반은 못 된다이, 점마.”

 

출입문을 확인한 아연의 얼굴에 하얀 미소가 번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된 후로 7년째 죽고 못 사는, 그야말로 가족이나 다름없는 애들이었다.

벌써 떠들썩하게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는 친구들을 보자, 아연의 코끝이 시큰거렸다.

하필 오늘 차도혁이 기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든, 내일 누구의 독촉을 받게 되든.

오늘만은 소중한 사람들과 웃고 싶었다.

3월의 해거름이 센터의 마당으로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어쩐지 노곤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 취해도 될 터였다.

 

***

 

은아연이 저택을 나서 구지 시로 가는 버스를 탔다는 보고를 받은 후, 도혁은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여 충직한 부하를 봤다.

 

“죄송합니다.”

 

노진이 곧장 시선을 돌리며 몸을 곧추세웠다.

그의 탓을 하려던 건 아닌데.

도혁이 담배를 입술에 끼우자, 노진이 곧바로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도혁이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로 시선을 기울였다.

 

“연초, 끊으셨던 거 아닙니까?”

 

“그랬지.”

 

나름은 성공적인 금연이었다. 오늘 그 여자를 확인하기 전까진.

처음부터 탐탁지 않았던 결정이었다.

 

무슨, 입주 간병을.

어젯밤 부하직원이 핸드폰으로 급하게 찍은 기록용 영상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믿지도 않았을 이야기였고.

그럼에도 그 제안에 수긍한 건, 조태진의 사람이 저택 안에 들어와 있다는 일출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도혁이 가장 믿고 쓰는 스파이였다.

일출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부쩍 노골적으로 파고드는 모양새가 조만간 거사를 치를 모양새였다.

 

그러니 이 지랄 같은 몽유병은.

한 번도 계부에게 고개 숙인 적 없는 도혁의 취약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여자를 들이기로 했지만.

실제로 확인하니 가관이었다.

 

“누가 잡아먹나.”

 

눈을 가린 채 앉아 바짝 긴장한 여자를 봤을 때, 처음엔 헛웃음이 났다.

누군가 미끼를 쓴다면, 딱 이런 여자여야 할 거다.

그녀의 낡고 하얀 운동화처럼, 고된 생활을 버텨낸 투명한 몸은 새것처럼 깨끗할 터였다.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그녀가 발산하는 경계심이 마음에 들었다.

허술한 놈들은 그의 반경 안에 눈에 뜨이는 얼굴에 완벽한 몸을 가진 여자를 지뢰처럼 깔아 두지만, 지능범은 다르지.

죽이고 싶은 의붓아들의 입맛부터 취향까지 누구보다 잘 꿰고 있는 조태진이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두고 보면 될 일이고.

 

3억이었다.

덥석 물지 않는 걸 보니 꽤 심지가 강한 여자였다.

애라고 해야 하나….

 

“고집도 세고.”

 

관심이 없다가도. 다 잡았다 놓친 표적은, 확실히 도혁을 고양되게 하는 흥밋거리이긴 했다.

도혁이 마지막 한 입을 깊이 빨고서 담배를 비벼 껐다.

 

“그래서. 마킹은.”

 

“길상이를 붙였습니다.”

 

감각도 좋고 순간 판단도 좋은 녀석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폐부 깊이 가두었던 연기를 길게 뱉어내고는.

노진을 올려다보는 도혁의 얼굴에 희열이 번뜩였다.

 

“직접 할 거야.”

 

004

 

노진은 도혁의 지시가 끝났는데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혁이 은색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끌 때까지도.

 

“왜. 더 할 말 있습니까?”

 

“그야. 직접 가시는 건…. 시기도 좋지 않고,”

 

그러게.

조태진에게 제 목줄을 쥐여줄 빌미가 될 짓인데, 굳이 왜 하려고 하는지.

그러나 도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아연에게서 느꼈던 색다른 감정을.

세정제에 여러 번 씻어낸 손끝에 남은 피비린내처럼 그 여자는 꽤 제 신경을 자극했다.

 

살아남느라 타고난 예쁜 몸뚱어리 하나 치장하지 못했을 여자의 무구한 표정과 생활의 향.

그 흔한 바디 제품도 쓰지 못할 정도인지.

인위적인 향 하나 묻지 않은 여린 색의 피부, 거기에서 산발적으로 뿜어내던 감미로운 살냄새.

탈색된 듯 옅은 눈동자에 어린 적개심.

이미 함몰된 손톱을 깔짝깔짝 긁어대면서도 굽힐 마음이 없는 자존심.

꽤 흥미로운 피사체였다.

 

여자에 대해서는 가끔 루틴처럼 욕구를 해소할 상대의 기준이 있을 뿐, 관념 따윈 두지 않는 성미인데.

 

함부로 유혹에 손을 뻗지 않는 건 좋은데, 저의 호감과 선의를 쉽게 매도 하는 여자라….

아무래도 은아연은.

조금, 꺾고 길들여보고 싶은 유의 여자였다.

게다가 그 단잠.

그건 깨나 여운이 강한 것이어서….

 

그러니까, 꼭 한 번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대표님 얼굴을 그 여자가 이미 압니다.”

 

이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한 도혁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어, 알아보라고. 조금, 압박하고 싶어졌거든.”

 

입꼬리만 올려 느슨하게 웃는 도혁은 즐거워 보였다.

한노진은 어차피 자신이 그를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요.”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도혁의 붉은 동공이 탁하게 열려 있었다. 나른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노진은 그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격투를 즐기는 그가 강한 상대를 마주했을 때 짓던 미소, 자신의 카운터가 상대의 턱에 제대로 먹혔을 때의 희열, 약한 상대가 요리조리 빠져나갈 때의 갈증…….

저 나른하고 매혹적인 미소의 베이스가 바로 그것들이 뒤섞인 흥분이라는 것을, 오래 도혁을 봐온 노진 만은 쉬이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 즐거움을 왜 그 여자한테서 느끼냐고.

노진이 목례하고서 서재를 나섰다.

 

도혁은 잠복에 알맞은 복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며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재밌겠네.”

 

드레스룸으로 들어선 도혁이 셔츠를 벗어 내리자 잘 다듬어진 상체가 드러났다.

화사한 조명을 굴절시킨 다각의 근육 덩어리들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나저나. 이건.”

 

뒤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른 광배과 견갑골을 가득 메운 문신.

호랑이와 용이 뒤엉켜 있는 위압적이고 화려한 그림이었다.

 

“놀라게 하고 싶진 않은데.”

 

검은 티셔츠를 머리로 끼워 넣으며 도혁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꿈을 꾸는 틈에 그녀가 보게 될지 모를 광경이었다.

분명, 겁을 먹으면서도 쓰레기 보듯 하겠지.

이 일을 못 하겠네, 또 고집을 피울 테고.

 

“이제 와서 지울 수도 없고.”

 

스무 살이 되던 해 외조부의 권유로 새긴 문신이었다. 풍산 가 적통의 상징이며 동시에 증명이었다.

현 회장인 조부 이순철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차도혁을 상징하는 날아오를 듯한 용을 끌어안고 있는 형세.

엄위와 흉포가 뒤엉킨 채 적나라하게 시선을 마주해오는 짐승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게 했다.

이럴 땐, 자신이 인정하는 유일한 가족인 이순철 회장도 원망스러워진다.

 

“영감님.”

 

사람이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 호랑이 같은 강성은 이제 추억을 곱씹을 때나 떠오르는 술상의 안주가 되었다.

그러니, 조태진 같은 하이에나가 가문을 헤집도록 놔두는 게 아닌가.

 

씁쓸한 웃음을 지운 도혁은 검은 볼캡과 검은 점퍼를 덮쳐 입고 드레스룸을 나섰다.

 

***

 

소고기로 든든히 배를 채운 뒤 아연과 친구들은 성수동의 번화한 거리에 자리한 칵테일 바로 자리를 옮겼다.

 

“아연아, 생일 축하해!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어, 그럴 거야! 고마워 주은아. 고마워, 너희들도. 소장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소장님, 성격 알잖아. 경보 업체에서 괜찮다고 했는데 굳이.”

 

민 소장 센터의 홍보 영상 제작을 맡아 해주는 진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민 소장은 센터의 경보장치가 울려서 식당에서 먼저 계산하고 돌아갔다.

소고기 몇 점 입에 넣지 못하고서.

 

“후으…….”

 

평소 달갑지 않던 알코올의 씁쓸한 맛도, 오늘은 달았다.

애들의 수다를 안주 삼아 아연이 두 잔째의 칵테일을 비웠다.

 

“왜 이렇게 급하게 마셔. 은아연, 무슨 일 있어?”

 

아연은 턱을 괴고 무언갈 생각했다. 평소와 다른 일이 있긴 했지만 어쩐지 비뚤어지고 싶은 오늘의 기분을 설명할 단어는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 잘생긴 미친 남자의 얼굴이 점점이 떠오르다 말다 하긴 했다.

 

“……일은 무슨. 근데 이상해, 술이 왜 이렇게 맛있어? 비싼 칵테일이라 그런가. 지민수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고. 고마워.”

 

“무슨. 그런 생각 말고 그냥 마셔. 생일이잖아!”

 

“그럴까?”

 

민수는 아연의 처연한 미소를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내렸다.

부끄러운 상념 탓이었다.

 

이틀 전, 민수는 아연의 엄마가 진 사채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아연 앞에 3천만 원을 내밀었다.

그걸 아연이 받을 거라고, 심지어는 기뻐할 거라고 기대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참에 아연이 포기하길 바랐다. 저의 도움 없이 버티는 삶을.

친구로라도 좋으니 제게 기대길 바랐다.

그러나 그날은 결벽적으로 제게 선을 긋는 아연을 한 번 더 확인했을 뿐이었다.

속이 타는 민수가 칵테일을 단번에 삼키고 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멀리서 강하게 끌리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눈에 띄는 남자였다.

이곳과 잘 어울리면서도 어쩐지 이질적인 무리.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수려한 남자였다.

짐짓 아연에게 흑심을 품은 수컷이리라 짐작한 민수가 눈살을 찌푸리자,

꼿꼿한 시선의 남자는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눈을 피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오랜만의 술자리가 아쉬웠지만 이제 파해야 할 시간이었다.

드라이브 겸 민수의 차로 집집을 돌자고 대리를 부르라며 주은과 진규과 떠들어 댔다. 민수는 못 이긴 척 핸드폰을 들었다. 애들의 모습이 두 겹이 되었다가 세 겹이 되었다.

 

“얘들아, 나 화장실 좀, 술 깨고 가야겠어.”

 

조금 비틀거리며 파우더룸에 도착한 아연은 찬물에 얼굴을 헹구고 종이 타올 한 장을 뜯어 얼굴을 닦았다.

 

“하…….”

 

이곳은 화장실조차 고급스러웠다.

이질적인 조명 아래 서 있으니, 우습게도 차도혁 대표의 저택이 떠올랐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저택, 그곳에 산수화처럼 잘 어울리던 차도혁.

그 전체가 미지의 세상 같았다.

 

3억,

사실은 너무나 붙잡고 싶은 기회였다.

 

‘돈 때문 아닙니까?’

 

그깟 경멸이 어때서.

수없이 마주하던 순간의 감정일 뿐인데.

 

‘우리 민수는 안 돼. 아연아. 아줌마는 딸 같은 널 잃고 싶지 않아.’

 

자신을 아줌마라 낮추어 부르지만.

지체 높은 사모님은 딸 같다는 말로 간편하게 선을 그어 주시곤 했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은아연.”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집 경매 일자, 6개월 남짓한 전재철의 수감 기간, 그리고 엄마가 떠안긴 사채, 그걸 핑계로 호시탐탐 저를 탐내는 최 사장…….

 

이 모든 것이 쓰나미가 되어 아연을 휩쓸 것이었다.

모든 예견된 재난이 그렇듯, 그걸 안다 해도 대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 쓰셨어요?”

 

화장실로 들어온 젊은 여자 세 명이 아연의 앞으로 비집고 들며 물었다.

이미 저를 밀치고 거울 앞에 선 다음이었다.

 

“아, 네. 쓰세요.”

 

거울 속으로 힐끔거리는 여자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화장실 출입문을 향해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그 남자, 봤어? 대박.”

 

“우리 대각선 자리에 있던 키 큰 남자? 어깨 넓고, 싹 다 까만 옷?”

 

“어어. 모자에 마스크까지 써서, 연예인인 줄. 그렇게 생겨서 가리고 있으니까 더 튀던데!”

 

화장을 고치느라 여념이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육중한 유리문을 밀려던 아연의 손이 멈칫했다.

그 여자들이 떠든 남자의 인상착의 때문이었다.

 

“손목이랑 목에 문신도 너무 섹시하더라….”

 

순간의 기시감에 아연의 목덜미에 소름이 올랐다.

 

“야, 이따 전번 따볼까? 우리도 셋, 거기도 셋인데.”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웃는 여자들의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설마….”

 

차도혁.

그가 미행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어설픈 불안이 엄습했다. 마구 심장이 뛰었다.

그때 아연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소장님의 문자였다.

사진과 함께.

 

[은아연, CCTV에 잡힌 남잔데. 미친놈인 듯. 은아연 니는 당분간 당직 없다. 일단 신고는 해 놨다.]

 

흐릿한 화면에 잡힌 남자를 본 순간, 아연은 핸드폰을 놓치고 말았다.

화면을 향해 얼굴을 치들고 웃고 있는 사람은,

차도혁, 그 남자였다.

 

 

005

아연은 도망치듯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미행하지 말아 주시라 단호하게 말했는데.

정확히는 허리까지 숙여가며 한 비굴한 부탁이었지만.

 

“나 같은 여자는 무시하면 그뿐이겠지.”

 

아연은 다시금 핸드폰 속 사진을 들여다봤다.

 

사각지대를 찾아 움직여야 마땅한 침입자가 빤히 천정에 달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 온전히 열린 눈동자는 정말이지 짐승의 것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지금 그와 눈을 마주친 것처럼 뺨이 소슬했다.

 

소장님과의 통화에 따르면 화면 속 남자는 굳이 실내까지 들어오지도 않았으며 바깥 출입문의 도어락 넘버 패드만 조작하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일부러 자신이 여기 왔던 것을 들키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제로 오늘 저녁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역시, 재벌가 라느니 암흑가 라느니 하는 사람들에게 남의 진심 따위가 대수일까.

차도혁 그도 권력으로 사람 겁이나 주고 우위에 서려는 본능을 가진 인간 부류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엘 발을 들였으니!

아연은 섣불리 차도혁을 만난 것을 후회했다.

 

아연은 막막한 심정으로 차도혁이 찍힌 사진을 꼼꼼히 살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뚫어져라 보면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그러다 문득 화면에 멈추어 있는 시간대를 봤다.

아연이 식당에서 갈빗살을 입으로 집어넣느라 정신없을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배나 채우던 그 시간에, 이 남자는 아연의 동선을 쫓아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잔인무도한 사냥꾼이 덫에 걸린 사냥감을 찾아가듯…!

 

어쩌면 그때도.

 

‘어어. 모자에 마스크까지 써서, 연예인인 줄. 그렇게 생겨서 가리고 있으니까 더 튀던데!’

 

머리를 때리듯 화장실에서 떠들던 여자들의 말이 떠올랐다.

 

‘손목이랑 목에 문신도 너무 섹시하더라…….’

 

확실히, 그 남자는 차도혁일 게 분명해졌다.

그렇다는 건, 이 버스에도, 집 근처에도?

너무 늦게 알아챈 것 같아 아연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마주 뜯으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이내 내린 결론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내일 다시 한노진에게 전화해 더 정중하게 부탁해야겠다.

아연은 버스에서 내려서도 뛰다시피 걸었다.

그녀가 사는 장미 아파트는 구지 시에서도 가장 외곽에 있는 30년이 넘은 대단지 주공아파트였다.

그리고 단지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가동 1층이었다.

평소에도 어두워진 후에는 인적이 드물어 무서운 길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아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수였다.

 

-잘 들어갔는지 걱정돼서. 데려다준다니까.

 

“됐어. 너도 취했잖아. 방향도 완전 반대인데. 미안해서 안 돼.”

 

아연은 더는 틈을 주지 않으려고 더 예의를 차렸다.

이에 민수는 포기하듯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너 들어가면 끊을게. 그러다 넘어져. 천천히 가.

 

민수의 통화 음성만으로도 든든함을 느꼈다. 그러나 아연은 끝끝내 표현하지 않았다.

“나, 이제 들어가. 끊을게. 잘 자라.”

 

아연은 이어지려는 민수의 대답을 외면하고 먼저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101호의 녹슨 철문을 열었다.

 

늘 해오던 것처럼 있지도 않은 엄마를 부르며 좁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러면 아빠가 계실 때처럼 포만감 이는 밥 냄새와 부모의 웃음이 재생될 것만 같았다.

성냥불이 꺼지면 사라져 버릴, 소녀의 꿈처럼.

 

***

 

“별…….”

 

나지막한 조소가 컴컴한 캐딜락 내부를 울렸다.

두터운 차 유리창 너머로 아연을 눈에 담던 도혁이 이어폰을 거둬내며 입매를 올렸다.

 

“대표님, 알아보라고 하신 거….”

 

한노진이 애써 무감한 표정을 유지하며 뒷자리에 앉은 도혁에게 태블릿 패드를 넘겼다.

 

“전재철.”

 

“네. 은아연의 모친 박희주와 사실혼 관계입니다. 동거한 지는 7년 정도 되었고. 그만그만하던 가계가 흔들린 건 그쯤부터입니다. 도박에 끌어다 쓴 사채를 박희주와 은아연이 갚고 있습니다.”

 

노진은 룸미러에 비친 도혁의 표정을 확인하며 미리 숙지한 아연의 상황을 읊었다.

 

“사실상 박희주는 은아연이 고2가 되던 해에 집을 나가서 은아연 혼자 빚을 갚고 있고, 돈을 갚는다기보다는 몸으로 때웠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에 도혁의 오른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 그런 쪽이 아니라 다른 쪽입니다. 최 사장이 따로 꾸리는 업소 일을 해주거나 술자리에 끌려가 맞거나. 미성년자였던 은아연으로선 그래도 꽤 잘 버틴 거 같습니다. 멍투성이로 학교도 꼬박꼬박 다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친구와 고3 때 담임, 센터 소장이 유일한 인간관계입니다.”

 

도혁은 번잡한 술집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 대던 친구들 사이에서 연신 말없이 웃기만 하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취하니 더 말이 없어지는 여자였다. 깊이 잠겨 우울한 눈망울. 그냥 있으면 꼭 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처연한 눈동자였다.

프로필을 뒤적일수록 마뜩잖은 쓴맛만 남았다.

이왕이면 단맛이면 좋겠는데….

 

“엄마라는 여자는.”

 

“국내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3년 전 일본을 거쳐 필리핀으로 들어간 흔적은 있는데 어디로 섞여 들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고요. 장미 아파트에서 유명했다고 합니다. 도화살 낀 여자라고. 성인이 된 뒤로 은아연이 물류센터 야간 알바까지 뛰고 있습니다.”

 

“까칠한 이유가 있었네.”

 

도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리 선명하지 못한 CCTV 캡처 영상에 몇 겹의 옷을 입어 두 배는 부풀어 보이는 은아연을 보며 콧웃음을 쳤다. 덥수룩한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썼지만 도혁은 도리어 선명한 하얀 얼굴에 실소가 터졌다.

 

“왜 이러고 다니는 거지.”

“그게, 남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몇 차례 성희롱 등 껄끄럽지 못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밑에 뭐 달린 것들이 뇌까지 비어 있으면 흔히 있는 일, 아시잖아요.”

 

그가 사견을 섞자, 도혁이 불긋한 삼백안이 흉하게 치떴다. 이에 노진은 입술을 합 다물며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빠른 속도로 다음 건을 읽어 내려갔다.

 

“전재철이 은아연에게 꽤 오래, 자주 손을 댔습니다. 아, 이 역시 다른 쪽으로요.”

 

“…….”

 

상사의 이질적인 분위기에 노진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을 단어를 선택하느라 진땀이 났다.

“정형외과 진료 기록도 뒤에 보시면 있습니다. 골절, 타박상, 찰과상 등, 보험금을 노린 점도 의심됩니다.”

 

한노진이 보고하는 동안 내부는 무거운 숨소리만 가득했다. 낮은 욕설이 들린 것도 같았다.

 

“전채철은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 관리로 1년 전 기소되었고 지금 서울 구치소에 수감 되어 있습니다. 9월 초에 출소 예정입니다.”

 

“관리자라고, 이게?”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은, 양아치도 못 되는 전재철 같은 인간이 손댈 사이즈가 아니었다.

도혁이 담갈색 동공만 치떠 한노진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잘못된 정보가 아니냐는 핀잔이 따가웠다.

 

“도박 빚을 까주는 조건으로 총책 대타 뛴 거 같습니다.”

 

불법 도박 조직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뿌리까지 도려내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런 꼬리 자르기 때문이었다.

이내 시선을 내려 태블릿 패드의 화면을 직시하는 그의 얼굴에서 다시 표정이 사라졌다.

 

자정이 넘어서면서 도혁의 피로감은 눈에 띄게 선명해졌다.

 

“괜찮으십니까, 상길이 있으니 이만 돌아가시죠.”

 

돌아간 들, 당장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므로, 도혁은 심란했다.

역시, 그 여자를 옆에 두는 편이….

 

도혁은 깊이 눈을 감고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툭 기댔다.

태블릿 패드 화면에 떠 있는 전재철의 사진 위로, 핏줄이 불거진 기다란 손가락이 느리게 리듬을 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찰음이 뚝 그쳤다.

도혁은 감았던 눈을 느른하게 떠 은아연이 방금 켰을 노란 조명이 새어 나오는 창문을 봤다.

 

“전재철, 출소 좀 당기면 좋겠는데. 이번 주 안으로.”

 

“그럼….”

 

“이 계약이 간절해지게, 잘 세팅해 보세요. 한 실장님이.”

 

“네. 대표님.”

 

의심할 만한 접촉은 없었고 주변인의 서류 또한 깔끔했다.

조태진 쪽의 움직임도 없었고.

 

“아, 상길이는 끝까지 붙여 놓으시고.”

 

보호장치는 마련해 주는 게 매너겠지.

 

그나저나, 저 어린놈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연이 집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차에서 나온 지민수는 아연의 방 창문 아래에 서서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갔다.

 

“질척대는 일 없게. 깨끗하게 정리해서 내 방에 데려다 놓으세요.”

 

도혁이 뇌까렸다.

노진은 대번에 그의 비위가 상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네.”

 

평소에도 이변으로 인해 일을 망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였다.

그렇다 해도 여자 하나를 계약에 묶기 위해 이토록 예민하게 신경을 세우는 도혁은 매우 낯설었다.

 

“철수합시다. 피곤하네.”

 

***

 

주말

아연은 집 안 구석구석 꼼꼼히 쓸고 닦았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의 행복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곧 집은 경매로 남의 집이 될 터였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하루처럼, 이 집과 작별하고 싶었다.

나고 자라, 24년을 살았던 집은 낡고 누추해도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자신의 역사 전체가 사라질 현장에서, 아연은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으로 잘 마른 세탁물을 캐리어에 담았다.

다음 거처가 될 유기견 센터로 갈 짐이었다. 삶에서 점점 유기되어 가는 자신의 처지에 딱 맞는 곳인 것 같아 쓴웃음이 났다.

 

아연이 짐을 옮기려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뭔가에 문이 걸려 열리지 않았다.

그때 바깥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아?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어? 고생하고 온 사람 보는 눈깔이 왜 그 모양이야? 초장부터 재수 없게.”

 

전재철이 현관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섰다.

 

“어떻게…!”

 

전재철의 출소일은 아직 6개월이나 남았는데.

아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006.

 

 

출소가 앞당겨졌기 때문인지 전재철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짙은 향수 냄새까지 풍기는 그는 가만히 보니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사우나까지 들렀다 오는 길인 듯했다.

 

가지고 온 여행 가방을 툭 내려놓은 전재철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 지퍼 사이로 돈뭉치를 꺼냈다.

 

또 사채를 썼구나.

아연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5만 원권 몇 장이 전재철의 손에 들려 아연 앞으로 내밀어졌다.

“뭔데요.”

 

“이걸로 뭐 좀 먹고 옷도 사고 미용실 가서 싹 다듬고 와. 진주 약속 잡아 놨으니까. 남자 얘기도 좀 듣고.”

 

“!”

 

진주는 전재철이 관리하던 주점의 실장이었다.

 

그 여자를 붙여줬다는 건.

 

“최 사장이 너 예쁘게 본 모양이더라. 하기는 생긴 게 네년 재능이긴 하지.”

 

전재철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

 

’잘 커라. 너 팔아서 빚가리 해야 하니까.’

 

더 이상 허언이 아닌가 보다.

 

 

“싫어요!”

 

아연은 소스라치며 전재철의 손을 밀쳤다. 그 바람에 지폐가 촤르륵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년이.”

 

전재철의 팔이 쳐들렸다.

 

폭력에 길든 몸이 자동으로 옹송그려졌다.

 

그러나 전재철은 이번에도 그녀를 때리지 않았다.

“아연아, 은아연! 박희주 빚 갚아야지. 플러스! 내 발모가지 값! 모녀가 쌍으로 개념이 없어.”

 

박희주가 미래 금융에서 사채를 쓰고 도망친 게 5년 전 일이었다.

 

최 사장 밑에 있던 전재철은 박희주의 동거남이라는 이유로 최 사장에게 끌려가 아킬레스건을 잘리는 수모를 당했고.

그날부터 전재철은 은아연을 때리고 착취했다.

엄마가 빌린 원금 3천만 원은 갚고도 남았지만 지금 아연이 갚고 있는 건 나날이 불어나는 이자와 전재철의 발목 값이었다.

 

그리고 미성년자였던 그녀를 그래도 최 사장에게 넘기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그러니까 전재철의 폭언과 폭력도 다 참아낼 수 있었는데….

 

 

이런 결말은 절대로 아니었다.

 

차라리, 죽을 만큼 맞아 몸을 망치는 게 나았다….

 

“그 빚, 내가 갚고 있잖아. 유흥업소, 도박, 여자에 갖다 쓴 아저씨 사채! 앞으로도 내가 갚으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전재철이 눈을 희번떡였다.

“이게 오늘 뭘 잘 못 처먹었나.”

 

“이 집도, 우리 아빠 집이야. 당신 같은 쓰레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이게 미쳤나! 오냐 그래, 오늘 네 아버지 만나게 해줄게! 죽어 봐.”

 

이성이 끊긴 얼굴로 손목에 감겨있던 가짜 롤렉스 시계를 풀어낸 전재철이 아연의 멱살을 감아쥐었다.

 

우악스러운 힘이 가슴팍에 꽂히자,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때였다.

 

쾅쾅쾅.

누군가 현관문을 부술 듯이 세게 두드렸다. 신경질적인 벨 소리와 함께.

 

이에 아연을 바닥에 팽개친 전재철이 현관문을 향해 날래게 걸었다.

 

“누구야!”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욕지거리와 함께 전재철이 문을 열어젖히자 검은 양복의 남자가 한쪽 다리를 천천히 집어넣는 게 보였다.

 

허락 없이 남의 현관에 들어선 남자는 키가 크고 거대했다.

 

이에 당황한 전재철은 한참이나 높은 방문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느라 꼴사납게 뒤로 물러나는 모양새가 되었다.

 

“씨, 씨발, 뭐냐고!”

 

차라리 지금, 도망칠까!

아연은 순간의 고민에 검은 양복의 남자를 알아채지 못했다.

 

“제가 사장님 차를 박은 거 같은데.”

 

잘못을 고하러 온 남자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못해 거만했다.

“뭐? 잘 대 놓은 차를 왜 박아!”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연의 신경을 끄는 건 유독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설마……!

 

“이 새끼 지금, 웃어? 술 마셨냐? 경찰 불러!”

 

전재철의 시비조에도 아랑곳없는 남자의 분위기는 어딘가 익숙했다.

 

흐려졌던 정신을 가다듬고 소매로 눈을 꾹 눌러 닦자 한결 선명해진 시야에.

 

좁은 현관을 가득 채우고 서 있는 차도혁이 보였다.

기어이, 그가 찾아온 것이었다.

 

 

“확인부터 하시죠.”

 

막무가내로 큰소리치는 전재철을 아래 두고도 남자는 아연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움직였다.

 

목표물을 확인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은 압도적일 만큼 완벽했다.

 

이에 기세가 꺾인 전재철이 잽싸게 밖으로 나가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

 

남자는 조금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려는 듯 혀를 찼다.

 

 

“하, 개판이 따로 없네.”

 

부옇게 일렁이는 시야에 거실로 오르는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미려하게 잘 빠진 구두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살림살이를 흥미롭게 눈에 담던 그가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아연의 손 앞에서 멈추었다.

 

“내가 너무 늦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느른하게 붙인 남자의 말에 아연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 소리는 마치 일이 이렇게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당신!”

 

그러나 아연은 곧 생각을 달리했다. 차도혁이라면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일을 이렇게 만드는 쪽이 더 어울린다고.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엉망이 된 여자를 관찰하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굽혀 천천히 앉았다.

 

“!”

 

그러자 그에게서 세련된 숲 향이 퍼져 왔다.

 

“흠.”

그가 손을 뻗어 아연의 턱 끝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선홍빛 입술에서 시선을 멈춘 그가 잘생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엄지로 갈라진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제안한 일이 훨씬 괜찮은 것 같은데.”

 

“여기 왜 왔어요?”

 

아연이 비명처럼 쏘아붙였다. 남자의 입매가 천천히 위로 휘었다.

 

“그 계약 말입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하고. 아무래도 아쉬워서.”

“누가, 누구한테…. 기회를 준다는 거예요.”

 

“당연히, 은아연 씨가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거지.”

 

주객이 뒤바뀐 남자의 말에 아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말이 돼요? 협박해서 끌고 가고 미행하고 무단침입해도 처벌받지 않는 사람이, 기회를 달라고요?”

 

이렇게 멋대로 남의 집안까지 들어 와놓고선. 그것도 구둣발로.

아연은 저도 모르게 격양되어 갔다.

“쉬! 진정해요. 그건 내가 미안합니다.”

 

“…….”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사과였다. 그렇다고 진정성이 느껴지지도 않은.

 

‘그럽시다, 그럼.’

 

담백한 포기, 그는 매사가 그리 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저 입발림이란 걸 알았지만 이성이 고장 났는지 미안하다는 남자의 말에 아연은 제 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걸 느꼈다.

 

도혁은 마구 흔들리는 아연의 눈동자를 기민하게 살폈다.

 

“이제 은아연 씨가 갑입니다. 3일 동안 잠을 굶었더니 지금 내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라. 뭐든 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뭐든 요구해 봐요.”

 

“하,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요. 3억이요? 네, 너무 절실한 돈이긴 한데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절대 모르는 게 있어요. 3억, 아니 수천억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인생 같은 거요!”

 

 

아연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상하게 심장이 뛰고 설움이 북받쳤다.

타인 앞에 쏟아진 감정이 우스웠다.

 

부끄러움에 직설적인 그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차도혁이 검지 하나로 그녀의 턱을 당겨 올리자 어쩌지 못하고 다시 붉은 눈동자와 얽혔다.

 

피식 웃는 남자가 헝클어진 아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낮게 뇌까렸다. 내리뜬 눈 아래 그림자가 져 바로 앞의 남자는 까마득해 보였다.

 

 

“잘 들어요, 마지막이니까. 이제 곧 전재철이 돌아올 겁니다. 당장 은아연 씨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단순하게.”

 

당연하게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맞는다고 끝날 일도 아니었다. 몸이 나으면 또 최 사장에게 끌려가게 될 테니까.

 

바닥을 짚은 아연의 부러질 듯 가는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손톱 끝이 파일만큼 파여 핏물이 밴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은아연 씨 주변에 널린 쓰레기는 내가 치워 드리겠습니다. 전재철도 최 사장도 더는 은아연 씨 못 볼 겁니다. 어때요.”

 

“그게… 무슨.”

 

연갈색의 눈동자에 드디어 색이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다 해준다고 했잖아요. 간단한 예를 든 겁니다. 마음에 들 거 같은데.”

 

아연은 남자의 말을 달리 부정할 수 없었다.

 

절실할 때 나타나나 차도혁, 그리고 도피처가 될 그의 저택.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실소가 터지자 가느다란 아연의 몸이 흔들렸다.

 

“재밌네요….”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차도혁이 손을 내밀었다.

 

예의 그 문신이 도드라져 보였다. 아연은 개의치 않고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도, 죽이는 건 안 돼요.”

 

 

하, 남자의 긴 듯 짧은 웃음이 아연의 귓가를 스쳤다. 흐트러진 적 없던 반듯한 얼굴이 사람을 홀릴 것처럼 굴곡졌다.

 

“예, 알겠으니까 계약합시다.”

 

“…….”

아연은 이윽고 차도혁의 손을 잡고야 말았다.

 

 

007.

 

차도혁의 저택은 내로라하는 호화 빌라와 주택들의 군락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셰리를 입양한 박 의원의 빌라가 저 아래 있었다.

 

고대 어떤 영주의 성처럼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곳.

그러나 반대로 아래에서는 숲으로 보여, 저곳에 저택이 있으리라고는 쉬이 알아차리기 힘든 위치였다.

 

 

도혁의 호화로운 세단이 저택 깊숙한 곳에서 멈추었다.

 

 

“내리면 됩니다.”

 

거의 한 시간만이었다. 아연의 집을 나선 뒤 그가 아연에게 다시 말을 건 게.

 

시선도 주지 않고서 내리라는 말만 던지고서 도혁은 먼저 내렸다.

 

“아, 저.”

 

도혁을 부르려던 아연은 기사가 차 문을 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차에서 내려야 했다. 궁금한 게 많았는데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저택에 도착해 버렸다.

 

 

“하.”

 

차에서 내리자 청량한 산 공기에 숨이 트이는 걸 느낀 아연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숨죽여 차도혁 대표의 기를 받아내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차의 너른 내부 공간에서도, 차도혁과 가까이 앉아 있는 상황은 어쩐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는 아연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은아연 씨.”

 

웃으며 다가온 남자는 한노진 실장이었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낯선 곳에서 아는 얼굴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다행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네요.”

 

“네….”

 

수많은 말로 계약을 종용했던 남자, 그때는 진저리가 났던 미소였는데.

저 한결같은 미소가 친근할 정도였다.

이 커다란 저택이 주는 위압감 때문에.

 

 

그때 보조석에 탔던 직원에게 무언가 보고받던 도혁이 다가왔다.

 

“마무리 부탁합니다. 한 실장님.”

 

“네. 중요한 오전 스케쥴을 끝내셨으니 이제 좀 쉬십시오.”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 도혁이 아연을 한번 일별하고는 건물과 건물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다.

 

잡아 온 사냥감을 수종에게 넘기는 주인처럼, 그의 뒷모습에서 당당한 피로감이 풍겼다.

 

저렇게 그냥 가버리는 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절 두고.

 

1시간 전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연 씨는 이쪽으로.”

 

아연의 앞을 막아서며 미소로 응대하는 건 노진이었다.

 

아연은 할 수 없이 노진을 따라 도혁이 사라진 방향과 반대로 걸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재철은 어떻게 되는 건지.

자기 입으로 최소한의 설명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온갖 감언이설로 데리고 온 사람답지 않은 태도에 아연은 어쩐지 서운한 기분을 느꼈다.

 

그나저나 여긴 정말이지.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것 하나만은 명징하게 다가와 속이 아렸다.

자신의 처지와는 너무 상반되어서.

 

뒷산과 경계가 없는 정원의 장관을 보노라니, 거대하고 수려한 남자의 뒷모습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현실감을 느꼈다.

 

결국 그의 저택에 왔고 오늘부터 대책 없는 간병을 시작해야 했다.

 

 

***

 

“첫날이라 경황이 없을 테지만, 크게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흠, 은아연 씨?”

 

“아, 네. 잠시만요.”

 

아연은 곧바로 노진의 업무실로 와서 좀 전까지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 정확히는 도혁이 앓고 있는 몽유병의 기전과 증상에 대해 수업을 들었다고 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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